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지망생이 된다. 하지만 모두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한다. 때로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혹은 재능의 부족으로 꿈을 포기한다. 혹은 영원히 도달하지 못하는 꿈을 품은 채 지옥 같은 희망 고문 안에서 살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지망생이 꿈을 이룬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귀한 서사가 된다.
물론 정말 운이 좋아 꿈을 이룬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 꿈을 이룬 이야기에는 온갖 누추함과 굴욕, 시련 그리고 이를 모두 상쇄시키는 쾌거와 성취로 이뤄진 기승전결이 있다. 누추한 차림의 지망생들이 지지고 볶는 이야기가 영화의 단골 소재로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외계인, 공룡, 상어 등 영역을 넘나드는 생명체로 명작을 뽑아낸 스필버그도 이 단골 소재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잘 참았다가(?) 드디어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 ‘파벨만스’를 통해 풀어냈다.
스필버그는 각본을 직접 잘 쓰지 않는편인데, 이번에 직접 쓸 정도로 공을 많이 들였다. 과거의 기억을 영화에 풍부하게 담기 위해 이전까지 살았던 집을 다시 방문했으며, 유년 시절의 집을 세트장으로 복원시켰다.
이 영화를 광고 카피로 요약하면 ‘Boy meets movie’ 정도가 될 것이다. 영화의 매력에 빠져버린 소년 파벨만스가 영화감독이란 꿈을 꾸며 영화의 의미에 대해서 점차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뭐 흔해 빠진 꿈을 이뤄가는 멋쟁이들의 서사로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스필버그가 생각하는 영화에 대한 가치관이 읽힌다.
스필버그는 이야기를 통해 영화란 예술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엄마의 불륜을 영화를 편집하면서 알게 된 주인공처럼 영화는 때로 현실 속 발견하지 못한 진실을 다루고, 반대로 주인공을 괴롭히던 소년을 영웅으로 미화한 영화처럼 지나친 탐미와 왜곡이 어떤 진실을 가리기도 한다.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감독이라면 이러한 가치관들 사이에서 번민과 고민이 있을 것이고 스필버그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감독으로서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거쳤던 내적 갈등을 상반된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다. 결국 영화는 삶의 아름다움을 비추지만,삶은 영화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아가 이 영화는 꿈의 속성과 방향에 대해서도 말한다. 주인공은 꿈에서도 영화가 생각날 만큼 영화를 좋아했고, 주변인으로부터 찬사를 받을 만큼 잘 만들었다. 덕분에 거장 감독과 함께 일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이는 냉정하게 말하면 결국 좋아하고 잘해야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뜻한다.
하지만 주인공이 거장 감독의 조언 비슷한 꾸지람을 듣고 나오는 길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저 멀리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다른 울림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한다는 것. 꿈이 아득히 멀어서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지평선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는 말을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영화는 아름답지만 삶은 누추하고, 꿈은 멀고 현실은 잔인하다. 삶과 영화,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접속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꿈을 향해 문을 두드리고, 다시 한번 한 발자국이라도 나아가는 것. 영화 막바지에 등장해 지평선을 찾으라고 파벨만스에게 충고하던 존 포드 감독의 말은 사실 스필버그가 우리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우리만의 꿈을 향한 지평선을 찾아서 나아가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