의식의 흐름대로, 25. 9. 8.~9. 14.
(상황설명: 이번 책의 첫 북페어가 약 열흘 앞으로 다가옴. 180*60센티미터 넓이의 테이블을 어떻게 꾸밀지 구상하고, 홍보용 엽서를 만들고, 준비물을 챙겨 슬슬 짐을 싸야 하는 상황)
0750. 바깥 날씨가 괜찮아 보이는데 간만에 아침산책이나 해볼까? 아니면 커피나 마시며 작업? 그나저나 엽서 제작비가 생각보다 많이 들더라-_- 책도 아니고 작은 종이 낱장일 뿐인데 왜 비싼 거냐고?? 걍 책갈피로 노선을 틀까?-_- 아오 그 큰 부스 뭘로 채우냐... 이러다 발등에 불 떨어지겠는데 ㅋㅋㅋㅋ 아맞다 반쯤은 원화전시로 채우기로 했지ㅋㅋㅋㅋ 짐 무게도 생각해야 돼. 진열대나 액자 같은 거 최대한 가볍고 캐리어에 들어가는 크기로.
1359. 아까 10시경에 밖에 나갔더니 기분 급좋아짐. 완전 산책하기 딱 좋은 선선한 날씨! 앞으로 9~10월 두 달은 실컷 나돌아다녀야겠다고 생각. 공원 좀 걷다가 도서관 들러서 시집을 잠깐 봤는데 되게 좋은 시가 있었음. 제목은 ‘사과에 대해 쓰기’.
9월의 첫날이 오면 과일에 대해 글을 써야지.
...(중략)...
모든 사과 말고. 천천히 익어가는 느린 사과에 대해. 익기 전에 떨어져 뒹구는 사과에 대해.
더 맛있어지고 더 커지는 사과 말고. 높고 단일한 사과 말고. 가을의 기울어진 햇빛 아래에서.
사과가 되려 했지만. 사과가 되지 못한 사과의 경우에 대해 쓰고. 제목을 사과라고 붙여야지.
이성미, [다른 시간, 다른 배열], 문학과지성사
0420. 새벽 3시쯤 깼는데 잠이 안 올 것 같은 예감이 듦-_- 책 읽다가 우유 한잔 마셔보는 중. 내가 여기 아닌 다른 집에서 살게 되는 날도 올까? 책장과 옷으로 둘러싸인 어두운 방을 보면서 생각한다.
1334. 엽서디자인 초안은 다 됨. 포토샵으로 4시간쯤 걸렸군...
1439. 엽서도 인디자인으로 만드는 게 나았겠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놔-_-
1732. 해 지면 조깅이나 다녀올까... 그거 몇 분 뛴다고 살 빠지는 거 아니고 먹는 걸 줄여야 되는데-_-
2003. 산책 가 말어-_- 아무래도 가는 게 건강에 좋겠지? 그렇다면 고민할 게 뭐냐ㅋ
2257. 운동도 하고 카드가맹서류도 보내고 엽서 인디자인 마스터페이지도 만듦. 내일은 엽서디자인 본격적으로 하다가 점심 먹고 북토크 가면 될 듯.
(상황설명: 지난번 일기에도 썼지만 1년째 고민 중인 그림책 워크숍이 있음. 이 워크숍으로 첫 그림책을 낸 작가들이 북토크를 한다고 해서 들으러 감)
[붉은 새] 김희현 작가: 그림 비전공자로서, 처음에는 내 그림이 어떤 스타일인지도 몰라서 고생함. 줄다리기의 순간적 몰입, 평소 안 쓰는 자세들을 표현하기 위해 밧줄을 사다가 직접 여러 자세로 사진을 찍어 동작 연구.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으로 표정 연구. 새 그림을 그리기 어려워 일주일 100장 목표로 엄청 많이 그려봄. 작업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하루키 루틴을 따라함(ㄷㄷㄷ...). 4시에 기상해 아이 어린이집 하원 전까지 그림만 그렸고, 매일 운동했음.
