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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지 Nov 10. 2023

남편에게 합격 3관왕 자리를 드립니다

나의 생일을 맞이하여

사실 저희 부부는 서로 이벤트에 소질이 없는 편입니다. 맛있는 것을 먹는 게 가장 큰 기쁨이 부부인지라 연애시절부터 기념일은 곧 사당역 마리스꼬에 가서 서로 등 두드리고 소화제 건네며 나오는 날이었고요. 결혼 후에도 '기념일 = 뷔페'라는 전통은 쭉 이어졌습니다. 이벤트에 진심인 남동생네 부부를 보다 보면 따라 하고픈 마음이 생겨 한두 번 레터링 풍선이나 가랜드를 준비해 본 적은 있지만 연속성은 없었습니다. 시간과 공을 계속 들일 정도로 그것에 마음이 가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이번 제 생일은 달랐습니다. 제게 알 수 없는 묘한 마음이 일었던 것이죠. '챙김'을 받고 싶었습니다. 왜인지 누구에게라도 생일을 챙김 받고픈데,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그걸 대놓고 요구하긴 진상 아닙니까요. 제일 가깝고, 나름 챙김 받을 명분도 있는 남편에게 챙김을 요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물론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데는 적잖은 자존심과의 싸움이 필요했습니다. 서프라이즈로 챙겨주는 거면 모를까, 이건 완전 옆구리 찔러 절받기잖습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쫌 많이 챙김받고팠나 봅니다. 결국 그 민망함과 자존심을 누르고 남편에게 당당히 '챙김'을 요구했습니다.


"여보, 나 이번 생일은 좀 챙김 받고 싶어. 당신이 나를 꼭 잘 챙겨줘야 해. 알았지?"


남편은 어이없는 표정을 잠시 지었지만 다행히 그 안에는 웃음기가 있었습니다. 알았냐는 저의 재촉성 질문에 알았다는 답을 받긴 했지만 워낙 이벤트랑 거리가 먼 사람인지라 답을 얻어낸 후에도 미덥잖았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재촉은 서로 감정이 상할 수도 있을 거란 으른스런 생각으로 1주일을 꾹 참았죠.


생일 전날, "이제 5시간 반 남았네~"라는 퇴근길 남편의 전화에 "12시부터 뭐 하는 거야?"라고 묻는 철딱서니 없는 제 자신에게 "너 왜 그러니 정말!"을 외쳐주고 싶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말로는 더 재촉하지 않았으나 말보다 강한 온몸의 기운으로 '챙김'을 뿜어내고 있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


집에 돌아온 남편은 가벼운 다른 얘기 후 이것 보라며 자신의 핸드폰을 들이밀었습니다. 잘은 몰라도 근사할 것 같은 식당의 예약내역을 보이며 남편은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나 이런 거 잘 못하는 거 알지? 나 이런 사람이야~"를 외쳤습니다. 챙김을 그렇게 요구해 놓고, 정작 예약내역을 보니 좀 민망해진 변덕스러운 이 여자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며 "오~ 좋은 데 했나 보네?"란 말만을 남겼지요.


대망의 생일이 밝았습니다. 사람들의 축하가 하나 둘 도착하면서 마음속 간절했던 '챙김'의 응어리가 이미 살살 녹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일이 아닐 걸 상상한 것도 아닌데, 남편에게 너무 유난스레 부담을 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요. 그러나 이미 엎어진 물.


생일이어도 변치 않는 제 일상의 무게와 일 속에서 하루가 고단해질 즈음 저녁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남편의 차가 아파트에 도착했다는 알림이 울리고, 조금 지나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들어오는 기척도, 문이 닫히는 기척도 없는 적막이 이어졌습니다. 의아해져 현관으로 다가가니-


한 손에는 꽃다발, 한 손에는 케이크를 들고는 한 발로 끙차 문을 열고 있는 남편이 보입니다. 남편의 후광이 보입니다!


세상에나. 꽃다발이라니요. 생각도 못했습니다.


