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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랑 Nov 22. 2024

내가 나를 인터뷰하기

내가 누구인지 알기까지 40년이 걸렸다

 자신이 누구인지 선명하게 드러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흐릿하고 몽롱한 상태인 적이 많았다. 나와 타자, 그리고 우리가 사는 현실 서계에 초점을 맞추는 데 늘 얼마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나의 시간은 대부분 제멋대로흘렀다. 대게는 느리게, 나만의 시공간에 머물다 어느 순간 갑자기 앞뒤 설명을 모두 스킵한 채 무서운 속도로 다른 좌표로 날아가버리기 일쑤여서 주변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다.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른 채 방치된 반찬통 속 곰팡이처럼 나의 호기심은 아주 우연히 이상한 지점에서 피어오르곤 했다. 예측할 수 없는 방향과 굉장한 속도로 순식간에 반찬통을 잠식해 버린 곰팡이이가 가끔은 신비로웠고, 때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 한 가지 분명한 건 그게 무엇이든 진실 을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는 것이 내 정체성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진실은 주로 어둠 속에 존재했다.

 렌즈가 망가져 흐릿해진 내 아이폰 카메라로 찍은 세상이 내가 보는 세상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세번의 계절을 그 흐린 카메라를 쓰다가 친구의 성화에 못이겨 렌즈를 고쳤다. 흐릿한 이미지에 익숙해진 탓인지 선명한 사진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난 여전히 흐린 눈을 하고 세상을 보고 살아가고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마주한 나는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같은 나였다. 마감이 없었다면 절대로 뱉어내지 않았을 나의 이야기들을 직면한 과정이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여전히 그 무엇이 되고 싶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원래 그 무엇이었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두 아이의 엄마로 직업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것, 정신과 영혼 가까이에 있는 것들을 사랑한다. 오랫동안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1년 전부터 시, 동화, 에세이 같은 글을 쓰고 싶어 기웃거린다.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H 언니가 자신이 쓴 동화 속 등장인물로 나를 그려주었다. 그 이름이 그랑이다. 동글동글한 발음과 부드러운 소리가 마음에 들어 언니에게 이 근사한 필명을 선물 받았다. 이제 그랑으로 글을 써봐야지.  


지금 하고 있는 일, 혹은 준비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현재는 기업이나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나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가끔 잡지 화보나 광고 비주얼 작업도 한다. 이미지를 다루는 걸 좋아해서 내게는 늘 즐겁게 임하는 작업이다.

 그림책, 에세이, 그래픽 노블 등 다른 장르에도 도전해볼 생각이지만 출판사를 차리거나 작가가 될 생각은 없다. 나만의 방식과 시각으로 메시지를 전할 물건(물성과 형태가 있는 무엇), 이미지, 언어를 찾는 작업을 하고 싶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그것이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으면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에 없던 것을 추구할 것이다. 이건 나 자신에게 거는 주문이고 다짐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전환이 어렵다. 5년 전 작가로 등록하고는 방치된 브런치를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회사인지 브랜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의 것을 창조하고 만들고 싶다. 여전히 누군가로 대체할 수 없는 일을 찾고 있다. 핑계 같지만, 아니 핑계이기도 하고. 먹고사는 일과 일상에 치여 진행 속도가 느리다.  


본인의 성격을 단어로 표현하면 어떤 단어들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

 열린 결말, 단정 짓지 않음, 분류하지 않음, 효율적이지 않음. 머릿속과 내면이 상당히 복잡하다. INTP라는 MBTI로도 상당 부분 내 특징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공상에 가까운 생각을 많이 하고 모호한 느낌으로 살고 있다. 하나에 꽂히면 무서운 속도로 넓고 깊게 파고들기 때문에 그 몰입의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다. 실행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는 건 살아가는데 쓰는 기본 에너지가 현저하게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돌아보면 답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 누구의 조언이나 성공 사례, 레퍼런스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지 않는다. 경험상 내가 하려는 것들은 외부에서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감을 믿는다. 다른 사람을 설득할 생각이 없다. 내가 생각하는게 맞다. 그래서 앞으로도 큰 성공이나 돈은 못벌거 같다. 친구들은 나를 명랑하고 외향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대부분은 우울하고 무기력하다. 지극히 내향형의 사람이다.


