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부 종교 개혁의 흔적을 따라
신앙, 전쟁, 그리고 삶과 죽음.
따끈한 욕조에서의 목욕, 푹신한 침대에서의 숙면, 풍성한 뷔페에서의 폭식.
처음 경험해보는 호화로움이 행복으로 다가왔던 날이었다.
그동안 휴가 내고 서울 시내 호텔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이런 감격도 며칠 지나니 시큰둥하게 다가오긴 했다. 오히려 여행이 진행될수록 점점 간소 해지는 조식을 볼 때마다 애석한 마음이 더 깊어졌는데, 한쪽의 식빵에도 만족해하던 런던에서의 나의 모습과 비교해보니 참 사람이란 얼마나 역설적인 존재인지.
묵직한 배낭은 버스 짐칸에 던져 넣어두고 자리를 잡았다. 내가 선호하는 버스에서의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는 여행 내내 나만의 고정석으로 만들기 위해서 첫날부터 진득하니 앉아있을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 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던 듯, 버스 뒷자리 부근은 일종의 사랑방처럼 변해 수다와 게임 등으로 기나긴 이동 시간을 때우기도 했었다. 가이드의 안내를 자장가 삼아 꾸벅꾸벅 조는 시간도 많았지만...
타보르까지 두 시간 정도, 달변 가이드의 체코 역사 교실에 귀기울이다 보니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느낌이었다. 일행들의 첫 여행지. 다들 들뜬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아담하고 조용한 도시 타보르. 처음 맛보는 유럽다운 풍경에 연신 셔터를 누르는 일행들을 여유 있게 보는 나.
2015년은 얀 후스 사망 600주년이기 때문에, 타보르에서도 특별 전시가 있는 듯했다.
지슈카 광장 옆 후스 박물관에서는 후스 전쟁의 흔적들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후스 박물관엔 지하 터널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는데, 험난한 시절들을 보내며 점점 확장된 끝에 타보르 시내 전체 터널 길이는 무려 12~14km에 이른다고 한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해서 겨우 곡괭이 하나 찍었다.
지슈카 광장에서의 단체 사진. 뒤편에 보이는 동상은 후스파의 리더, 외눈의 장군 얀 지슈카의 동상이다. 불패의 전설로 유명한 체코의 명장.
약간의 자유 시간이 주어져 타보르의 골목골목을 둘러본다. 할아버지의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숭고하면서도 아름다운 일인가.
뿌려진 피가 많다고 해서 평가 절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대개 그런 시대를 암흑 시대니, 야만의 시대니 이렇게 부르며 인권 따위 찾아볼 수 없는 시절로 생각하지만
오히려 인생 존재의 근거를 고귀한 가치에 둘 수 있는 세계만이 가질 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나 싶었다.
얀 후스의 가르침을 따라, 얀 지슈카의 지휘를 따라 싸웠던 타보르의 사람들.
전 세계가 그들의 적이었고 그들의 미래 또한 그리 밝은 것은 아니었다.
절망적 패배와 이단의 낙인으로 끝나버린 그들의 최후.
그러나 그들이 바랐던 사회의 도래를, 난 역사 속에서 볼 수 있었다.
이 여행기를 쓰기 며칠 전 한 유서를 읽었다.
우리의 삶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 땅은 지옥의 한 구석과 크게 다를 바 없고,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못한 이들의 좌절은 구석진 골목길마다 넘쳐나고 있었다.
상황은 개선될 것 같지 않았다. 수많은 눈물이 흘러도, 수많은 외침이 있어도 변화할 것 같지 않았다.
여행기를 쓰면서 곰곰이 생각해본다.
물질적인 조건들이 개선되면, 그리고 그 개선이 꾸준히 지속된다면 이 세상은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그렇기 되기를 소망한다. 허나 인권이 신장되고 복지가 향상되어 모든 이들이 배부른 사회가 있다 한들, 그 사회의 풍족함은 다른 사회의 굶주림으로 조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없애기가 힘들다.
설사 그런 모든 물질적인 부족함이 해결되는 세계가 도래한다 할지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또 다른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어 사람들은 언제나 괴로워할 것만 같다.
흔들리지 않는 진리와 가치를 붙잡았던 타보르의 사람들.
그 흔적을 따라 걸어가고 싶다.
프라하에 도착했다.
블타바 강변에서 내려, 구시가지를 걸으며 베들레헴 교회로 향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프라하의 낭만을 가득가득 느낄 수 있는 일정이었는데,
한 일주일 전부터 전 유럽에 몰아치는 이상 고온의 열풍으로 인해
구시가지를 걷는 시간은 그야말로 사우나를 걸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달구어진 돌길, 작렬하는 태양, 좁은 도로에 만연한 매연.
사진으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것들이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베들레헴 교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숨 돌릴 정도.
땡볕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 파업하는 택시 기사들, 데이비드 체르니의 매달린 사람
베들레헴 교회의 내부. 후스의 종교 개혁과 후스 사후 종교 전쟁의 양상을 그린 그림들이 있었다.
교회는 매우 널찍하고 시원했다.
베들레헴 교회는 얀 후스가 1402년부터 10년 정도 시무한 곳으로, 라틴어가 아닌 체코어로 예배를 드렸다.
성상을 제거하고 성경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한 설교를 했다고 한다.
유럽 여행을 할 때 보통의 개신교 교회는 내부가 상당히 심심한지라 관광지로는 별다른 매력이 없는데, (화려한 고딕 성당들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이 베들레헴 교회는 내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친 몸과 맘을 쉬게 해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저 교회 벽에 그려진 그림들이 그때 당시의 그림들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저 그림들에서 전해지는 메시지가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내 마음을 강하게 찌른 건 어린아이가 창에 꿰여 있는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이었다.
물론 이 그림에서야 카톨릭 군사들의 창 끝이 날카롭지만, 타보르 파의 칼날이라고 해서 부드럽진 않았을 것이다. 반대편에선 또 다른 그림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이 떠오른다.
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죽어야만 되는지...
신념을 지키는 것과 학살을 저지르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의 일이고
그런 것이 무고한 이들에게 끼치는 피해를 정당화하지 않음이 분명한데도, 광신에 매몰된 이들은 깨닫지 못한다.
그 비극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외치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탄압과
저항하는 마음에 분노가 더해져 과도한 폭력으로 치닫는 비극의 악순환.
베들레헴 교회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옳은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더 큰 죄를 낳지 않길 바라면서
나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기도했다.
다른 이들의 부족함만 바라보며 잔소리하는 꼰대가 되지 않길 바라면서
어느샌가 굳어가는 선량한 마음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다.
이 글에서 내가
칭송한 것은 후스 파의 용기.
비난한 건 그들의 강경함.
칼로 무 자르듯 그렇게 구별할 수만 있다면 삶이란 것은 어려움이라곤 하나도 없을 텐데.
여행객으로 찾아온 내겐 유무죄를 가릴 권리 따위 없다.
그래서 어렵다. '올바른 역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나은 선택지는 과연 없었는가' 하고 비난할 순 있겠지만
정작 사소한 일상조차 실수와 실패로 점철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개혁자들의 우뚝 선 동상에서 느껴지는 권위와 영광보다는
그들의 약함과 실패, 극복하지 못한 문제들에서 더 큰 도전을 느낀다.
여행지에서의 감상보다 여행기를 쓰면서 더 생각할 점이 많다는 것은
글 쓰는 이들만의 행복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