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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비 Oct 29. 2017

경주

autumn, 2017.


train (Daegu -> Gyeongju) . autumn 2017.


느닷없이 능들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경주에 갔다. 


동그랗고 부드러운 능선을 가진 능들.

오랜 세월 같은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능들. 


내가 살고 있는 제주의 오름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능들이 궁금했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찾았던 경주와 

20대 초반에 찾았던 경주는 완전 다른 곳이었다. 

경주의 곳곳에 작고 크게 자리 잡고 있는 능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로 여러 해가 지나고, 이번 가을. 

느닷없이 그 능들이 그리워졌다. 


제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대구로 날아갔다. 

ktx를 타면 금방이지만, 왠지 조금 더 느린 기차를 타고 싶었다. 

동대구역에서 경주역으로 향하는 무궁화호 기차에 올랐다. 




대릉원, 경주, autumn 2017.


경주역에 도착하자마자 무작정 능을 찾아 걸었다. 

사실, 경주에서 '능을 찾아' 다닌다는 것은 참 웃기기도 하다. 

구태여 '찾아' 다니지 않아도 걷다 보면 자연스레 커다란 능들이 사방으로 나타난다. 


이제 막 가을이 찾아온 경주는 

낮에는 살짝 덥다가, 해가 지면 꽤 쌀쌀해지는 날씨였다. 

나무들은 이제 막 물들 채비를 마치고 서서히 아주 천천히 물들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평일 낮에 찾은 대릉원은 매우 한산했다. 

마침 천마총 내부가 수리 중이라 대릉원 전체가 무료입장이었다. 

'아! 잘 됐다.' 속으로 좋아했다. 경주에 머무는 내내 대릉원에 몇 번이고 찾아올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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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과 버드나무, 경주, autumn 2017.



능과 감나무, 경주, autumn 2017. 



제주에서 지내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지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오히려 산이나 숲, 오름이었다. 


그중에 특히 오름이 좋은 것은 

멀리서 바라봤을 때 그 둥글고 부드러운 능선이 좋기 때문이다. 

오름마다 느낌이 모두 다르지만, 대개는 포근히 안아주는 엄마의 느낌이면서 동시에 늠름한 남성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경주의 커다란 능들의 모습은 오름의 그것과도 많이 닮아있었다. 


능의 동그랗고 부드러운 능선은 제주 동쪽의 '용눈이 오름'의 능선과도 많이 닮아있다. 

용눈이 오름은 여성이 옆으로 돌아누운 실루엣과 모습이 닮았는데- 

그 능선을 닮은 여러 능들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우리 엄마, 할머니의 젖무덤이 떠오르는 것이다. 





능과 단풍, 경주, autumn 2017.



대릉원, 경주, autumn 2017.











한참을 능 주변을 걷다가

가까운 다원을 찾아 들어갔다. 영화 '경주' 속 찻집의 모티브가 된 곳이다. 

현대식 높은 빌딩 사이에 비밀의 공간처럼 자리하고 있는 작고 아름다운 찻집. 능포 다원.


중년의 여주인이 찻집을 지키고 있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마셨던 '황차'를 주문하여 마셔보았다. 

우리 녹차를 발효시켜 만든 것이 '황차'라고 하는데, 

차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향이 좋았고, 맛 또한 깊었던 것 같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서늘해지는 기온 탓인지 조금은 긴장되어있던 몸이

뜨끈한 차를 마시자 스르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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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의 남편이 화가인데, 다원의 입구 쪽에는 남편이 직접 그린 여주인의 초상화가 커다랗게 걸려있었다. 

여주인이 직접 내어 주었던 직접 만든 빵이며, 직접 말린 대추도 참 좋았지만,

찻집을 나선 뒤에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남편이 그린 여주인의 초상화이다. 

 



능포다원, 경주, autumn 2017.





다원을 나서니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능의 뒤쪽으로 손톱 모양의 달이 걸려있었다. 

낮에 본 능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해가 넘어가고, 달이 떠오르니.. 이제야 진정한 능의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지 모를 사람들이 커다란 능 속에 잠들어있고, 그들의 생이 함께 묻혀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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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 뒤에 걸린 손톱 달, 경주, autumn 2017.










초가집과 고양이, 경주, autumn 2017.




서서히 물들어갈 채비를 마친 가을 나무들을 만났다. 


옥산서원, 경주, autumn 2017.



독락당, 경주, autumn 2017. 



능과 구절초, 경주, autum 2017.



deeep guesthouse, 경주, autumn 2017.



경주, autumn 2017.



계절마다 찾아올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단풍 든 나무와 능, 눈 쌓인 능, 벚나무와 능, 여름의 짙푸른 능을 모두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경주는 

눈 떠 있는 동시에 잠들어 있고,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 있고, 

요란한 동시에 침묵하고,

화려한 동시에 쓸쓸하다. 








활주로, autumn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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