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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nurfavoritesong Dec 21. 2015

노인이 왜 청춘이에요?

2장. 점잖은 청춘

 우리나라가 네덜란드나 일본만큼 성(性)에 대해 개방적인 편은 아니나 전통적인 과거의 정서를 생각해본다면 그 문이 활짝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SNL 코리아>나 <마녀사냥>처럼 비교적 방송심의 제한이 덜한 케이블 채널에서 이미 19금 예능을 표방하는 다양한 콘텐츠들이 그 방송국의 대표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공중파에서도 일명 섹드립이라고 불리는 아슬아슬한 성적 농담을 즐기고 있다. 이미 그러한 19금 예능 트렌드는 유행이 끝났다는 평가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이제 자유롭게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정서가 우리 생활 속에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버린 것이다. 더 이상 성은 과거처럼 부끄럽고 숨겨야 할 것이 아니라 함께 공유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성에 대한 개방성은 젊은 층, 특히 20대와 30대 더 넓게 보자면 40대에서 50대까지로 한정되어 있다. 다시 말해 노인의 성은 아직도 꽁꽁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TV매체를 통해 이러한 현실을 엿볼 수 있다. 대부분의 드라마 속 노인들은 주인공의 가족 구성원으로 자녀들의 결혼 생활이나 가정에 영향을 끼치는 역할을 부여받을 뿐 여성과 남성으로서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풀어내지 못한다. 주말드라마의 경우에는 간혹 노인의 이성교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곤 하지만 주로 정신적인 방식과 표현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한정적이다.

 만약 드라마에서 노인의 키스신이나 베드신이 나온다면 시청자들은 어떤 반응을 취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젊은 남녀의 키스신이나 베드신과는 달리 이질적인 느낌을 받으며 불편한 기색을 보일 것이다. 구조화된 상징체계 안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노인을 주체적인 여성과 남성이 아닌 무성(無性) 또는 중성(中性)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인들이 성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 육체가 쇠약해짐에 따라 성욕 또한 점점 사라지리라 여기는 것이다. 허나 정말 그럴까.

<죽어도 좋아>의 포스터
<죽어도 좋아>의 한 장면

 2002년 상당히 파격적인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가 개봉되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어느 커플의 이야기를 담은 <죽어도 좋아>이다. 이 작품은 각자의 배우자와 사별을 하고 만난 일흔 넘은 노인들의 사랑 이야기로 그들은 여느 커플과 다름없는 로맨스를 즐긴다. 이 작품의 묘미는 그 사랑을 나누는 방식을 표현하는 데에 있다. 작품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수차례의 짧지 않은 실제 정사 장면을 통해 영화의 궁극적인 주제인 노인들의 성생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섹스를 할 때마다 달력에 표시를 하는데 영화 끝부분에 가서 한 달의 절반 이상이 표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노인들의 활발한 성생활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의 등장인물은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뿐이다. 타자의 사회적이고 관습적인 인식을 배제시키고 오로지 노인들의 사랑, 성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의도인 것이다. 작품의 감독과 주인공들은 외롭게만 살 게 아니라 자신 있게 사랑을 만들어야 한다며 스스로 행복을 찾아 나설 것을 제안하라고 이야기한다.

YTN <시사탕탕>의 한 장면

 스스로 행복을 찾아나가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옳지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노인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일명 아줌마 문화이다. 노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탑골공원에서 박카스를 주는 척하며 성매매를 제안하는 박카스 아줌마부터 산속에서 맥주나 음료를 파는 척하며 성매매를 제안하는 다람쥐 아줌마, 산새 아줌마 등을 통해 성적 욕구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는 노인문제에 있어 또 다른 화두로 제기되고 있는 부분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그 범죄 형태가 다양해지고 있다고 한다.

 위와 같은 모습들은 노인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성적 측면에 있어서 마냥 소극적이거나 그 기능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죽어도 좋아>를 보고 공감하며 자신들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찾으려는 노인들이 많아졌다는 점과 2011년 아줌마 문화에 대한 파이낸셜뉴스 스타엔의 인터뷰에서 한 60대 할아버지가 젊은 사람들도 이성을 만나려고 홍대 앞 클럽에 가지 않느냐고 발언하는 모습을 통해 그들의 성생활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아줌마 문화는 그것을 대하는 방식과 생각에 있어 분명 문제적임을 알지만 본 텍스트에서 그 현상을 어디까지나 노인의 성생활 유무 차원에서만 접근한다면 말이다.

 실제로 보건복지부가 전국의 65세 이상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성생활을 하는 사람이 전체의 66% 즉, 노인 3명 중 2명 이상이 지속적으로 성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위의 이야기들이 단지 소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글을 본 대부분의 독자들은 전혀 인지하고 있지 않았던 노인의 섹슈얼리티에 관해 접하게 되면서 새로움과 놀라움을 느낄 것이다. 자, 이제 진정하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지금 왜 놀랐는가.

