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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지 Sep 15. 2023

'울어버리는' 이유

'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

"이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아."하고 내가 말했다.

"2달러만 주면 돼. 정말이야. 자아......" 나는 돈을 돌려주려 했지만 피비는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 가져가도 좋아. 나중에 갚아줘. 연극할 때 가져와."

"도대체 얼마나?"

"8달러 85센트야. 아니 65센트야. 좀 썼으니까."

나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울었지만 운 것은 사실이다. 내가 울자 피비는 깜짝 놀랐다. 피비는 내게로 와서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일단 울기 시작하면 그렇게 간단히 그쳐 지지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침대 가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눈물의 총량이 많은 편은 아닌데, 왜 우는지 모르게 툭 터지는 눈물의 비중이 많은 편입니다. 말하고 나니 무슨 말인가 싶네요. 네, 그런 기분을 느끼는 눈물이 저는 많았습니다. 2019년 12월의 그날도 그랬습니다.

2년 가까이해 온 토요 약사가 슬슬 임계점에 다다랐다 느껴지던 그 겨울이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없는 것 같다를 느낄 때가 그 임계점이 보이는 시작이고, 언제든 재취업이 쉬운 게 약사엄마의 장점이자 단점이라 생각해 왔지만, 그 이유는 여러 이유들 중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이유'일뿐이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저도 정의 내릴 수 없는, 형체로 따지자면 가오나시 같은 그 무엇이 제 마음 한 곳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죠.

마침 약국장이던 동기 언니가 약국을 매매하게 되면서 저는 시기 좋게 약국을 그만둘 수 있었습니다. 아쉬움보다는 훌훌 터고 날아갈 가벼움이 더 큰데, 같이 일하는 선생님들은 너무 아쉬워하시니 같이 아쉬운 척을 하는 제가 좀 위선적이라고 느껴지는, 그런 12월이었습니다.

마지막 근무 날,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멜랑콜리함에 잠시 가벼움을 내려놓고 일을 하고 있는데, 눈에 익은 두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종종 약국에 오던 엄마와 딸이었습니다. 웃는 모습이 예뻐서 말도 좀 더 걸어주고, 눈 한 번 더 맞춰주던 아이. 아이의 약꾸러미를 들고 조제실에서 나오는데 어머님이 웃으시며 말을 꺼내셨습니다.

"아우, 약사님. 저희 딸이 약사님 진짜 좋아해요. 나중에 약사님 같은 약사가 되고 싶대요. 그러려면 공부를 잘해야 할 텐데~"

말이 많은 어머님은 아니시지만 워낙 말이 고운 분이셨기에 칭찬을 위해 해주시는 말이라 여겼습니다. 민망한 듯 웃으며 고개를 드는데, 부끄러운 듯 엄마 뒤에 서서 반쯤만 몸을 내놓은 채, 엄마 옷깃을 붙잡고는 나를 보며 해사하게 웃고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목이 뜨거워지며 울컥 무언가가 솟구침을 느꼈습니다. 아마 제가 조금만 더 정신을 빨리 차리지 않았다면 정말 '울어버렸을' 지도 모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한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다시는 약국에서 일하지 말자."

그 뜨거운 감정의 원인이 제 부끄러움이라 결론을 지은 후였습니다. 아이가 바라보는 내 모습과 실제의 나는 괴리감이 너무도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저 알바처럼 돈을 벌기 위함에 더 집중되어 있던 약국에서의 마음가짐이 아이에게 드러난다 생각하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 아이가 바라보는 약사의 사명에 맞게 일하는 약사님들께도 내가 일하는 건 누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 이후로 약국 근처에는 얼씬도 않게 되었습니다.

중반이 되도록 '뉴욕 부잣집 도련님의 배부른 소리' 정도로 여겨지던 <호밀밭의 파수꾼> 속 홀든의 목소리가, 울음을 터뜨린 홀든을 보면서야 비로소 울림으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못 견딜 홀든의 그 모습이 나의 못 견딜 어두움을 비치는 거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는 내내 사춘기가 다시 온 느낌이었습니다.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의 폭주기관차가 되어버렸죠. 홀든에 대해 양면의 감정이 끊임없이 핑퐁처럼 오갔습니다. 부잣집 도련님의 배부른 소리라 일컬으며 홀든같았던 누군가가 떠올라 홀든이 더 싫어지기도 하면서도, 그런 홀든에게 이입되는 나 자신이 혼란스러워 기분이 좋지 않은 상황이 자꾸만 발생했습니다.


나는 무려 네 과목을 F학점으로 장식했다. 게다가 장차 학업에 열중할 의욕도 전혀 없었다. 선생들은 나에게 자주 경고를 했다. 특히 나의 부모가 늙은 교장 서머의 호출을 받고 학교에 왔던 학기 중간 무렵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나는 공부에 전념하지 않았고, 드디어 퇴교당하고 말았다.


무심한 듯 자신의 퇴교 사실을 읊조리는 홀든을 보면서는 그 아래에 '솔직히 매우 빡침', '핑계에 불과한가, 그만한 이유가 있나?'라고 적어두기도 했고.