당신이 가장 잘하는 것과 자신 없는 것은 무엇인가?

 잘하는 것은 흥미를 끌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일. 하지만 굉장히 주관적인 기준이라 다른 사람들은 잘 이해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 없는 것은 꼭 해야 하지만 도통 흥미가 없고 미룰 수도 있는 일. 아이를 키우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상의 일들. 예를 들어 두 아이의 스케줄 짜기, 학원 라이딩, 청소와 빨래, 식사 준비와 치우기, 공과금과 세금 내기 등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집 안팎 일들. 건강하고 효율적인 루틴을 만드는 것은 내게 언제나 가장 어려운 일이다.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연, 동물, 바람, 흙, 나무, 햇빛. 그냥 존재하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것들. 마음, 감각, 느낌, 분위기처럼 말로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 골똘히 탐구하고 생각하는 존재들, 무엇인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 그중에서 제일은 바로 아이들. 천진하고 보드랍고 사랑스러운 작은 사람들.

 

당신의 삶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 그 중간 단계의 자잘한 영향을 모두 포함한다면 남편. 그로 인해 나 자신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하게 되었으니 굉장한 영향을 준 사람임이 분명하다. 가족 관계 안에서 오는 기쁨과 슬픔을 통해 이제야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이유를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나를 살아 있게 하는 두 아이. 아이를 낳고 기르며 지금의 내가 되었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도전은 무엇인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나은 것. 계획도 생각도 없이 멋모르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렇게 중요한 일을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해버렸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 도전, 그 이상의 것.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다.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그 어려움을 이겨낸 원동력은 뭐라고 생각하나?

 어려움과 힘듦을 이겨낸 적은 없었다. 늘 깊이 오래 치열하게 겪었고 결국은 모두 지나갔다. 지금도 지나가는 중이고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주로 어떨 때 슬럼프가 오고, 그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하는 편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것도 시도할 수 없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아낼 수 없을 때. 사실 지금 너무 그렇다. 뉴스를 볼 때마다 그렇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열정적이었던 순간은 언제였나?

 몇 가지 순간들이 떠오른다. 첫 아이가 태어나고 매일 당근, 양파, 소고기를 다져 볶고 쌀을 불려 삼시 세끼 핸드 메이드 이유식을 만들었다.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면서 장보고 만들고 먹이고 치우느라 하루가 훌쩍 갔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미련하게.

 육아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 방황하던 시절 세상에 없던 아버지 잡지를 만들었다. 세상에 꼭 있어야 하는 매체라는 창업자의 말에 설득당했고, 잡지 창간에 내 모든 열정을 쏟았다. 편집장으로서 작은 부분 하나까지 붙들어 최선을 것들을 만들어냈다. 2호를 만들면서 둘째를 임신했고, 다시 볼드저널의 리뉴얼을 맡았다. 두 아이를 돌보며 당시 해냈던 일들은 개인적으로는 엄마나 아내의 정체성으로 살고 싶지 않은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실패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소중한 실패라. 결혼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평생 친구를 얻는 것이라 생각한 결혼. 하지만 사랑의 힘으로 가능했던 우리의 모습은 원래 자신이 아니었다. 각자의 조각이 잘 맞는 부부도 있다. 한 때는 그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서로의 세계가 비슷해서 잘 맞는 관계가 이젠 부럽지 않다. 나를 넘어선 확장은 충돌과 부서짐 너머에 있다. 이제야 결혼을 사랑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얼굴을 한 남편을 통해서, 내 약하고 감추고 싶은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는 아이들을 통해서. 씨앗부터 고유의 색과 향을 품고 있는 나무처럼 꽃처럼 우리는 모두 본연의 싹을 내고 계절을 지나 그렇게 피고 진다. 모두는 있는 그대로 충분히 아름다운 존재임을. 서로의 씨앗을 알아봐 주는 것이 사랑의 시작임을.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만약에 당신에게 100억이 생긴다면, 당신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

