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부 종교 개혁의 흔적을 따라
그리 거창한 이유로 여행을 떠나진 않는다. 다만 여행 중에 그 이유를 발견하길 바랄 뿐.
여행이 길어지다보면 사람이 그리워진다.
여행을 떠나온지도 어느덧 3 주, 휴대폰을 분실한지 20일, 페이스북 계정이 잠긴지 10일 째. 전 유럽을 덮친 이상 고온 현상으로 내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동유럽이 이렇게 더웠던가?
이 더위는 아우슈비츠에서도 사그라들지 않아, 내 심신을 매우 지치게 했다. 차마 감탄사조차 내뱉을 수 없을 정도의 충격적인 광경, 끝없이 펼쳐진 수용소 대지, 내려쬐던 강렬한 햇살. 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결국 오후에 크라쿠프 구시가를 돌아보려던 생각은 고이 접어두었다. 멀미가 날만큼 뱅글뱅글, 구시가를 헤매던 픽업 버스의 기억만 남겨둔 채 나무그늘 우거진 캠핑장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틀간 머물렀던 '캠핑 클레파르디아'. 체코행 교통편 예약을 위해 리셉션 PC를 빌려주던 친절함까지.
캠핑장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대형 마트. 상당히 저렴하다. 1 즈워티는 한국돈으로 대략 300원 정도.
마트에서 재료를 구매해, 직접 요리해서 먹으면 여행 비용이 상당히 절감된다. 조미료를 챙겨보자.
나와 함께 할 종교 개혁지 탐방 여행 팀은 체코 프라하부터 일정을 시작한다. 교회에서 추진하는 일종의 패키지 여행이라 내가 즐기는 여행 컨셉과는 상당히 달랐지만, 그간 맨땅에 헤딩하듯 갖은 고생을 해가며 떠돌아다니던 기억을 돌이켜보니 새로운 여행 스타일에 대해 기대되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 여름에 유럽을 올 생각은 없었다. 유럽을 온다면 그 동안 즐겼던 자전거 여행의 방식으로 오랜 기간 누비고 싶었다. 게다가 이번 탐방 일정은 고작 12일, 왕복 소요 시간 빼고나면 얼마 되지도 않은 기간 아닌가. 패키지 여행 방식이 비싸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에 비해 다니는 곳은 너무 적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내게 찾아온 발상의 전환.
"비행기 티켓을 따로 끊어 최저가를 확보하고, 앞뒤로 새로운 일정을 붙이면 되지 않을까??"
종교 개혁지를 탐방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일정을 많은 일행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단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여행 테마는 나에게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왔고, 거기에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여행까지 덧붙일 수 있다니...이건 다시 찾아오지 못할 기회로 느껴졌다. 내 여행의 중심을 잡아주고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시켜줄 여정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체코 프라하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이번에 레오 익스프레스(Leo Express)를 이용했다. 크라쿠프에서 체코 국경 도시 보후민까지는 고속 버스, 보후민에서 프라하까지는 철도를 이용해서 이동하는 시스템을 갖춘 회사였다. 시간은 제법 걸리는 편이지만 가격이 저렴할 뿐더러 학생 할인이 어마어마했다. 30퍼센트 할인 받고 416 코루나였으니 한국 돈으로 2 만원이 되질 않는다. 사실 내가 할인받은 옵션 smile isic 같은 경우는 smile 멤버쉽 카드를 발급 받은 뒤에 국제 학생증과 함께 사용가능한 것이어서 버스 탑승할 때 기차에서 카드 결제하라고 직원이 말했었다. 왠일인지 기차에선 그냥 패스. 어차피 멤버쉽이야 회원가입하고 휴대폰 발급 가능하니 굳이 체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난 휴대폰이 없었는데. 헤헤
그 동안 동유럽 버스에 실망해왔었기 때문에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레오 익스프레스는 달랐다. 최신식의 버스, 괜찮은 품질의 다과가 스튜어드의 훌륭한 서비스와 함께 제공되었다. 기차 또한 고속열차는 아니었지만 나름 160km의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듯 객실 모니터로 중계해주고 있었다. 몇몇 메뉴를 주문할까 싶다가, 이제 식재료들 쓸 일 없다 싶어 그냥 챙겨온 음식들을 야금야금 먹었다. 사과와 살라미, 그리고 부르스트 종류.
레오 익스프레스 버스의 훌륭한 서비스. 커피와 차 중 고를 수 있다. 무료.
국경 도시 보후민. 역 건물이 제법 웅장했다. 환승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매끈한 기차의 자태에 반했다. 메뉴들의 가격도 매우 저렴한 편. 세트 할인까지. 시켜먹을걸 그랬다.
기차 여행은 지루할 틈이 없다. 이동과 독서와 새로운 정보까지 접하다보면 프라하 도착.
물론 체코어는 읽을 줄 모른다.
프라하 역에 도착한 내 기분은 해적왕이 된 몽키 D. 루피 정도나 알 수 있을까. 그 동안의 좌충우돌 사건사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방심하면 안되지,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페이스북 연락이 끊기기 전, 유일하게 알 수 있었던 정보는 일행들이 프라하에서 머물 숙소의 이름과 주소 뿐이었다. 문제는 시티맵을 유료로 판매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런 관광지도에 나올 숙소인지, 프라하 외곽에 위치한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황. 결국 믿을 건 인포메이션 밖에 없었다.
