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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일 Aug 18. 2021

어느날 ARS가 울렸다

얼굴 한쪽을 쓸다가 손가락을 멈췄다. 뭔가가 오톨도톨하다. 헐 뾰루지. 연이어 세 개나 자리잡고 있었다. 뿌리가 단단해 보였다. 성장호르몬이 나오지 않으면 여드름도 안난다고 하던데, 생리를 할 때가 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여드름이 웬 말이람. 서른이 넘은 뒤로 나태하던 내 피부에 갑자기 찾아온 이 깜찍한 친구들. 마스크를 고쳐 쓰다가 나도 모르게 이 녀석들을 자꾸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게 된다. 이 친구들은 어제보다 오늘 더 단단해져 있다.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거겠지. 매끈한 피부 사이로 갑자기 우뚝 솟아나버린 몇 개의 요철. 나는 오늘 하루종일 이 친구들 때문에 신경이 쓰여 업무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간밤에는 자정이 넘은 시간에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불길하다. 이 시간에 나에게 전화를 할 사람이 없는데 대체 누구지? 여느 때처럼 평온하던 일상에 불쑥 끼어든 전화 벨소리는 어느새 불안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핸드폰을 들고 발신 번호를 확인. 익숙한 이름이 아닌 1566으로 시작하는 번호다. ARS. 이 시간에 ARS가 나에게 울려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인터넷 뱅킹을 하지도 않았고, 쇼핑을 하지도 않았다. 뭔가를 결제해야 할 일이 없는 내게 ARS는 무엇을 확인하기 위해 울렸던 것일까. 잘못 걸린 전화이거나, 피싱이겠지. 전화를 거절했다. 2-3분 적막이 내려앉았다. 다시 누우려는 찰나 ARS는 또 다시 울리기 시작한다. 쉽게 그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다시 거절. 이 패턴을 세 네번 반복하자 불안은 공포로 변해갔다. ARS가 이렇게 지독하게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갑자기 등장해 난데없이 계속 울려대는 ARS. 전화를 받는 순간, 내 통장에 돈이 싹 빠져 나갈 것 같은 불길함. 아님 지금 누가 나를 지켜보며 낄낄거리고 있는 건가. 여기까지 생각에 닿자 뒷덜미의 털이 바싹 곤두세워졌다. 괜히 침대에서 일어나서 베란다 샷시의 잠금쇠를 다시 채운다. 돌아오기 무섭게 다시 울리는 ARS. 나는 새로산지 얼마되지 않은 핸드폰을 서툴게 조작해 ARS를 스팸으로 돌렸다. 이내 방안은 다시 고요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는 아직 미처 밀어내지 못한 불안의 텁텁한 뒷맛을 어렴풋이 느끼며 잠에 들었다. 꿈을 꾼 것 같았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혀끝에는 간밤의 불안이 계속 맴돈다. 일어나 입을 헹구고 욕실 거울을 들여다본다. 눈이 빨갛다. 잠을 설친 탓이다. 평온했던 취침 시간을 일순간에 망쳐버린 알 수 없는 벨소리. 나는 출근한 뒤에도 계속 ARS를 생각했다.


요즘 나의 일상은 평온하다. 너무 평탄해서 이상할 정도로 요즘 나에게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일은 내가 만들어야 생겼다. 더할나위 없는 일상이었다. 한편으로는 불안했지만 모른척했다. 그런데 어제, 갑자기 불안이 점점 뒷덜미를 낚아채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은 늘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니까. 늦은 밤의 고요를 깨부수고 불쑥 울리던 ARS처럼, 어느 날 갑자기 우뚝 솟은 뾰루지를 손끝으로 만지게 되는 것처럼 불안은 늘 아무런 기척 없이 불쑥 태연한 얼굴을 내밀었다. 한껏 발톱을 세웠으나 통장에는 다행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종일 긴장해 있던 것이 우습기도 하고 괜히 머쓱해서 퇴근 길에 굴러다니는 돌부리들을 걷어찼다. 뾰루지란 만질수록 덧나는 법이라 결국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해야 어느새 가라앉는다. 끊임없는 관심은 불안의 몸집만을 키울 뿐이다.


어느 날 갑자기 발견된 요철이, 어느날 갑자기 불쑥 찾아온 전화가 나의 모든 것을 뒤흔든다고 해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다시 여기 이 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그만큼의 회복탄력성은 내게 있겠지. 나는 영원히 행복하기만 할 것이란 순진한 낙관이 아니라, 단지 불행이 와도 꿋꿋하게 버티어낼 수 있는 나의 중력을 믿는 것이다. 요철에 걸려 넘어져도 쓱쓱 털고 다시 가던 길을 묵묵히 갈 수 있는. 나의 일상이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나는 그런 확신으로 다시 불안과 싸운다. 물론 이길 때도 질 때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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