머리 한쪽, 그러니까 오른쪽 머리에는 새치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그런데도 가끔 열두 살짜리처럼 행동하곤 한다. 다들 그렇게들 말하지만 역시 아버지가 앞장서서 그렇게 말한다. 일리 있는 말이긴 하지만. 절대로 진리는 아니다. 어른들이란 자기네들 말이 절대진리라고 한다. 나는 그들의 말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이렇게 뭔가 맞는 말도 하는 듯한 홀든의 말에는 '어른으로서 열린 마음, 동등한 위치를 주기가 어렵다'라고 솔직히 적어두기도 했습니다. '젠장!', '제기랄!' 등의 단어가 보이는 빈도가 높아지던 어느 즈음에는 '졸라'라는 말이 제 입에서 나지막이 튀어나오기까지 했습니다. 중학교 때도 쓰지 않던 단어가 입에서 툭 튀어나오고 나니 혼란은 더 커졌습니다. 나는 지금 성숙한 어른인데, 이런 미성숙한 단어를 골라 쓰는 게 맞는지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과 그것을 앞서 나가는 쾌락의 공존이라니. 이게 뭔가요.


약국을 다시는 안 가겠다 다짐하게 만들었던 그날의 소녀를 떠올리게 하는 피비의 8달러 85센트와 홀든의 울음까지 다다르자, 저는 더 이상 혼돈을 정리할 의지를 잃고 그저 그 소용돌이 속에 같이 휘몰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러 버렸습니다.

책을 읽을 때면 감정이 널을 뛴다는 것만 인지한 채, 약국 마지막 날의 소녀의 얼굴만 맴도는 채, 그렇게 저는 <호밀밭의 파수꾼> 팟캐스트를 녹음하기 위해 관악구로 향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느끼는 이 거친 생각들을 어찌 정리할 바 몰라 포기해 버린 채 다른 분들의 의견에 기대겠다는 얍삽한 심보로 간 것이라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리 글을 쓰신 다른 분들께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겠다는 심정 하나로, 피비의 8달러 85센트가 나오는 페이지와 예전의 그날 적어두었던 작은 메모를 캡처하여 올려둔 게 제가 한 전부였습니다.

따뜻한 하니님을 첫 주자로 우리는 장비가 잘 갖춰진 좋은 스튜디오에서 두 번째 팟캐스트 녹음을 시작했습니다. 제 순서가 되자 쓸님은 녹음에 들어가기 전, 제게 올리신 사진과 메모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는 지를 물으셨습니다. "어..."라고 망설이며 말을 시작한 저는 결국 또 그날의 감정이 떠올라 목이 메인 양 목소리로 말을 마무리하는 진풍경을 연출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아, 망했다 싶었습니다. 어쩌자고 여기서 혼자 이런 감정에 취해 공감을 사기도 전에 혼자 울어버릴 수 있는지. 지독히도 싫은 내 눈물의 포인트가 오늘도 한몫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함께 있던 분들이 조심스레 한 말씀씩 꺼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직장생활 시작부터 갖고 가는 필수품 같아요.

항상 자신의 분야에서 완벽할 수는 없어요.

결국 그 아이가 원한 건 진심과 순수가 아닌가 싶어요.

그 아이는 좋은 약사님 하나 날려버린 거네요, 하하.


그 순간, 오랜 기간 손이 아프도록 쥐고 있던 내 안의 무언가가 포로록 날아갔습니다. 내가 그 아이의 웃음을 보며 뜨거움이 목구멍에 차올랐던 이유는 곧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편히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이자 모두에게 너그러운 것 같지만 모두에게 어느 정도의 못마땅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나조차 충족시키지 못하는 나의 '높은 이상'. 더 이상 가벼워지지도, 자라지도 못하는 그 작은 새가 함께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감사한 분들로 인해 제 손을 벗어나게 됨으로 저는 이 날에서야 진정으로 제 기준에서의 의롭지 못한 불순물을 인정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전 진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다고 해주세요.
이만하면 수고했지요?
이 정도도 충분하다고 해주세요.
도와주세요.


몇 달 전, 차마 나오지 않던 기도가 무심결에 터져 나왔을 때, 내가 했던 기도를 기억합니다. 하나님께라도 충분히 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주변 분들이 아무리 충분하다고, 마르지 않는 샘물 같다고, 제일 멋지고 제일 강하다며 나를 위로하고 힘주셔도, 결국 근본은, 불순물을 용납지 못하던 나의 작은 새였습니다. 내가 그 작은 새를 놓아주지 않는 한, 나는 끊임없이 나의 의롭지 못한 불순물에 좌절하고 그로 인한 불완전에 힘겨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작은 새를 놓아준 그 시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저는 책을 다시 넘겼습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실제로 해보기 전에는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나야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긴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정말 어리석은 질문이다.


자신의 높은 이상으로 방황하던 홀든은 피비로 인해 마음을 돌려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다른 학생들처럼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긴 하지만,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함으로 괴로워할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나 역시 앞으로도 열심히 삶을 살아나가겠지만, 그것이 어떤 방향일지, 무엇이 '완전'일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고 오만이 아닌가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상이라는 오만으로 자신을 괴롭히지 않으려 노력하려 합니다. 저의 불순물은 의롭지 않지만, 나는 그로 인해 더 의로워질 수 있음을 믿어보려 합니다.


이 날 녹음한 팟캐스트는
가을 경 본격 송출될 예정입니다.
함께 하게 된 엄지작가님들,
무한 감사하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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