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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령 Oct 10. 2021

2번째 이직을 앞둔 소회들

7년차에 진입하면서

친했던 동료들과 이별을 앞두고 여러 얘기들을 나눴다. 트위터에 썼던 내용들을 종합해 정리해 둔다.


어떤 경력직도 있는 그대로의 실력을 인정받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몸담은 회사와 조직, 한 일들에 의해 실력이 간접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력서 테크니컬하게 잘 쓰기, 포트폴리오 이쁘게 잘 만들기, 깃헙 잘 관리하기.. 그런 것들은 그 종류가 뭐건 유리하게 작용하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다. 그나마 나은 게 개인적으로 ‘돈 받고’ 딜리버리한 것이지만 경력직 중 이런 거 있긴 있는 사람도 흔하지 않다. 그래서 경력직에게도 자기가 노는 판이 무어냐 라는 게 엄청나게 중요하다.

경력직이 엑시트 플랜을 짜야 하는 시점은 경력이 쌓이지 않는 것이 6개월을 넘어 1년 진행된 상황부터라고 본다. 6개월까진 순간적인 부침이지만 1년부터는 부침이라기보다는 회사의 근본적인 한계에 가깝다. 여기서부터 어떤 식으로든 준비를 안하면 2년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커리어 2년 망치고 수습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더라. 2번쨰 이직 과정에서 내 유일한 리스크가 2번째 회사에서 망쳐진 경력이었다. 거의 2년 연속으로 1년의 9개월을 SI 용역 제안서 보고서 사업관리로 구르고 나니 남은 것이 없었다.


기술부채는 흔히 엔지니어링적 문제로 다뤄지지만, 실제로 기술부채가 큰 회사는 안정성을 희생하고 순간적이고 불명확한 목표를 단시간 내에 달성하고자 하는 문화가 뚜렷하다. 기술부채는 그 결과이며, 기술부채가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는 건 실제로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크고 심각한 문제-단기적 성과주의, 근본이 없는 접근, 고객을 끌어들이기보다 고객에게 달려드는 식의 접근 등이 있는데 기술부채로 그것이 표현되는 것뿐이다.


‘함께 성장’ ‘같이 고민’ 같은 말들을 조심해야 한다. 회사의 대전략을 효과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미시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실험을 해야 정상이지 실험적인 전략을 가져가는 회사는 비정상이다. 그래서 허접한 회사일수록 Lesson-Learned을 내세우고 뛰어난 회사일수록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면서 정말 필요하지만 알 수 없는 부분을 실험으로 습득한다. 실험도 컴팩트한 단위로 운영하여 실험 자체가 뭔가를 잡아먹는 상황을 최소화한다. 기술기업의 기술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술은 항상 대전략 상에서 유의미한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하고, 단기적이건 중장기적이건 명확한 로드맵 상에서 목적성을 갖고 성숙시켜야 한다. 목적이 없는 R&D는 성과 이전에 기업 내부에서 R&D 인원을 소외시키고 좋아도 시간 낭비, 실제로는 회사 파열음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그 결과 개인이나 팀 단위의 기술력을 확보한 경력직들이 회사에서 이탈하고 회사의 기술수준 자체가 떨어진다.


인재를 입도선매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나쁜 건 아니다. 좋은 사람 있는 게 솔직히 좋은 전략 다음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그 정도 인재는 흔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인재는 입도선매가 아니라 읍소에 가까운 방식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다. 인력채용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으로 하고 효율화에 힘을 기울여야지, 채용만 많이 하고 효율화가 안되는 패턴으로 가면 100% 망하게 되어 있다. 채용 그 자체가 회사의 조직력을 필연적으로 낮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런 방만함은 채용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인프라 관리, 프로젝트 운영 등 많은 부분에 보통 다 적용된다. 그런데 진짜 실력이 있고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있는 사람들은 방만하게 운영하는 회사에 오래 다니지 않는다. 사이즈가 안 나오기 때문이다. 반대로 합리적인 이유로 타이트하게 운영을 하면 이런 사람들이 앞장서서 총대 매고 가는 것이다. 인력운용, 프로젝트 운용, 장비관리.. 모든 것이 그렇다.


매트릭스 조직이 자주 운영되지만, 크로스 펑셔널한 조직구조가 중요한 게 아니라 크로스 펑셔널한 사람을 유효적절하게 쓰는 마이크로한 운영이 더 중요하다. 이런 사람들이 실력이 애매하면 제품도 직능도 어정쩡하게 건드리는 말참견꾼이 되지만, 실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면 존재 자체가 매트릭스가 되어서 쉽게 조직화하기 어려운 문제를 조직화해 돌파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해보기 전에 이미 가능한 최적의 대안이 무엇인지 대부분 알아채고, 애매한 문제는 최대한 안전하면서 효과적인 방식으로 실험해 결론을 내고, 되는 것에 대해서는 파워풀한 실행을 한다는 것은 기업문화 이전에 업무문화다. 이 메커니즘을 조직력이라고 하는 것이고 이 메커니즘이 표현되는 구조를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완성하는 거고 크로스 펑셔널한 인물을 어떻게 확보하여 이 사람이 방점을 어떻게 찍어주느냐가 매우 크게 작용한다.


