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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nurfavoritesong Dec 21. 2015

노인이 왜 청춘이에요?

3장. 청춘, 도전이 아닌 도구

 이전 포스팅에서 나는 노인들을 청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주류 체계가 노인을 생산과 활동의 측면에서만 청춘의 이미지를 부여하며 재단하는 경향이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사회적 약자인 노인을 위하는  척하며 그들의 생활을 주류 집단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혹여나 몇몇 독자들이 오해할까 봐 노파심에 몇 자 언급하자면 나는 결코 복지의 성격을 포함한 교육이나 사업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앞의 장에서 수없이 이야기했듯 그러한 성격의 활동들이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노인들에게 접근한다는 것에 집중한 것이다.

 계속해서 제기해왔던 이러한 문제는 비단 노인의 입장에서만 불쾌한 것이 아니다. 청춘 노인에 숨겨있는 메시지는 2015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20대 30대 청년들에게도 상당히 불편한 지점이 있다. 이유는 누가 왜 어떠한 방식으로 청춘을 명명하고 있느냐를 생각해본다면 알 수 있다.

 청춘은 단면적으로 본다면 젊음을 의미하며 무한한 생명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아직 미숙하지만 진취적이고 그래서 무모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사회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상징 집단, 특히 기성세대의 대척자로 청춘 세대가 서있기도 하다. 정치적인 측면이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청춘은 그들과 대립하고 전복하려는 이미지가 강하다. 청춘들은 끊임없이 상징체계를 부수고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꾀한다. 그런 의미에서 청춘의 속성은 짓밟히면서도 슬기로울 수 있는 활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인지 시대의 큰 변화에는 항상 청춘들이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후시대에 근대 문물이 들어오면서 자신이 근대적 개인임을 인지하고 서구 근대문물과 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기존의 전통적인 가족중심에서 탈출하여 자유연애를 즐기는 등의 파격적인 행동을 취한 것도 청춘이었고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4.19 혁명이나 유신독재 반대 시위, 군사정권 퇴진 요구, 민주화운동 등 수많은 시위를 주도하고 적극적으로 행한 것도 청춘들이었다. 덕분에 한 시대에서 데모는 청춘의 상징물이 되기도 했다. 각각의 시대에서 청춘들은 기존의 체제에 굴복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자신들을 내던지며 변화로 뛰어들었다. 그러한 도전정신은 낭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속엔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낭만, 그 변화를 나와 우리가 일궈낼 수 있다는 낭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낭만은 남녀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모세대의 선택에 의해 배우자가 정해졌던 전통적인 방식의 혼인을 파괴하고 자유연애를 행했던 것을 시작으로 다방에서 시나 소설을 읊던 남녀들은 거의 대부분 청춘이었으며 현재 홍대나 강남, 이태원 등의 클럽에 모이는 남녀들도 대부분 청춘이다. 물론 이데올로기적인 점을 감안하면 전후시대 다방이나 지금 시대의 클럽은 본질에 있어 큰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누구의 속박 없이 자유롭게 연애하고 즐기는 모습은 그 어떤 세대보다 청춘 세대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것이다. 그러한 청춘의 개방성이 지금의 섹슈얼리티적인 콘텐츠나 문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때문에 당연하게도 그 중심에는 청춘이 자리 잡고 있다.

 이렇듯 청춘은 자유분방하여 기존의 거대담론을 끊임없이 전복하고 저항하려는 탈관습적인 성향이 강하다. 때문에 어느 울타리에 갇혀있지 않고 배움이나 학습, 사랑 등 다양한 방면에서 도전하고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그 어느 세대보다 부담 없이 주어진다. 청춘의 특권인 것이다. 동시에 청춘들은 앞으로의 세대를 이끌어갈 의무를 가지기도 한다. 때문에 그들의 역동성과 도전정신, 낭만 등은 사회 경제적으로 새로운 힘이 된다. 세대교체를 통해 비워진 노동의 자리를 채우고 시장경제에 뛰어들며 그들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부터인가 청춘에 대한 환상이 되어버렸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청춘들은 주류 체계에 대해 대범하게 반항하지도 못하고 그 안에 가능성이나 잠재력을 발산하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청춘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나 열정, 도전, 낭만을 취미생활이나 연애에 쏟아 붓지도 못한다. 사회 경제적 압박 속에서 청춘들이 에너지를 쏟아 부을 수 있는 곳은 취업뿐이다.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취업전쟁2>의 한 장면