[줄줄이 줄줄줄] 장여회 작가: 14년차 일러스트레이터로, 전에 그렸던 교과서 삽화 스타일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 말놀이와 유머를 좋아하는 취향대로 여러 콘티를 그려봄. 안 쓰던 재료와 색상을 시험해보며 오리배만 수백 장 그림. 사람 그리기가 어려워 선생님 조언대로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을 모사하며 연구. 컴퓨터 툴에 익숙한 장점을 살려 손그림을 레이어로 나누고 편집·보정함. 워크숍 동기들끼리 지금도 스터디 중. 서로 의지할 동료를 얻어 좋았음.
북토크를 듣고 나니 그림책이란 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세계로 보임-_- 나는 저렇게까지 전력을 다할 열정까지는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그림책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 책을 기획하고 고민하고 훈련하고 작업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어서 유익했음.
0935. 이런젠장 치명적인 파본 발견ㅠㅠ 아악... 하... 심란...
1047. 그래도 무작위로 몇 권 뜯어본 건 괜찮긴 한데...
1343. 몇 권 더 뜯어보니 다 괜찮긴 한데... 어쩌다 한 권 잘못된 거겠지...? 구매자가 파본 발견하면 새 책 보내주면 되지... 다음 책엔 판권면에 꼭!!! ‘파본은 교환해 드립니다’ 문구를 넣어야겠다. 문구 안 넣어도 당연히 바꿔주는 거지만 그래도...-_-... (인쇄소에 문의한 결과 극히 드문 경우고 다른 책들은 괜찮을 거라 함)
2133. 생각해보니 엽서디자인은 월욜에 해도 될 듯. 걍 내일은 아날로그 휴일로 놀아버리자!(회피하느라 이성적 판단이 안 되고 있는 현장... 결국 나중에 후회하게 됨ㅋ)
0854. 오늘은 무슨 책을 읽을까. 하루쯤은 활자란 걸 안 보는 것도 괜찮을까. 하지만 그럼 계속 그림책 수업 들을지말지 북페어 어떡할지 이런 생각만 할 것 같은데-_- 책도 없는 건 너무 심심할 것 같단 말이야... 좋았어 [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인: 이후북스 책방일기](황부농·서귤, 알마)를 읽기로 했다.
1045. 단골 브런치 카페 들어옴. 오는 길에 새로 생긴 맨발 황톳길 걸어봤다. 말랑할 줄 알았는데 여러 사람 발에 다져져서 그런지 생각보다 단단했음. 외국인 가족이 와서 기념사진 찍더라 ㅋㅋ
1208. 카페 창밖을 보며 한참 멍때림. 그동안 머릿속을 스쳐간 생각들을 두서없이 적어보면.
- 아까부터 날아다니다 기어코 내 접시의 올리브유에 빠져 죽은 날파리를 닦아내며, ‘너도 죽기 싫잖아. 근데 왜 여기서 알짱거리다 내 밥에 뛰어드는 거야...’
- 전국의 수많은 독립출판 수업 수강생 중에서, 책을 만들고 싶었지만 못 만든 사람들에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못 만든 사람’으로서 긴 세월을 살았던 과거의 나에게도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니, 아직은 그만한 여유가 없을 수도 있는 거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나는 이런 걸 해보고 싶구나’라는 씨앗을 심은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씨앗마다 열매 맺는 시기가 다른 것처럼, 언젠가 때가 오면 그때 가서 만들어도 된다. 그게 반드시 ‘책’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살다 보면 이리 기웃 저리 기웃도 해볼 수 있는 거지. 물론 마냥 미루기보다는 한번쯤 몰두해서 완성해보는 것도 좋긴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는 없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잘하고 있는 거 아님?
- 500부만 찍을걸. 물류사 계약하지 말고 걍 집으로 받을걸...-_- 역시 내가 욕심을 부리긴 했구나-_- 1+1이 싸다고 충동적으로 2개를 사버리듯이 결정했나봐... 뭐 이런 삽질도 경험이겠지만.
- 판 책보다 산 책이 많아서 결국 잔고는 마이너스가 됐대도, 내가 열심히 책을 만들어 번 돈으로 남이 열심히 만든 책을 살 수 있었다면 그것도 충분히 좋지 않나? 손익계산은 숫자의 문제일 뿐, 내게는 전보다 많은 경험과 자산이 남은 게 아닌가? 시장의 관점으로 보면 이런 것도 소비자의 소비 합리화일 뿐이겠지만 적어도 나는 내 경험에서 소비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카페 앞 학교 건물 처마에는 1년 365일 고드름이 달려 있다. 아마도 페인트가 흘러내려 고드름 모양으로 굳은 듯.