 자연 속에 있으면서도 도시와 적당히 가까운 거리에 단독 주택을 마련하고 싶다. 우리 가족의 각자의 취향을 담아 독립된 방을 만들고 모두가 함께 하는 음악방, 서재, 꽃과 과일나무가 있는 정원이 집 중앙에 배치되어 있으면 좋겠다. 개인 비서가 내가 일을 하는데 필요한 문서작성과 공과금 세금 관련 일을 죄다 처리해 주면 정말이지 나는 뒤늦게 천재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 고장 난 컴퓨터도 고쳐주고. 내 물건들을  잘 관리해 주며 옆에서 챙겨주면 정말 좋겠네!


요즘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드나? 마음에 든다면, 혹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마음에 드는 부분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 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머리로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주의산만과 게으름. 몸과 손을 움직여야 하는데 너무 많은 생각과 그 생각에서 파생된 공상을 한없이 전개하고 있다.


지금 당신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

 읽고 싶어도 밤이 되면 책을 덮어야 할 정도로 시력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서글프다. 건강 관리의 필요성을 알지만 실천이 어렵다. 신체의 노화에도 생각은 더 명료해져 어떤 세대와도 수평적인 대화를 즐겁게 오래 나누는 어른이 되고 싶다. 지금 당장의 고민은 그림책 글작가 데뷔반을 등록했는데, 20년 가까이 에디터로 살다 보니 자꾸만 기획적 비평적 논리적인 시각으로 내 글을 분석하게 된다. 창작자 모드로 전환하는 것이 현재 내가가진 최대 과제이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요?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더 나은 사회와 국가는 물론 지구 환경까지 고려하여 다음 세대가 살아갈 더 나은 환경의 토대를 세우고 싶다. 다음 세대를 위한 일, 인류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나의 재능과 에너지를 사용하고 싶다. 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한 프로젝트를 구체적으로 준비하려고 한다.


10년 뒤 당신은 어떤 모습일까?

 2033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 그림책 작가나 에세이스트라는 직함보다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그만의 방식으로 잘 다뤄 나만의 개념과 세계관을 확장하는 예술가로 살수 있다면 좋겠다.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일을 오래 하면서 아이들 곁(내 아이들은 물론 주변의 아이들까지 포함)에서 더 나은 세상과 다음 세대를 위한 일을 하고 싶다.  


당신의 묘비명에는 무엇을 남기고 싶나?

 마흔둘. 아직도 어떤 방향과 속도로 살아야 할지 방황하고 있는 내게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사회적 자아 말고 나 자신에 대해 이제야 탐구하고 있는 중이라 이 관문을 무사히 지나간다면 내 묘비명에 남길 말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내내 사라지고 싶었는데, 이제 더 오래 가족과 벗들 곁에 머무르고 싶어 졌으니 아직은 이걸로 충분하다.


 오늘을 수요일로 착각하는 바람에 목요일 브런치 연재 마감까지 딱 한 시간이 주어졌다. 우울증을 진단받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를 한 권의 책으로 기록했다. 미션캠프를 통해 쓴 글을 이곳에 옮겨본다. 2022년 가을 이태원 참사 이후에 쓸 글이다. 매주 주어진 미션에 답을 써 내려가는 과정으로 누구나 참여해 자신을 책으로 기록할 수 있으니 프로그램에 참여해 봐도 좋겠다. 여기 옮긴 글은 7번째 미션으로 나를 인터뷰하기 부분이다. 내 소중한 첫째 아이 로카가 자라면 이 책을 선물하려고 한다.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그동안 얼마나 애쓰고 살았는지. 그리고 너도 괜찮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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