투자금 10억이니 하면 커 보이지만 냉정하게 계산해 보라. 아무리 낮게 잡아도 1명 1년 풀타임으로 쓰면 회사는 5천 가까이 돈을 쓰게 되고, Lead급 사람 쓰면 5천이 아니라 1억, 심하면 2억에 근접하게 된다. 여기에 투자금으로 뭐 사옥을 바꾸니 클라우드를 어쩌니 하면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판이니 돈에 미쳐버리는 건 C-Level에선 다 똑같을 수밖에 없고 그게 문제인 게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돈을 버느냐에 대한, 즉 어떤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제공해서 얼마나 돈을 버느냐에 대한 시각이 얼마나 정교하냐는 점이다. 여기서 답이 안 나오면 회사는 안 망해도 인볼브된 개인은 망하게 되어 있다. 이 과정을 내가 가늠하는 잣대 중 하나가 인당 매출이다. 투자금 수십억 쌓아놓고 하는 게 아니고서야 1인당 1억원 미만의 매출이라면 얘기해 봐야 소용이 없다. 부가가치가 이만큼도 안 만들어진다면 결국 이걸 만들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무리수이니 결과가 안 나오고, 인원을 줄여서(또는 연쇄적으로 핵심 인원이 이탈하면서) 일시적으로 인당 매출이 개선되지만, 최종적으로는 서비스 수준이 떨어지고 매출의 근간이 떨어지게 된다.


프로는 ‘시키면 어떻게든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든 안 하든 아마추어와는 다른 수준으로 사안을 바라보고 다른 수준의 결론을 내는 사람이다. 결과로 말한다는 건 그런 의미다. 프로가 태도 문제면 지친 시니어보다 열정에 기름붓는 소리 하는 인턴이 더 프로다울 것이다. 어떻게든 하는 게 일이라는 소리를 매니저가 달고 다니면 사이즈가 안 나오는 회사다.


어떤 사람의 과거를 높게 본다는 건 성공하는 판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회사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에 적절한 경험과 인사이트를 그 사람이 그 과거를 통해 갖게 되었음을 보는 것이어야 한다. 그게 시니어(미들급) 이상이 가진 진짜 힘이다. 그리고 시니어가 하소연하는 걸 넘어 생존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시점이면 이미 적당한 수준으로 문제를 관리하는 것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얼럿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는 방향으로 넘어갈 뿐이다. 이 단계 되면 다시 궤도 올리는 데 몇 년단위로 들어간다.


회사가 최종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비전은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 막말로 10년 걸릴 수 있고 20년 걸릴 수 있다. 그런데 구체적인 목표(매출 말고)는 오랜 주기를 잡으면 안 된다. 실무자급 중 손에 꼽히는 인재들은 ‘앞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없이 회사 생활을 오래 하지 못하고, 발이 묶였거나 갈 곳이 없는 사람들만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오래 같은 회사를 다닐 수가 있다. 물론 일시적으로 의리나 애정을 이용한 매니징으로 상황을 유지할 수는 있다. 그런데 구성원들의 애정과 의리는 계좌의 잔고같은 것이다. 잔고를 쌓아야 진짜 어렵고 희생이 따르는 문제가 왔을 때 그 잔고를 써서 해결을 하는 거다. 잔고를 쌓지도 않으면서 잔고가 텅 비었는데 왜 의리가 없냐고 얘기하면 이미 대책이 없는 상황이고 발 빼는 게 모두한테 좋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엄청난 고민과 수준높은 기술이 융합되었지만 쓰기에는 단순한 세련된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전략적 접근이고, 이 결과가 제품이나 서비스여야 한다. 여기서 많이 벗어날수록 회사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술 더 떠서 자사의 제품이나 서비스가 없다는 건 조직의 무임승차 문제가 곧 기업 HR의 치명상으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여기서 무조건 셋 중 하나는 선택이 되어야 한다. 단시간 내에 서비스를 만들기로(못 만들면 이제 끝낸다) 하거나, 아니면 장기적으로 돈을 벌면서 할 수 있도록 쓸데없는 인력을 모두 쳐서 여력을 항상 남기거나, 아니면 애초에 인력의 사기와는 상관이 없는 방식(aka 에이전시 방식)으로 가거나.


기술력만 낮은 회사는 없고 기획력만 낮은 회사도 없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총체적으로 보이는 딱 한 가지가 바로 회사의 실력이다. 회사의 실력은 명쾌하고 실현 가능한 전략과 빈틈이 없는 기획, 탁월하고 확장성 있는 기술력, 인원 온보딩부터 업무운영까지 Loss가 최소화되는 운영 컨시어지, 강점을 극대화하고 약점을 최소화하는 IR까지 모든 면이 다 종합된다. 첫번째 회사가 아닌 회사에 다니고 있는 경력직은 첫번째 회사에서의 성과를 이용해 본인의 실력과 회사의 실력을 일시적으로 남들에게 분리해서 보여줄 수 있는 제한적인 시간을 갖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이 시간이 소멸되는 것이 바로 ‘경력을 망치는’ 상황이다. 답이 안 나오는 걸 머리로 알면서 마음으로 다니면 결국 미래에는 그 회사의 답없는 실력을 구성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본인이 되어 버린다.


3년차 이상, 대리급 이상의 경력직이란 결국 본격적으로 사수의 그늘에서 벗어나 본인의 커리어를 본인이 만들어 간다는 의미다. 순간을 어떻게 보내고 어떤 선택을 해왔느냐를 통해 본인이 영광을 누릴 수도 있고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 나의 경우 3번째 회사로의 이직은 망친 2번째 회사의 경력을 무시할 수 있는 운이 좋은 환경(1번째 회사의 사수를 통해 영입된 케이스)이었지만, 그 과정에서도 타격이 있었다. 결국 모든 것에는 변수가 있지만 변수를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낮추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3년차 이상 경력직들의 초점이다. 특히 회사 차원에서 한창 일을 할 연차인 3~10년차를 붙잡아서 길게 끌고 가려면 이 니즈를 잘 충족시켜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조직 구성이 박살나고 회사의 성장 모멘텀이 떨어지게 된다. 개인 단위에서도 이 니즈를 제때 해결하지 못하면 남는 건 커리어 내내 지게 될 상처뿐이다. 팔자나 운빨이라는 소리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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