- (대형서점의 무료배송 서비스에 대해 생각하다가) 아니, 그러고 보니 배송료 3천원 내봤자 왕복 지하철 기본요금보다 싸네? 직접 가서 사오려면 교통비가 드니까, 오프라인 구매나 온라인 구매나 비용은 쌤쌤이네? 와... 어쩌다가 ‘배송비 무료’가 디폴트 같고, 배송비 내는 게 손해로 보이는 세상이 됐을까? 물건에 날개가 달려서 혼자 날아오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시간과 수고를 들여서 내 집 앞까지 가지고 와주는 건데...
1618. 이후북스 책방일기 읽다가 정신이 확 든 부분.
(책방에서도 책 판매를 위해 노력하지만) 여러분 스스로 제작한 책에 대해서 저보다 더 잘 알고 더 많은 애정을 품고 있으며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결과물을 사랑하시겠지요? 누군가가 읽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드셨겠지요? 나를 혹은 누군가(무언가)를 알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쓰고 찍고 만드셨겠지요? 그러면 많이 표현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든 책을 자랑스럽게, 때론 뻔뻔하게 알렸으면 합니다. ... 독자들 입에 안 맞을 수도 있겠지요. 그건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누구의 입맛에도 다 맞는 책은 없습니다. 작품 뒤에 숨지 않을 때 더 큰 사랑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렇구나! 자랑하고 싶은 다른 책들이 많았지만, 일단 지금은 내 책부터 자랑해야 할 때구나! 자랑하려고 마음먹고, 그런 시각으로 보면 자랑할 만한 점이 얼마든지 있는 책이 아닌가? ......라는 걸 출간 한 달 만에 깨달음-_-
SNS에 넘쳐나는 자기자랑들에 내 자랑까지 보태기가 왠지 꺼려졌었지만, 남들 다 하는 자랑 나라고 못할 건 또 뭔가? 인생 살면서 자랑하고 싶은 뭔가가 있는 게 잘못인가? 꼭 누가 봐도 완벽하고 대단한 것만 자랑해야 하나? 오늘 받은 첫 월급을 자랑하듯이, 내가 끓인 김치찌개를 자랑하듯이, 귀여운 반려동물이나 식물을 자랑하듯이, 작지만 내겐 제일 소중한 내 자취방을 자랑하듯이 내 책을 자랑할 수도 있는 거지.
자랑이란 게 꼭 재수없는 오만이나 허세는 아니다. 나만 잘났고 이것만이 성공이고 이렇게 못하면 루저라는 식으로 주장하지만 않으면 된다. 나 또한 남들의 자랑을 보면서 괜한 비교로 질투나 자괴감을 느낄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저런 걸 좋아하고, 저런 데서 보람을 느끼는구나’ 하고 담백하게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내 책의 자랑포인트’를 쭉 적어본다면.
- 퇴사 14개월 만에 드디어 책 한 권을, 생애 첫 단행본을 만들었다. 1년이 넘는 백수 생활에도 완전히 흐트러지지 않고 뭔가를 해냈다.
- 처음으로 원고지 500매가 넘는 긴 원고를 썼고, 책 쓰기에 약간 자신감이 생겼다.
- 글, 그림, 디자인, 편집 등등 모든 걸 혼자 해냈다.
- 내 글과 그림들도 사실 꽤 마음에 든다.
- 요즘 같은 가속사회에 나름 의미 있는 주제를 담고 있다.
- 추천할 만한 책이나 활동, 개인적인 디지털 디톡스 노하우 같은 정보들도 꽤 담았다.
- 생애 최초로 출판사 대표가 됐고 자영업자, 소상공인이 됐다.
- 소심하고 낯가리는 파워I임에도 용기 내서 북페어 참가 신청을 했다.
- 앞으로 만들고 싶은 책들도 많다.
1919. 광진교 8번가(광진교 다리 밑 전망대)에서 책 끝까지 읽고, 노을 사진 찍고, 광나루에서 한강라면 먹어봄. 왠지 집에 들어가기 아쉬워서 집 근처 카페에 들어옴. 만 보도 안 채웠는데 벌써 무릎이 아픈 것 같음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