 그러한 모습은 미디어를 통해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등장인물 성보라는 1980년대 서울대학교 수학교육과 학생으로 그 당시의 20대 청춘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녀의 동생이 “놀고먹는 대학생 주제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모습이나 윗집 이웃이 그녀가 학생운동을 하는 사실에 대해 “요즘 대학생 중에 데모 안 하는 애들이 어디 있어.”라고 언급하는 장면은 당시의 성보라의 모습, 즉 청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반면 요즘 유행하는 웹드라마 중 <취업전쟁>이라는 작품을 보면 성보라와 반대되는 2010년대 청춘들의 현실을 볼 수 있다. <취업전쟁>은 노량진에서 취업준비를 하는 4명의 취준생들 이야기를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주는데 에피소드의 제목들은 ‘못난 스펙을 둔 지원자라서 미안하다!’, ‘대기업과 서류광탈’, ‘950점 못 넘으면 토익 본 것도 아니라던데’, ‘나를 설명해주는 건 스펙’, ‘고고익선, 스펙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 ‘엄마, 나는 안 되나 보다’로 현재 청춘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지금 대부분의 청춘들은 <취업전쟁>에서의 4인방처럼 인정받을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응답하라 1988>에서 성보라의 부모님은 “이제 빚을 갚았으니 네 뒷바라지를 해줄 수 있다. 네 꿈인 사법고시 준비해도 된다.”라고 말하지만 <취업전쟁>에서 이유진의 부모님은 “그냥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회사에 들어가서 시집에 가라.”라고 말한다. 시대적 배경이나 정서를 고려했을 때 이러한 대사의 뉘앙스는 과거 청춘은 비교적 미래에 대한 꿈을 꾸며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분위기 속에 있었던 것에 반해 현재 청춘은 꿈보다는 현실을 버텨야 함을 보여준다.

 물론 성보라도 미래에 대한 고난과 역경, 갈등이 존재하지만 4인방의 것과는 다른 지점에 있다. 성보라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가정과 같은 개인적인 벽이지만 4인방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사회 그 자체인 것이다. 성보라가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것들을 4인방은 이룰 수 없으며 성보라의 직업이 꿈에 의해 결정된다면 4인방의 직업은 학력과 스펙에 의해 결정된다.

 미디어에서도 볼 수 있듯 과거에 비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청춘들이 살아남기 힘든 현실에서 사회는 그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라느니 요즘 청년들은 노력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러한 분위기를 통해 청춘들은 노력하지 않아서 지금의 N포세대를 맞닥뜨린 것처럼 여겨지며 계속해서 노력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노력은 결코 다른 분야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주류사회는 진심으로 20대 30대의 청춘에게 연애에 몰두하라, 취미생활을 즐겨라,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불의에 맞서라고 하지 않는다. 청춘의 노력은 자본주의에 의한 경제적인 노동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뿐이다. 2010년대의 청춘은 더 이상 다방면에서 도전의 가능성을 가진 자들이 아니며 새로운 무언가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앞으로의 경제활동을 이어갈 도구일 뿐인 것이다. 사회의 도구가 되지 못하면 패배자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노량진 원룸에서 스펙을 쌓고 토익 점수를 만들며 <취업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주류 체계는 청춘의 프레임을 노동과 자본으로 한정 지어 버린다. 청춘의 가능성에 한계를 두고 울타리를 쳐버리는 것이다. 이는 노인에게 입히는 청춘의 옷에서 단적으로 밝혀진다. 사회가 아무리 청춘을 노동과 생산의 중심으로 보지 않는다고 잡아떼도 노인에게 씌우는 청춘의 프레임을 보면 현실에서 청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 지 여실히  보여지는 것이다. 청춘 노인에게도 20대 30대의 청춘처럼 연애나 정의 같은 열정과 낭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사회 경제에서 잉여로 남기지 않으려는 노력, 끊임없는 생산 활동을 요구하는 분위기의 거대담론이 결과적으로 청춘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상정하며 그것을 노인세대에게까지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청춘이라는 이름은 이제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닌 도구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인턴>의 한 장면
<미생>의 한 장면

 도구로써의 청춘에게 꿈은 일자리를 찾는 것이며 노력은 일자리를 위한 것이고 성공은 일자리를 얻는 것이다. 이제 본질은 사라지고 자본주의에서 생산성을 위한 노력과 열정, 실천이 청춘이 되었다. 청춘 세대는 당연히 그러한 청춘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며 노인세대 또한 제 2의, 새로운 청춘을 맞이해야 한다. 청춘 세대와 노인세대 모두 인턴부터 시작해야 하는 사회가 와버린 것이다. 이는 영화 <인턴>에서처럼 낭만적이고 희망적이지만은 않다. 드라마 <미생>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의미구조는 어쩌면 청춘세대와 노인세대에게 동시에 가하는 폭력일 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처럼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청춘다움과 그것을 이용한 청춘 노인이라는 구조의 내부적인 의미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식으로 구조화된 상징체계를 그저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그것을 과연 자연스러운 사회적 현상으로 바라볼 것인가, 아무런 의심 없이 수용해도 되는 것인가. 결국 백발노인도 청춘이 되어야 하는 시대의 분위기와 현실은 청춘이 자본주의의 부속품에 불과함과 동시에 그것의 의무와 책임을 노인에게도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일까.

 이 지점에서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노인이  또다시 청춘이 되어야 하는 시대가 불편하다. 청춘의 입장에서 다시 말하자면 그 청춘의 이름이 본래의 뜻을 잃고 왜곡되어서 불편하다. 그래서 90년대 전까지 우리나라의 경제적 발전을 이끈 노인세대에게 은근슬쩍  또다시 그 의무와 책임을 부담하려는 사회가 불편하고 그러한 의미를 감히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사회가 불편하다. 지금과 같은 상징구조는 청춘의 의미를 재단하고 결국 노인을 세금충에서 탈피시키려고 하는 노력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묻고 싶다. 2015년의 대한민국에서 노인이 왜 청춘이냐고. 그 물음의 답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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