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버겁다면 당신이 누구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선명하게 알고 드러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흐릿하고 몽롱한 상태인 적이 많았다. 나와 타자, 그리고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데 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나의 시간은 대부분 제멋대로였다. 대게는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흐르지만 때로 앞뒤 설명을 모두 생략할 정도로 무서운 속도로 저만치 다른 좌표로 날아가버리기 일쑤여서 주변인들을 불안하게 했다.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는 대부분의 시간을 살았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른채 방치 된 반찬통 속 곰팡이처럼 나의 열정은 우연히 이상한 지점에서 피어오르곤 했다. 굉장한 속도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순식간에 피어난 곰팡이가 신비롭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지금와서 한 가지 분명한 건 그게 무엇이든 진실 보고 말하는 것이 나의 정체성일 것이라 자위하고 싶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즐거웠다. 오랫동안 렌즈가 망가져 흐릿한 내 아이폰 카메라가 꼭 나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카메라를 고치고 선명하게 세상을 찍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전도 뭐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마감이 없었다면 절대로 뱉어내지 않았을 나의 이야기들을 직면하는 시간은 예상과는 다르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그 무엇이 되고 싶다. 어쩌면 나는 그냥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미션캠프를 통해 내가 나를 인터뷰한 전문을 옮겨본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두 아이의 엄마로 직업인으로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것, 정신과 영혼 가까이에 있는 것들을 사랑한다. 오랫동안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1년 전부터 시, 동화, 에세이 같은 글을 쓰고 싶어 기웃거리고 있다.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H 언니가 자신이 쓴 동화 속 등장인물로 나를 그려주었다. 그 이름이 그랑이다. 동글동글한 발음과 부드러운 소리가 마음에 들어 언니에게 부탁해 필명을 선물 받았다. 이제 그랑으로 글을 써봐야지.
지금 하고 있는 일, 혹은 준비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회사인지 브랜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 것을 창조하고 만들고 싶다. 먹고사는 일과 일상에 치여 진행 속도가 느리다. 현재는 주로 기업이나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나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드는 일을 하고 있지만 나가 만든 그것을 통해 그림책, 에세이, 그래픽 노블 등 다른 장르에도 도전할 생각이다. 생각보다 전환이 어렵다. 5년 전 작가로 등록하고는 방치된 브런치를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본인의 성격을 단어로 표현하면 어떤 단어들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
열린 결말, 단정 짓지 않음, 분류하지 않음, 효율적이지 않음. 머릿속과 내면이 상당히 복잡하다. INTP라는 MBTI로도 상당 부분 내 특징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공상에 가까운 생각을 많이 하고 모호한 느낌으로 살고 있다. 하나에 꽂히면 무서운 속도로 넓고 깊게 파고들기 때문에 그 몰입의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다. 실행하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긴 것은 살아가는데 쓰이는 기본 에너지가 현저하게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왔다. 친구들은 나를 명랑하고 외향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대부분은 우울하고 무기력하다. 지극히 내향형의 사람이다.
당신이 가장 잘하는 것과 자신 없는 것은 무엇인가?
잘하는 것은 내게 흥미롭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 하지만 굉장히 주관적인 기준이라 다른 사람들은 이해해시 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 없는 것은 꼭 해야 하지만 도통 흥미가 없고 미룰 수 있는 일. 아이를 키우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 예를 들어 아이의 하루 스케줄 짜기, 학원 라이딩, 청소 빨래, 식사 준비와 치우기, 공과금 세금 내기 등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집 안팎 일들. 건강하고 효율적인 루틴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 자연, 동물, 바람, 흙, 나무, 햇빛. 그냥 존재하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것들. 마음, 감각, 느낌, 분위기처럼 말로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 골똘히 탐구하고 생각하는, 무엇인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 그중에서 제일은 바로 아이들.
당신의 삶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 그 중간 단계의 자잘한 영향을 포함한다면 남편. 그로 인해 나 자신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하게 되었으니 굉장한 영향을 준 사람임이 분명하다. 가족 관계 안에서 오는 기쁨과 슬픔을 통해 이제야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나를 살아 있게 하는 두 아이. 아이를 낳아 기르며 나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도전은 무엇인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나은 것. 계획도 생각도 없이 그냥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건 도전, 그 이상의 것.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다.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그 어려움을 이겨낸 원동력은 뭐라고 생각하나?
어려움과 힘듦을 이겨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늘 깊이 오래 겪었고 결국은 모두 지나갔다. 지금도 지나가는 중이고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주로 어떨 때 슬럼프가 오고, 그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하는 편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것도 시도할 수 없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리 고민해도 알아낼 수 없을 때. 사실 지금이 너무 그렇다. 뉴스를 볼 때마다 그렇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열정적이었던 순간은 언제였나?
몇 가지 순간들이 떠오른다. 첫 아이가 태어나고 매일 당근, 양파, 소고기를 다져 볶고 쌀을 불려 삼시 세끼 핸드 메이드 이유식을 만들었다.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면서 장보고 만들고 먹이고 치우느라 하루가 훌쩍 갔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미련하게.
