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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호 Apr 10. 2024

잘못 탄 기차, 반달, 병아리

- 쓸모에 관하여(2)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으며 저는 제 나이 서른에 ‘나를 떠나간 것들’을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열정, 순수, 이런 것들이 내게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었지요. 인생이 ‘낭만’의 영역을 지나 ‘현실’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 경멸했던 ‘돈, 큰 집, 좋은 차’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 영역으로 말이지요.


재밌는 건 그로부터 10년 후, 비슷한 ‘우울(?)’을 마흔의 초입에 겪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로부터 또 10년 후 50이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몇몇 행운아들을 제외하고는 우리 모두 비슷하지 않을까요. 어느 나이가 되더라도 인생에서 무언가 확고한 어떤 것을 찾지 못하고 허둥거리지요. 소설가 앤드류 포터는 그걸 이렇게 표현했더군요. 


‘(나는) 삶의 어느 시점에서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


끊임없이 자신의 ‘쓸모’를 이리저리 견주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 문구를 보니 또 이렇게도 생각이 됩니다. 


‘정녕 나는 잘못된 기차에 올라탄 것일까? 아니면 제대로 된 기차를 탔지만 아직 도착역에 이르지 못한 것일까’


가령, 소리꾼 장사익 씨 같은 삶도 있으니까요. 그의 말을 잠깐 옮깁니다. 


‘서둘러 핀 꽃은 서둘러 사라진다. 봄에 핀 꽃은 봄이 가면 시들고, 여름꽃이 지면 가을꽃이 핀다. 인생 사계절에 빗댄다면 나는 봄여름 다 지내면서도 꽃을 피우지 못했다. 마흔다섯 살에 노래를 하기 전까지는 좌절하고 방황하며 나의 꽃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열댓 번 직업을 바꾸면서도 내 안의 작은 씨앗 하나는 버리지 않았다. 노래를 부르며 살고 싶다는, 막연하지만 막을 수 없는 꿈이었다. 마치 모래알을 삼켜 끝내 진주를 품는 조개처럼, 쓰리고 아파도 목울대 아래 돌멩이 하나 삼킨 채 인생의 봄날인 청춘을 다 흘려보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런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내 몸에서 소리를 꺼낼 수 있게 해 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제대로 된 기차에 올라탄 것 같습니다. 단지 그의 도착역이 다른 이들보다 좀 멀었을 뿐이겠지요. 그의 목소리가 제게 잠깐이나마 힘을 줍니다. 어쩌면 내 도착역도 다른 이들보다 좀 먼 것은 아닐까. 그러자 정호승 시인의 ‘반달’이 떠오릅니다. 


‘아무도 반달을 사랑하지 않는다면/반달이 보름달이 될 수 있겠는가/보름달이 반달이 되지 않는다면/사람은 그 얼마나 오만할 것인가’


아직 보름달이 되지 못한 반달일까, 보름달에서 변한 반달일까, 스스로에 대해 또 생각해 봅니다. 어느 쪽이든 좋다고 생각합니다. 보름달에서 변한 반달이라면 오만을 버리고 겸허를 깨우친 것이니 좋고 보름달이 되지 못한 반달이라면 가능성이 있어 좋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정말 공포스러운 하나의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지금 방금 기차에 오른 것 같은데,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진 괴물이 기차에서 내리라고 강요하는 것 같습니다. 챗GPT를 필두로 한 인공지능 이야기입니다. 인공지능의 놀라운 성능을 보고 있노라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쓸모’를 증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1시간, 하루, 일주일 걸려서 해야 할 일을 이 무서운 인공지능은 불과 몇 초만에 해결합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배웠는데 난감합니다. 


16세에 스타트업을 창업하고 35세에 대만의 디지털 장관이 된 오드리 탕의 말이 위안을 줍니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물론 글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곤란하겠지요. 너무 특정한 영역에 자신을 가두지 말라는 말일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언제 그 영역에서의 쓸모에 사형선고를 내릴지 모르니까요. 특정한 쓸모가 아니라 보다 제네럴 한 역량을 갖추라는 의미이겠지요. 하지만 탕 역시도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어서 저렇게 말한 것은 아닐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존재의 이유’를 내세울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의 기준은 이제 또다시 ‘낭만’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직 산에 오르지도 않았는데 내려가라고 등을 떠밀리는 기분입니다. 아직 피지 못한 꽃인데 벌써 졌다고 탄식이 들려오는 형국입니다. 


병아리 감별사에게 쓸모없다고 분류된 병아리 같은 심정입니다.  


싱숭생숭한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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