꽃을 좋아하는 남편이라 연애 때는 종종 사줬는데, 결혼하고는 어째 꽃소식이 없냐는 제 툴툴거림에 회사 근처에 꽃집이 없다며 긁적 대던 남편이었는데 말이죠. 어디서 샀냐는 물음에 약간의 으스댐을 곁들여 "30분은 찾아 돌아다녔어~"라고 말하는 남편. 요즘 누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찾아다니냐고, 검색하고 예약해서 찾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냥 쑥 삼켜버렸습니다. 그게 중요한가요!


꽃다발! 합격!

신나서 사진을 찍어 보았습니다. 사진에 이 사랑스러움이 다 담기지 않아 아쉽지만, 아무렴 어때요. 보는 제가 행복하면 된 거죠!


7시 반에 예약을 잡았다 하여 곧장 출발합니다. 기분 좋게 빠져나간 외곽, 예전에 지나다니며 한번 와보고 싶다 생각했던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섭니다. "나 여기 알아! 여기 몇 년 동안 지나다니면서 궁금했어!" 또 체면 따위 잊은 아내는 좋아서 발랄함의 극치를 달립니다.


식당! 합격!


지난달, 저와 같이 간 행궁 맛집을 최고의 맛집이라 극찬하던 딸에게 예가 좋니 거기가 좋니 물으니 당연히 여기랍니다. 맛도 좋을뿐더러 분위기가 더 좋다나요. 하긴, 가격이 두 배 이상 차이 나는데 맛도 분위기도 더 좋아야지요. 아참, 여기서도 또 가격 비교하는 엄마 습성 못 버렸습니다. 무튼 좋습니다.


행복하게 식사를 하니 핸드폰도 안 궁금합니다. 지금 순간이 행복합니다. 남편이 좋은데 데리고 와줘서 고맙고, 우리 식구 다 같이 생일밥 먹는 게 좋고, 내 생일이 평일이라 참 행복합니다. 뚱딴지같겠지만 주말에 이런 곳 왔으면 너무 복잡해서 쬐매 덜 행복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식사를 끝내고 집에 와 마무리로 케이크를 꺼냈습니다. 잠깐사이 아들이 아주 용감하게 케이크 상자를 비스듬히 세우고 케이크를 확인하려 해서 가슴이 철렁했는데, 다행히 생크림 케이크가 아닌지라 모양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하마터면 울 뻔했습니다.


케이크! 합격!


남편은 하트초를 준비함으로 '챙김 서비스'의 완벽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저와 아이들의 행복한 사진을 남겨주는 사진사 역할까지 완벽하게 수행하며 말이죠. 참고로 케이크는 당일 모두 우리 가족 입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매우 맛있더군요.ㅋㅋ


여러 분야에서 감사하게도 인정받고 쓰임 받으며 하루하루 바쁘게 열심히 살아갔지만

그 와중에도 살짝 못난 마음이 싹트고 있었어요.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만 하는 것 같아.'

'내가 맡은 역할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지면 저들도 내게 더 이상 잘해주지 않게 될까?'​


'필요'한 존재로서의 감사와 뿌듯함이 어느새 생기를 잃고, '필요'는 이제 제 존재의 유일한 이유가 된 것 같은 씁쓸함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던 거지요. 제가 남편에게 요구한 '챙김'은 제가 확인하고픈 '거저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남편은 두말없이 그것을 확인시켜 주었고요. 비단 남편뿐 아니라 제 주위 모든 이들 역시 늘 제게 사랑과 마음을 거저 주고 있었다는 걸, 몽글해진 마음을 통해 느낍니다. 어쩌면 나 자신의 지침이 주변을 바라보는 눈까지 회색으로 만든 건 아닐까 해요. 11월은 남은 일들 조금 더 힘내고, 12월은 잘 쉬어보아야겠다 생각해 봅니다.


꽃다발, 식당, 케이크 모든 분야에서 합격 목걸이를 획득하신 3관왕 남편에게

1년간(이라고 쓰지만 얼마나 갈진 장담 못하겠습니다) 아내 눈치 안 보고 발 뻗은 채 편히 쉴 수 있는 특권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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