주소가 있으니 현지인이라면 어떻게 가는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 즈음에서 지금껏 물어물어가며 찾아가면 될 것이다. 직원이 트램 번호를 알려주며 내릴 위치를 말해줬다. 한글로 발음 그대로 받아쓴 뒤 티켓을 끊었다. 대충 알파벳 보면 알 수 있겠지??
코루나가 없어도 신용카드로 해결이 가능하니 참 좋은 세상이야 ㅡ 이런 생각을 뒤로하고 트램 타는 곳까지 열심히 걸었다.
뒤로는 큼직한 배낭을 둘러메고, 앞으론 카메라 가방과 작은 데이팩을 몸에 걸친 내가 가상했던지 지금껏 내 질문에 퉁명스럽게 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양인이라고 무시당한 경험을 겪는다고들 하던데. 역시 웃는 얼굴엔 침 못뱉나보다. 트램 타러 가는 길에서나 트램 안에서도 혹시 모를 일을 방지하기 위해 현지인들에게 질문했다. 다행히 받아쓰기가 잘 되었는지 내 이상한 발음에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주더라. 트램 종점 바로 직전이라 찾아가기도 쉽다고.
'종점'의 이미지는 보통 쓸쓸함과 막막함으로 묘사된다. 더 이상 노선이 뻗어갈 필요가 없는 지점, 그래서 큰 기대하기 힘든 곳.
대충 그런 느낌의 주택가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분위기에 걸맞지 않은 거대한 건물을 보고 갸우뚱했다. 내가 머물 숙소라는 것을 깨닫고는 어찌나 놀랬던지.
호스텔과 캠핑장을 전전해오던 그 때의 내겐 옛 제국의 웅장한 궁궐같은 느낌을 주었다.
구소련스럽다고 느낄 사람들도 많겠지만...
일행 중엔 나 말고도 먼저 유럽으로 떠나와 여행하던 동생이 한 명 있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이메일로 '프라하 역에 3시 넘어서 도착한다'는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했으니, 당연히 먼저 도착한 녀석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버선발로 뛰쳐나와 맞아줄거라 생각했다. 로비층을 여기저기 둘러봐도 보이지 않길래 일단 체크인. 우리에게 먼저 방을 내어주게끔 이미 연락이 되어있었다.
자연광과 어우러져, 격조있는 분위기를 연출한 실내 조명이 인상적이었다. 정작 객실 사진은 찍질 못했다.
호텔방에 들어가니 동원이 녀석은 컴퓨터 삼매경이었다. '3시에 도착하는 곳은 호텔'이라고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 시간넘게 기다리다가 올라왔다고, 나야 확인할 수 없으니 믿어줄 수 밖에. 사실 그런 것보단 반가운 마음이 더 컸다. 간만에 사용하는 한국말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나왔다. 때마침 신혼 여행으로 프라하에 와 있던 기성이 형과도 연락이 닿았다. 동원이랑 같이 기성이 형이 머물고 있는 숙소로 찾아가 삼겹살을 얻어먹었다. 서로 유럽을 돌아다닌 루트가 달랐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일행들이 돌아올 시간, 목이라도 축일 수 있게끔 음료수를 준비했다. 작은 가게라 큰 유로는 안받는다고,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근처 환전상에게 그나마 작은 단위인 파운드화를 이용해서 환전했다. 환전 비율이 참 슬펐다. 이제 버스타고 이동하며 식사는 다 예약이 되어있을텐데 어디에서 코루나를 써야할까.
기성이 형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왔다. 형이 머물던 숙소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일종의 민박 같은 곳이었는데, 신혼부부 전세내듯 머무르는 가격이 호텔 더블룸보다 저렴한 듯 싶었다. 넓은 공간은 말할 것도 없고.
아니다. 오늘부턴 내 마음 가짐과 여행 체계를 바꾸어야한다. 많은 수의 일행과 버스 주차 등을 생각하면, 오히려 호텔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자. 사람마다 다양한 입맛과 미리 준비하기 힘든 환경을 생각하면, 호텔 조식이 더 경제적인 방식이다.
이제 내가 해야할 일은 바뀐 여행 스타일에 적응하는 것. 내 자유로움을 잠시 묻어두고 단체 여행의 준칙을 지키는 것. 지금까지의 나그네 마인드에서 벗어나 엄숙한 순례자적 태도를 갖는 것.
과연 내가 그렇게 바뀔 수 있을까??
반가운 일행들. 장시간 비행과 시차 차이 때문에 상당히 피곤해보였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존재가 아니다. '경건하고 순종적인 순례자'는 나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 언제나 그러했듯이, 나는 나의 여행을 계속할 것이고 또 그런 이야기를 써나갈 것이다. 때로는 한없는 가벼움으로, 때로는 시니컬하게, 종종 별 쓰잘데기없는 생각들이 드러나기까지.
다만 2부는 1부와는 달리 여정을 꾸려나가는 과정엔 큰 비중이 없을 것이다. 교통 수단, 숙박 시설, 여행 루트, 식사 메뉴 등등 어느 것 하나도 내 의지와 계획이 들어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지에 대한 정보 조금과 감상들이 중심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에 1부에 비해 더 사색적인 글이 되지 않을까...싶긴 한데 그것도 써봐야 아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