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호 Mar 05. 2024

'됐고'

- 경청 불능의 표지


이런 경험 있을 겁니다. 상대방에게 한참 무언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한마디 합니다.  


    됐고, 그래서 결론이 뭐야?  


김이 훅 빠집니다.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해지지요. 분명히 물어봐서 대답하는 것인데 약간의 설명으로 감을 좀 잡았다 싶으면 곧바로 ‘됐고’가 나옵니다. 이제 알아들었으니 그만 설명해라, 더 설명하면 자존심 상한다, 뭐 그런 뜻이지요. 계속 설명을 듣고 있으면 자신이 바보가 된 느낌인가 봅니다. 그럴 바에는 뭐 하러 물어보는지 모르겠습니다. 직장에서는 주로 상사들이, 가정에서는 아버지들이 이러는 경우가 많지요. 


회의를 할 때도 종종 ‘됐고’가 출현합니다. 회의를 주관하는 사람이 듣기 싫은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그런 이야기가 의제로 올라오면 곧바로 ‘됐고’가 나옵니다.

  

    됐고. 다음 이야기 합시다.  


이때 ‘됐고’는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이상한 이야기 할 거라면 입 다물어라, 그런 뜻입니다. 타인에 대한 존중이 없고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는 독선으로 가득할 때 나오는 표현입니다. 논쟁을 허락하지 않는 ‘무시’이기 때문에 최악의 반응입니다. 좋은 리더십은 아니지요.


장황한 설명을 듣고 있는 것은 누구나 힘듭니다. 그래서 회사 생활에서 제일 강조되는 것이 ‘용건만 간단히’인 것, 저도 잘 압니다. 상대가 정말 듣기 힘든 장황한 설명을 하면 저 역시 ‘미안하지만 조금 간략하게 핵심만 말씀해 주세요.’라고 부탁을 합니다. 하지만 같은 말도 표현하기 나름입니다. ‘됐고’는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이지요. 상대방에게 면박을 주는 공격적인 표현입니다. “shut up!”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의 거의 모든 대화에서 과정에 대한 설명은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결과가 임팩트 있을 때 물어오는 게 과정이니까요. 하지만 사실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결과를 만들어낸 방법이 들어있잖아요. 하지만 대부분은 결과를 먼저 묻습니다. 결과를 알려주기 위해 과정을 설명하려 하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됐고"입니다. 부록으로 따라 나오는 말이 “그래서 결론이 뭔데?”이고요. 예전에는 상대방에게서 이 말을 들으면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왜 화를 내는지 모르더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미러링’으로 똑같이 “됐고”를 시전 하니까 정말 불같이 화를 내더군요. 그때 알았습니다. 내가 화가 나는 게 비정상이 아니구나. 누구나 “됐고”를 들으면 화를 내는구나, 알게 됐지요.


‘됐고’는 부작용이 큽니다. 저는 ‘됐고’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대화에서 과정 설명을 생략합니다. 하더라도 최대한 1-2 문장으로 말하려고 노력합니다. 잘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설명을 해도 좋을 게 없기 때문입니다. 또 ‘됐고’가 터져 나올 뿐입니다. 그냥 묻는 말에 답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러면 일의 능률이 계속 떨어집니다. 다음번에 또 설명해야 하니까요. ‘됐고’를 시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또 같은 것을 물어옵니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낭비되는 시간이, 재보지는 않았지만 상당합니다.  


‘됐고’의 부작용이 더욱 심각해지면 가급적 대화를 생략하게 됩니다. 대화가 아예 안 되기 때문입니다. ‘됐고’는 자신이 ‘경청 불능’ 임을 드러냅니다. 듣는 귀가 없는 사람과 대화해 본 경험이 있나요? 끔찍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증상은 심해지지요. 그나마 ‘됐고’라도 하면 다행입니다. 좀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나이 많은 사람들의 모임에서는 열 사람이 모이면 열 사람이 모두 자기 말을 합니다. 남이 듣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놀라운 건 다른 사람의 말을 5초 이상 못 듣는 사람들이 늘 젊은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욕 합니다. 예의가 없고 대화를 하려 하지 않는다고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요. 저는 속으로 끄덕거립니다. 나라도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요. 대화가 안 된다면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나는 달라’라고 생각한다면 주의가 필요합니다. 자신이 나눈 대화를 한번 녹음해 보세요. 특히 나이가 어린 사람이나 젊은 직원들과의 대화를 녹음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스스로가 대화 중에 다른 사람의 말을 자르고 들어가는지요. 우리 중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의식적으로, 자각적으로, 경청을 연습해야 합니다. 성질 괄괄한 사람이야 대화 중에 ‘좀 들어보라’며 화를 내고 다그치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대화를 포기하거든요.(직장 상사에게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동료들에게는 수다꾼인 사람들을 꽤 겪었습니다.)

경청 훈련은 젊은 분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제가 꽤 많은 글에서 언급했듯, 젊음은 금방 지나갑니다. 어어, 하는 사이에 나이를 먹고 그보다 젊은 친구들이 아마 그 앞에서 입을 다물 것입니다. 그때 ‘됐고’를 연발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경청 불능의 표지인 ‘됐고’는 이제 정말 됐습니다. 

소통 불능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언어 사전에서 ‘됐고’는 지워야 할 것 같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와비사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