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빗나간 발길질이 있어야...
저는 어지간해서는 헛발질을 잘 안 합니다. 돌다리도 두드려가며 건너는 스타일이라고 해야 할까요? 50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 덕에 크게 위험에 처한 적도 없었고, 눈물 젖은 빵을 먹을 만큼 쪼들린 적도 없었습니다. 비교적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마음 한쪽이 헛헛해요. 왜 그럴까…
대학원 시절, 지금은 고인이 되신, 매우 유명한 노교수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평생을 바쳐 연구해 온 국문학을 '문학 나부랭이'라고 불렀습니다. 얼핏 보면 괴팍한 교수님이었지요. 입도 약간 삐뚤어져 있었고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존경했습니다. 한평생을 치열하게 국문학을 연구하며 바쳤으니까요. 100권이 넘는 그분의 책과 함께 이십 대를 보냈지요.
그분의 대학원 강의는 발표 수업이었습니다. 대학원생이 소논문 형태의 리포트를 발표했지요. 그러면 그것에 대해 교수님이 평을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평은 아주 직설적이고 독했습니다. 발표자를 무참하게 만들곤 했지요. 강의가 끝나면 술 없이는 헤어지지 못했습니다. 동료들끼리 밤늦게까지 뒤풀이를 했습니다. 혹독한 비판을 받으면 울기도 했지요. 심각하게 대학원을 그만둘까, 고민도 했고요. 반대로 좋은 평을 들으면 우쭐해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문학계를 뒤흔드는 천재가 된 것 같았지요.
그 교수님의 강의 발표 시간 중 어느 때였을 것입니다. 동료 대학원생이 자신의 소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최신 서양 철학을 우리나라 근대문학에 적용한 논문이었습니다. 저는 혹독하고 날 선 비판이 있을 거라 짐작했습니다. 그 글은 이해하기 어렵고 난삽했거든요. 문장은 거칠었고요. 솔직히 말해 아이디어만 덩그러니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노교수님의 평가는 제 예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새로움을 시도하지 않는 이들의 글은 단정하고 날렵합니다. 하지만 가치가 없어요. 존재의 의미가 없지요. 문학 연구에는 어렵게 고뇌하고 애쓴 흔적이 남아야 합니다. 그런 글은 난해하고 서툴며 거칩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가치 있는 연구입니다. 새로움이라는 패기가 있어야 가치가 있지요. 그래서 이런 시도는 소중합니다."
대략 이런 맥락의 평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연구자가 아닙니다. 학계를 떠난 지도 오래고요. 대학원에서의 기억도 많이 희미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자주 생각납니다. 마치 저를 다그치는 것 같습니다. 왜 더 자주 헛발질을 하지 않았지? 왜 좀 더 중심을 향해 뛰어들지 않았던 거야? 더 큰 도전을 해보지 그랬어? 그렇게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후회? 아니요. 후회는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제 삶에 대해 저는 감사합니다. 다만 앞으로는 헛발질이 조금 많아질 것 같습니다. 중심으로 뛰어드는 일이 많아질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헛발질이 유용할 수 있겠더군요. 나이를 먹으니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생각보다 제게, 우리에게 아직 헛발질할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꽤, 많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