 우리가 놀란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듯 그동안 노인을 무성(無性)과 중성(中性)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동안 성을 지배 집단으로 자리 잡은 특정 사회 계급의 산물로 보았다는 것이다. 사회의 의미 작용 속에서 우리는 노인의 성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고 사회 내부에서 구조화된 이데올로기를 통해 바라보았다. 노인에게 성욕은 없을 것이다, 있다 하더라도 윤리와 관습의 이름 아래에서 그것을 억압해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왜냐, 노인은 점잖아야 한다는 특유의 정서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노인의 섹슈얼리티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사회에서 노인을 성적 무능력자로 바라보며 성적 능력을 강제로 거세시켜버린 것이다. 전통적인 윤리관과 봉건적인 사고 때문에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성적 능력이나 욕구의 표현을 망측하다 또는 주책없다는 식의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고정관념을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쉼 없이 변화하는 현 세태에서 노인의 성에 관해서도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 당연하다. 주류 집단은 노인들을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 않은가. 섹슈얼리티는 자유분방하고 탈관습적인 청춘의 이미지 중  하나이기도하다. 그런 의미에서 되찾은 청춘, 꿈꾸는 청춘, 제 2의 청춘은 노인들의 되찾은 성, 꿈꾸는 성, 제 2의 성도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노인의 청춘을 표방하는 집단에서 그들의 섹슈얼리티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대부분 교육과 생산에 목적을 두고 있을 뿐이다. 물론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이나 미팅 프로그램이 있기도 하다. 실제로 춘천시립복지원에서 노인의 성에 대한 인형극을 하기도 했고 약수 노인복지관에서 독거노인들을 위해 단체 미팅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단발성에 그치며 체계적인 활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고령화 시대를 운운하며 노인들의 교육을 촉구하고 일자리 창출에 힘을 쓰느라 아직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분야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는 것인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던 소외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전남타임스 청춘축제 관련 기사
한국노인인력개발원 페이스북 프로필 이미지
MBC 독거노인 단체 미팅 관련 뉴스
약수 노인복지관 황혼의 커플매칭 관련 안내문

 뿐만 아니라 단발성이더라도 노인의 성과 관련된 프로그램들을 보았을 때 무언가를 배우고 생산하고 경제활동을 하는 프로그램들과는 달리 청춘이라는 키워드를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주목해볼 만하다. 실제로 일하는 노인, 행복한 나주라는 슬로건을 내놓으며 나주시에서 주최한 노인사회활동 활성화 대회는 청춘축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의 슬로건은 청춘, 가슴에 피는 꽃인데 반해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미팅의 경우에는 노년의 로맨스, 독거노인 단체미팅, 황혼의 커플매칭 등 비교적 무미건조하며 청춘의 이미지를 전혀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일부가 아닌 대부분의 기사나 홍보자료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주류 집단과 주류사회가 노인을 청춘으로 명명하는 데에 있어 지나치게 선택적이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이러한 면면들을 미루어 볼 때 결국 노인의 사회 경제적 측면의 잉여는 낭비될 수 없으며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 데 반해 성적인 측면의 잉여는 방치되거나 큰 관심이 없어 보이거나 혹은 그 비중이 현저하게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결국 청춘이라는 키워드를 상징체계 집단의 구미에 맞게 재단한 것이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청춘이 아닌 반쪽짜리 청춘의 프레임을 노인들에게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외면적으로는 또 다른 도전, 제 2의 도전을 향한 청춘으로 나아가면서 내면적으로는 체통을 지키기를 요구당하는 노인세대를 우리는 과연 누군가의 의도대로 청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동시에 그것이 노인을 위한 길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정말 노인을 청춘으로 바라본다면 <죽어도 좋아>에서 노인을 대하는 시각이어야 하지 않을까. 어떠한 편견, 잣대, 부여, 재단도 없이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청춘이라는 키워드를 수없이 언급하는 여러 노인 프로그램보다 청춘이라는 말 한 마디 없이 그들을 보여주는 <죽어도 좋아>의 시각이 오히려 노인을 위한 청춘예찬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진심으로 노인을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청춘으로 보려는 시도가 아니라 노인 인력을 쉽게 구축하려는 도구로 청춘 프레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노인과 관련한 다양한 프로그램에 청춘이라는 옷을 입히는 것에 대한 더욱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생산의 역할에서 보면 예비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청춘을 노인에게 씌우는 것에는 젊은 날의 판타지를 이용하여 또 다른 의무를 부여하려고 하는 시도가 내포된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왜 선택적인 반쪽짜리 청춘을 운운하는 것일까.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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