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자전거로 관통하던, 그 다섯째 날.
눈을 찌르는 태양 빛에 눈을 뜹니다.
어제 늦게 자서 그런지, 오늘은 해가 높이 뜨고 난 뒤에야 일어났군요.
조명없는 원폭돔입니다.
어제는 피곤해서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기분이 묘합니다.
저 건물에 설마 아직까지 방사능이 남아있진 않겠죠.
이미 노숙계의 선배님들은 다 자리를 뜨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씻고 출발하기로 합니다.
다행히 더운 날씨에서도 벤또는 멀쩡하군요.
그나저나 조금 시끄럽습니다.
악기소리도 들려오고요.
무슨 대회가 있나보죠?
원폭의 아이들이라...방송 카메라까지 있는 걸 보면 꽤나 유명한 행사같은데
적당히 사람구경하고 있는데 조금 민망하더군요.
왠지 흘끔흘끔 거리는 시선이 느껴집니다.
철판깔고 더 구경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들릴데가 있어요.
평화공원 구석에 있는 바로 이것.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역사이죠.
이 위령비가 세워지기까지는 곡절이 있습니다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일본 정부에게 더 화딱지가 나는군요.
뭐가 '평화공원'인가요.
자신들이 받은 피해는 그리 잘 알면서
어째서 자신들이 주었던 피해에 대해서는 모르는척할까요.
그리고, 우리의 대통령 각하께서는 누구 맘대로 용서하신 걸까요.
이 2만의 희생자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해봅니다.
자전거를 끌고 나오는데 개가 귀여웠던지 친구가 찝적댑니다.
그리고 나름 개 주인분하고 이야기를 하려는데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군요. 그러게 일본어 공부좀 하고 오라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봅니다.
서울에도 몇번 와보셨다고 하는군요.
일본인과 본격적으로 이야기 해본 건 이게 처음인데
이상하게 듣는 건 이해가 가는데 말을 하기는 참 힘들었습니다.
단어를 어떻게 읽어야할지 감이 안잡히더군요.
일본인들은 개를 참 많이 기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삽을 들고다니죠.
문득 '개똥녀'사건이 생각납니다.
히로시마의 자랑, 노면전차입니다.
참 괜찮은 아이디어 같아요.
전차의 특성상 매연도 없겠고
교통체증도 없을 것이니 말이죠.
히로시마 성을 잠시 들러봅니다.
일본 성을 보는 건 처음이라 흥분했는데
뭐, 히로시마 성은 볼게 없네요.
그래도 공원화되어서 시민들에게 쉴 공간을 제공해 주는 건 좋아보이네요.
한창 등교시간이라서 그런지 중고생들이 많이 보입니다.
참 치마가 짧군요.
국내 도입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아니 제 학창 시절에 그랬다면 학업에 큰 방해가 되었겠네요.
시내를 벗어납니다.
사진은 굉장히 시원해보입니다만,
실제론 엄청 더워요.
아스팔트의 열기가 상당합니다.
수면이 부족해서 그런지 유난히다리에 힘도 없어요.
근처 마트에서 98엔짜리 바나나 한 통을 사먹지만
곧바로 '에너지'가 될 순 없겠죠.
업힐을 하다가 지쳐, 이렇게 그늘을 찾아 수면을 취합니다.
정말 꿀맛같은 휴식이었죠.
산은 깊고 길은 험합니다.
그래서 친구와 간격은 점점 멀어지고,
한창 달리고 있다가 생각해보니
이런...왜 안따라오는 것일까요.
근처 패밀리마트에서 지도를 보여주며 물어봅니다.
아차차, 제가 길을 잘못 들어섰군요.
일단 뒤돌아가봅니다.
한참을 달려도 친구는 보이지 않는군요.
답답합니다.
미리 약속해둘걸 그랬어요.
겨우겨우 친구랑 만나서, 서로 규칙을 정합니다.
길 모르면 갈림길에서 멈춰서기,
앞에서 달리고 있는 사람은 뒤로 돌아가기 등...
하지만 얼마 뒤에 또 갈라지면서
깨닫게 되었죠.
자신이 앞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 알기도 힘들다고...
그래서 폰을 로밍해가지 않는 이상,
그냥 페이스 조절해가면서 붙어 다니는게 제일 나은 것 같습니다.
이날은 마트를 참 많이 들렀습니다만
이 마트를 촬영한 것은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1개 5엔입니다.