육아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 방황하던 시절 세상에 없던 아버지 잡지를 만들었다. 세상에 꼭 있어야 하는 매체였고, 잡지 창간과 회사의 시작에 열정을 쏟았다. 편집장으로 작은 부분 하나까지 붙들어 최선을 것들을 만들어 냈다. 아이 둘을 돌보며 당시 해냈던 일들의 다른 이름의 ‘살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실패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소중한 실패. 결혼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평생 친구를 얻는 것이라 생각한 결혼. 하지만 이제 안다. 사랑의 힘으로 가능했던 우리 모습은 원래 자신이 아니었다. 각자의 조각이 잘 맞는 부부도 있다. 한 때는 그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서로의 세계가 비슷해서 잘 맞는 관계가 이젠 부럽지 않다. 나를 넘어선 확장은 충돌과 부서짐 너머에 있다. 이제야 결혼을 사랑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얼굴을 한 남편을 통해서, 내 약하고 감추고 싶은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아이들을 통해서. 씨앗부터 고유의 색과 향을 품고 있는 자연의 나무처럼 우리는 모두 본연의 싹을 내고 계절을 지나 그렇게 피고 진다. 모두는 있는 그대로 충분히 아름다운 존재임을. 서로의 씨앗을 알아봐 주는 것이 사랑의 시작임을.
만약에 당신에게 100억이 생긴다면, 당신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
자연 속에 있으면서도 도시와 적당히 가까운 곳에 단독 주택을 마련하고 싶다. 우리 가족의 기호와 취향을 온전히 담은 각자의 방을 만들고 함께 하는 음악방, 서재, 꽃과 과일나무가 있는 정원이 집 중앙에 있으면 좋겠다. 개인 비서가 내가 일을 하는데 필요한 문서작성과 공과금과 세금 관련 일을 죄다 처리해 주면 정말이지 나는 뒤늦게 천재 예술가가 될 수 있을거 같다. 고장 난 컴퓨터도 고쳐주고. 내 물건들을 잘 관리해 주며 옆에서 챙겨주면 정말 좋겠네!
요즘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드나? 마음에 든다면, 혹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마음에 드는 부분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 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머리로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주의산만과 게으름. 몸과 손을 움직여야 하는데 너무 많은 생각과 그 생각에서 파생된 공상을 한없이 전개하고 있다.
지금 당신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
읽고 싶어도 밤이 되면 책을 덮어야 할 정도로 시력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서글프다. 건강 관리의 필요를 알지만 실천이 어렵다. 신체의 노화에도 생각은 더 명료해져 어떤 세대와도 수평적인 대화를 즐겁게 오래 나누는 어른이 되고 싶다. 나만 할 수 있는 앞으로의 일을 찾고 싶어서 에세이, 시, 동화 쓰기를 기웃대고 있다. 20년 가까이 에디터로 살다 보니 자꾸만 기획적 비평적 논리적인 시각으로 글 분석하고 편집하게 된다. 지금 가장 큰 고민은 창작자 모드로 전환하는 것. 제품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로 살고 싶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요?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더 나은 국가와 사회는 물론 자구 환경까지 다음 세대가 살아갈 더 나은 환경의 토대를 세우는 어른이고 싶다. 지금 당장보다는 다음 세대를 위한 일, 인류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나의 재능과 에너지를 사용하고 싶다. 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한 일을 구체적으로 준비하려고 한다.
10년 뒤 당신은 어떤 모습일까?
2033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 그림책 작가나 에세이스트라는 직함보다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잘 다뤄 나만의 개념과 세계관을 확장하는 예술가로 살고 싶다.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일을 오래 하면서 아이들 곁(내 아이들은 물론 주변의 아이들까지 포함)에서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다음 세대를 위한 일을 하고 싶다.
당신의 묘비명에는 무엇을 남기고 싶나?
마흔둘. 아직도 어떤 방향과 속도로 살아야 할지 방황하고 있는 내게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사회적 자아 말고 원래 나에 대해 이제야 탐구하고 있으니 이 관문을 넘어가면 내 묘비명에 남길 단어 정도는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내내 사라지고 싶었는데, 이제 더 오래 가족과 벗들 곁에 머무르고 싶어 졌으니 이걸로 충분하다.
오늘을 수요일로 착각하는 바람에 목요일 브런치 연재 마감까지 딱 한 시간이 주어졌다. 우울증을 진단받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미션캠프를 통해 나를 한 권의 책으로 기록했다. 2023년 가을 이태원 참사 이후에 쓸 글로 매주 주어진 미션에 답을 써내려가며 나의 서사를 기록했다. 옮긴 글은 7번 째 미션으로 나를 인터뷰하기 부분이다.
내 아이가 좀 더 저라면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그동안 얼마나 애쓰고 살았는지. 그리고 너도 괜찮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