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좋아하는 깔롱쟁이(?) 감독의 영화를 보고 왔다. 내게 좀 특별하거나, 혹은 내가 좀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별명을 붙여주곤 하는데, 깔롱쟁이 감독도 그중 하나다. 스필버그가 보이지 않는 눈앞의 적을 칼집으로 상대해 무림에 이름이 난 고수라면, 깔롱쟁이인 웨스 앤더슨은 서예에 능한 것은 물론이고 칼을 휘두르는 태가 아름다운 은둔의 고수라고 할까. 너무 유명해지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의 영화는 물론이고 한국에서 전시까지 열릴 정도로 인기가 높아져서 개인적으로 아쉽다.
그의 신작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액자식 구조를 취해서 구성은 복잡하지만 서사는 단순하다. 어떤 특별한 사건에 의해서 한 사막 도시에 고립된 이들이 벌이는 소동이다. 물론 그 사이에 배신과 암투, 음모와 비극 같은 일이 일어나서 ‘과연 살인범은 누구일까요?’하고 질문을 던지는 추리극은 전혀 아니다. 11살 소년의 엉뚱함이 스며들어 있는 그의 영화답게, 이번에는 외계인과 조우로 인해일어나는 소소한 해프닝을 다룬다.
소행성의 날을 맞이해 가상의 도시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서로 모인 이들이 우연히 외계인을 만난 후 도시에 격리되는 과정을 다룬다. 이 과정 속에서 서로가 가진 고유한 결핍과 아픔을 마주하게 된다. 아내를 잃은 남편,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끝내는 이혼한 유명 여배우, 내기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엄마를 잃은 슬픔을 애써 감추며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는 소년들. 이러한 결핍을 서로 이해하면서 서로 다른 유형의 유대를 보여준다.
가깝지만 멀리 느껴지는 가족보다 더 자신을 이해해주는 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때로는 공통의 적을 향해서 싸우거나, 썸과 연애 그사이 어딘가를 배회하면서. 소행성 도시라는 공간의 뜻처럼 꼭 이러한 유대를 쌓아가는 그들이 소행성들 같았다. 일정한 거리를 두되, 공존을 추구하는 행성과 위성이라고 할까. 삶으로 비유하자면 느슨한 연대라고 할까.
이처럼 극 안의 극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는 삶에 필요한 느슨한 연대에 대해서 말한다. 이와 달리 이러한 연극을 쓰고 시연하는 창작자 관점으로 흘러가는 본 이야기는 영화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한다.
특히 연극의 주연 배우가 장면을이해하지 못하고불만을 토로하자, 연출자는 오히려 잘하고 있다라는 엉뚱한 답변을 한다. 또한 영화는 잠들지 않으면 깰 수 없다는 대사를 무한히 반복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첨엔 이게 뭔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의 정의를 보여준 것 같다.
느슨한 연대가 낯선 감정과의 조우라면, 우리가 영화를 마주하는 건 낯선 상상과의 조우이다. 그래서 처음 이 영화를 본 후 도통 모르겠다고 할 수도 있고, 연극의 주인공처럼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태생적으로 영화는 감독의 상상에서 시작하고, 상상이란 것은 모호함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방정식처럼 하나의 값으로 도출되기 어렵다. 그래서 연출자도 주연 배우에게 모호한 답을 들려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모호한 상상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갈래의 해석이 언제든 가능하다. 그래서 재밌기도 하지만, 그래서 낯설고, 그래서 어렵다. 하지만 웨스 앤더슨은 말한다. 잠들지 않으면 깰 수 없다고. 상상하지 않는 영화는 상상할 수 없다고. 그의 상상은 그렇게 영화가 됐다. 깔롱쟁의 상상이 또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