50원이에요.
이것 외에도 많은 제품들이 정말이지 '놀라운 가격'에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왠지 수상하고 의심이 가지만
박스채로 포장되어있고 점원들도 많지 않고 인테리어가 허접한 걸 봐서는
정말 가격할인에 모든 중점을 둔 가게같았습니다.
품질은 이상없더군요.
빨간 기와가 멋있는 집입니다.
꽤나 부잣집인가 보죠?
다운힐 도중에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었다가
다시 넣지 못하고 카메라를 계속 손에 들고 달렸습니다.
아, 식겁했어요. 정말이지
왼손에 든 카메라때문에 왼쪽 브레이크를 못잡으니까요.
앞으로 다운힐 중에는 사진찍지 않기로합니다.
도중에 코카콜라 공장이 보여서 들어가봅니다.
콜라 공장인데 자판기가 있군요.
가격이 획기적입니다.
역시 콜라공장은 다르군요.
해가 지고 있습니다.
더위는 조금 가시고, 이제야 달릴 맛이 납니다.
전깃줄만 아니었으면 좀 멋진 컨셉사진이 되었을텐데 말이죠.
신나게 달리고 달려 미하라라는 도시에 이릅니다.
흠, 좀 신기한 동네에요.
도시는 쪼그만데 대형 마트가 3개나 되는군요.
일단 잠자리부터 찾고 난 뒤에 쇼핑을 하려고
근처 공원을 가다가 한 개를 만납니다.
무려 달마시안입니다.
생전 처음보는 개에요.
그리고 저보다 좋은 걸 먹고 다닐 것만 같네요.
다른 개도 꽤나 혈통있어 보입니다.
몸이 다리보다 길어 뒤뚱거리는게, 꽤나 귀엽군요.
그리고 이 동네 마트에서는 쾌적하게도 이런 공간이 있으면서,
이렇게 무료 차 서비스까지 제공됩니다. 시원하고 구수했어요.
부자동네인가봅니다.
이래도 남는다 이거죠.
물주는 마트도 보기 힘든데, 차 서비스도 되고
물건 포장할 공간도 좁은 마트가 있는데 이렇게 먹을 공간도 있으니
저같은 여행자로서는 그저 아리가또를 연발합니다.
이 행복한 고민의 시간, 여러분은 알고 계신지요.
고르고 골라서 맛있게 밥을 먹습니다.
솔직히 소바는 별로였지만, 스시는 정말 맛있네요.
그리고 운동장이 있는 공원에서 자려고 하는데
아, 젊은이들이 시끄럽습니다.
오토바이타고 달리면서 돌아다녀요.
저것들은 잠도 없나 싶습니다.
신경쓰여 샤워도 하기 힘들군요.
째려보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합니다.
마을 한가운데 놀이터같은 곳에서 침낭을 덮고 잡니다.
그래서 한참을 자고 있는 것 같은데,
갑자기 누군가 툭툭 치는군요.
벌떡 일어나보니, 순경 두명이 앞에 있는 겁니다.
외국인인걸 눈치챘는지, 여권을 달라고합니다.
그래서 허겁지겁 여권을 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국에서 자전거 여행을 왔다,
학생이라 돈이 얼마 없다,
도쿄까지 간다 등등...
아 이건 또 무슨 낭패일까요.
누가 신고라도 한 것일까요.
다행히 아무 문제 없는지 여행 수고하라는 말만 남기고
순경 두 명은 떠나갑니다.
아...잠 다 깨워놓고 뻔뻔하네요.
하지만 힘없는 외국인은 참아야합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까 봐두었던 공원에 가서 잠을 청하기로 합니다.
일본은 노숙자의 천국이라고 들어왔고
실제로 노숙을 해가면서 느꼈는데 말이죠.
그런 이들을 이 부자 동네에선 보기 힘든가 봅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이번 여행의 최대 위기를 넘겼다는 생각에
감사하면서 잠에 듭니다.
Distance - 81.92km
Average Speed - 14.6km/h
Riding Time - 5:34:37
Max Speed - 46.5km/h
미하라 이름모를 운동장있는 공원
노숙지수 : 4
장점 : 깨끗한 장애인 화장실, 조용함, 식수대, 모기 없고.
단점 : 밤에 시끄러운 몇몇 아해들.
메모 : 참고 기다리자. 다른 곳은 잘 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