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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레 Mar 13. 2020

진짜를 만드는 게 더 싸다

더 나은 반복, 더 나은 디자인을 위해

"red apple"  - Irina Musonov / Germany

사과를 그린다. 빨갛게 동그라미를 칠하고, 위에 꼭지를 달고 끝.

아니면, 이런 방법도 있다. 씨앗을 그린다. 그리고 그 주위를 덮는 흰살을 그리고, 속심지를 그리고, 꼭지도 그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빨간 껍질을 그려본다. 이러나 저러나 결국 겉으로 보는 사과모양은 다를 게 없다.


그런데 갑자기 클라이언트가 와서 말한다.

"사과 반으로 좀 잘라서 보여주세요"

아까 동그라미만 칠했던 친구는 대략 난감해진다. 속을 다 그렸던 친구는 별로 어려울 것 없다는 듯이 반을 뚝 잘라 보여준다.


자, 이걸 반으로 썰어보자.


물론, 씨부터 그린 사과도 여전히 그림쪼가리에 불과하니 이걸 '진짜'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대략적인 비유가 그렇다. 이걸 '재활용이 가능한(Reusable)' 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고, '규칙에 기반한(Parametric)' 디자인 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요즘 내가 느끼는 건, 이게 결국 더 싸고 빠르게 먹힌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좀 품이 들수도 있다. 대충 그래픽툴에서 한번 만들어내면 될 법한 UI, 대충 펜툴로 그리면 될 거 같은 지도 위의 경로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걸 다 코드로 짜서 넣고, API로 불러서 채우고 하는 식이 되어야 앞에서 말한 '진짜' 비슷한 것이 된다. 그런데 기술의 발전은 이걸 더 빠르고 싸게 만들고 있다. 사과 껍데기만 그리면 더 빨리 끝날 줄 알았는데, 씨앗에 살붙여서 그리는 게 더 빨라지고 있다는 말이다. 


출처 - https://theqoo.net/diy/852920377

새로운 집으로 이사할 때, 어디에 무슨 가구를 놓아야 하는지 누구나 한번쯤 미리 종이 위에 그려봤을 것이다. 그런 시도조차 없다면, 하루종일 가구 위치를 바꾸느라 땀을 뻘뻘 흘려도 어쩌겠는가. 그냥 그렇게 살아야지.

거기서 좀 더 나아간다면, 아마 실측을 해서 평면도 위에 내가 원하는 가구들을 배치해봤을 수도 있고, 만약 거기서 좀더 나아간다면 3D모델링을 하고 가구들을 배치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델링이 가능한 디자이너라면, 종이위에 어설프게 그림을 그리는 시도 조차도 하지 않는다. 왜냐면 결국 그게 더 많은 시간을 빼앗는 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진짜'를 만드는게 더 빠르고 쉽다. 그리고 계속해서 바꿔볼 수 있다. 거기에 들어가는 땀은 침대를 왠종일 밀고 당기는데 흘리는 땀에 비할 것이 못된다.


가상으로 침대를 미는 것은 힘이 들지 않습니다.



차량 HMI 컨셉 작업을 하다보면, 네비게이션 화면을 디자인해야할 때가 종종 있다. 실제 작동하는 수준이 아니다보니, 그저 차가 지도 위에 흘러가는 정도로만 보여주면 된다. 하지만 말이 쉽지, 큰 지도 캡쳐해서 살짝 살짝 움직여 될 일이 아니다. 계속해서 변하는 내 위치에 따라 미묘하게 정보들이 업데이트되고 각도도 변한다. 위에서 내려다본 평면이 아니면 입체적인 빌딩들까지 등장하는데 이걸 빨간 동그라미 그려서 사과만들듯 쳐내기가 더 어렵다. 과거에는 AfterEffect 같은 모션그래픽 툴로 대충 얼버무리는 아주 대표적인 화면이었다. 

Audi 2016년도 컨셉카 화면 일부


이런 화면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은 이제 진짜 지도를 이용하는 편이 훨씬 간편하고 저렴하다. 별도의 3D모델링을 할 필요도 없고, 가짜로 숫자를 움직여 속도를 표현할 필요도 없다. 실제 지도 위에, 실제 경로를 뽑아내고, 그 위에 가상의 차를 얹어서 주어진 속도로 달리게 만드는 것. 즉, 진짜를 만드는 것이 더 싸게 먹히는 것이다. 


가속페달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속도를 조절하면, 정해놓은 경로따라 차는 진짜처럼 움직인다.


실제 작업에서는 

1) 가상의 공간에 일종의 주행기록기(Driving recorder)를 만들고, 

2) 거기서 차를 달린 다음, 

3) 주행 로그데이터를 뽑아내서 

4) 우리가 원하는 스타일의 지도 위에서 재생시키는 식으로 

원하는 영상을 얻어냈다. 물론, 이 경우 쇼카에서 영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굳이 영상으로 결과물을 만들긴 했다만, 이후 다른 쇼에서는 실제 지도에서 우리가 원하는 주행로그를 재생하는 식으로 네비게이션 화면을 구성했다. 

Mission e Cross Turismo 와 이후 프랑크푸르트에서 공개된 Taycan 화면


물론, 이런 작업도 mapbox처럼 API가 공개된 좋은 지도솔루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거에는 이런식의 작업을 하고싶어도 할 수 없었지만, (어쩌면 그래서 모션 그래픽으로 처리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약간의 프로그래밍으로 훨씬 자유도가 높고, 품이 덜 드는 디자인이 가능해졌다. 


좋은 디자인은 최대한의 반복(iteraiton)에서 나온다. 아주 약간의 차이를 주기 위해 너무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면 그 방법으로는 좋은 디자인을 이루기 어렵다. 사과의 다른면을 보기 위해 또 다른 사과를 그리지 말고, 돌려가며 볼 수 있는 진짜 사과를 만들어라. 초기에 약간의 수고가 들더라도, 그 덕분에 아주 다양한 시도를 짧은 시간 안에 반복할 수 있다면, 거기에 모든 자원을 투자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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