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nie Faivre
나와 그녀의 이야기_
갤러리를 나와 프리랜서로 살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막상 앞 길은 컴컴했다. 그래서 결국 최후의 보루처럼 남겨둔 바로 그것, 한국 식당에서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틀 저녁을 일하면 그래도 일주일은 어찌어찌 버틸 만큼의 월급을 벌었다. 하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이유도 없이 무기력해지고 쳐지는 스스로를 견디다 못해 변화를 주어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대뜸 작업실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모두가 출근하듯 나도 매일 어딘가 갈 곳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겨울의 베를린에서 작업실을 구하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고, 며칠을 하염없이 인터넷 뒤지기를 반복하다 한 작업실 광고를 보게 되었다. 가격은 조금 무리하더라도 나쁘지 않았고, 장소도 집에서 딱 10분 거리, 걷기에도 아주 적절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작업실의 첫인상은 말 그대로 '카오스'였다. 명랑한 개가 왈왈 짖으며 날 제일 먼저 맞이하더니 멀리서 고양이는 놀라서 후다닥 도망가버리고, 그 와중에 어린아이까지 서럽게 울고 있던 참이었다. 마침 왜소하고 예쁘장한 한 여인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러 달려 나왔다. 다행히 그녀가 통제에 나섬과 동시에 작업실은 곧 평화를 되찾았다. 그제야 공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화려한 페인팅이 잔뜩 걸린 벽돌벽, 물감과 소품으로 가득 찬 나무 선반, 노란 페인트칠이 입혀진 투박한 책상까지. 정돈되지 않았지만,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따뜻함이 전달되는 공간이었다. 더 고민할 이유가 없다 싶어 "나 계약해도 돼?"라고 물었다. 그녀는 다행히 활짝 웃어 보였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 또한 시작되었다.
Fannie Faivre
프랑스 남부 도시 아를(Arles) 출신. 남자 친구이자 아이 아빠, 파비앙과 함께 6년 전 베를린으로 이사를 왔다. 작업실이자 워크숍 공간인 'Bleu avant-garde Atelier'을 운영 중이며 에밀과 함께 할 수 있는 아동 미술 워크숍을 주로 열고 있다.
블루 아방가르드 아틀리에
회갈색 건물들 사이로 눈에 띄는 파란 페인팅, 그 건물벽 바로 앞까지 뻗쳐 나온 나뭇가지에는 다채로운 색감의 패브릭들이 사시사철 떨어지지 않는 열매처럼 매달려 있다. 문 밖에서 이는 호기심은 길 가던 이를 한참 창 밖에 머물게 한다. 안을 들여다보면 커다란 캔버스와 페인팅 도구들, 나뭇가지로 만든 옷걸이, 천장에 걸어놓은 수제 모빌까지 개성 넘치는 물건들과 다채로운 색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미술 작품만을 전시하는 갤러리나 박물관과는 다른 성격으로 삶과 예술이 주는 감동을 사람들이 느낄 수 있을 만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 영화 상영을 한다거나 음악 공연을 할 수도 있고 그냥 각자가 그림만 그려도 좋아. 혼자 고뇌만 하면서 작업 하기보다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 나눌 때 그 예술이 더 특별해진다고 생각하거든. 아이디어와 에너지가 있지만 막상 혼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사람들에게 이 공간을 열어 두고 싶어. 틀에 갇히지 않고 하고 싶은 것, 느끼고 싶은 것을 제한 없이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공간.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처럼!” 바로 이 천국 같은 곳이 파니가 운영하는 블루 아방가르드 아틀리에다. 남녀노소 모두를 위한 예술 작업실 겸 워크숍 장소이며 파니의 가족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베를린으로
파니가 베를린으로 온지는 벌써 6년이 다 되어간다.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했기 때문에 그림을 직접 그리는 건 그저 취미로만 여겨 왔어. 근데 우연히 내 그림을 본 파비앙이 진지하게 미술가로서의 삶을 살라고 조언해주더라고. 덕분에 그를 따라 이 곳 베를린에 오게 됐고, 본격적으로 내 작업을 하고자 마음 먹었지. 그치만 사실 나는 원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스타일이 아니야. 때문에 베를린에서 꼭 뭘 해야겠다는 거창한 계획이나 기대는 없었어. 오기 전에 사람들을 통해서 도시에 대해 들은 건 예술하기 좋은 곳, 그렇지만 예술로 돈 벌기는 힘든 곳, 그리고 겨울이 무척 추운 곳 이 세 가지가 다였으니까." 사람들의 말은 거짓말같이 꼭 들어맞았다. 도착한 그 해 파니가 겪은 베를린의 겨울은 정말 춥고도 외로웠다. 해가 나지 않는 베를린의 짙은 회색빛은 마치 영원히 끝이 보이지 않을 터널 같았고, 파니 또한 갈 길을 잃고 헤메기 시작했다.
터널 통과
일단 생활비부터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파니는 베이비 시팅 일을 구했다. "독일-프랑스 가정이었는데 아이 세명을 위해 베이비 시터 6명을 고용한 부잣집이었어. 근데 아무리 옆에서 케어를 해준다 한 들 우리는 고용인이다 보니 어쨌든 아이들이 원하는 걸 대 부분 들어줄 수 밖에 없었어. 나는 놀이시간에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곤 했는 데 이때의 고군분투 경험이 지금 워크숍을 운영하는 데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남자친구 파비앙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친구들과 다 같이 어울려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듣는, 별 다를 것 없는 하루가 반복되어 3년이 흘렀다. 그러던 중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다. 그 무리 중 한 명의 소개로 '48시간노이퀠른(http://www.48-stunden-neukoelln.de/en)'이라는 베를린 지역 미술 축제의 연출부로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덕분에 잊고 있던 파니의 예술혼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녀만의 써클에서 벗어나 여러 아티스트들을 만나고 다양한 예술적 시도를 하게 되면서 파니는 '지금, 여기' 베를린에 와 있음이 얼마나 소중한 지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금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하였다. 술과 놀이에 쓸 돈을 아껴 물감과 붓, 캔버스를 샀고, 홀로 방에서 작업하며 자신만의 회화 스타일을 갖춰 나갔다. "다행히 내 작업에 관심을 보이는 친구들의 입소문을 타고 앨범 커버 작업이며 동화책의 일러스트까지 다양한 문의가 들어왔어. 또 관객 앞에서 즉석으로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까지 하게 되면서 베를린에서의 내 삶이 구체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지. 터널을 막 통과해 질주하는 느낌이었달까? 근데 정말 사람은 한치 앞을 몰라. 바로 그 때 쯤이었을꺼야..."
결정의 순간
'블루 아방가르드 아틀리에', 이 곳에 온 가족이 모여 살게 된지는 일 년이 채 안 됐다. 파니는 이년 전 스물세 살의 나이에 파비앙의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그리고 엄마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자신과 태어날 아이, 그리고 파비앙을 위한 안식처를 얻기로 결심했다. 사실 파니와 파비앙이 처음 베를린에 가기로 결심했을 때처럼 아이의 임신과 출산 또한 결코 계획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임신했을 때 사람들이 다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들 조언했었어. 나이도 어린 데다가 대학도 아직 졸업 전이지, 그림을 그리는 나도 음악을 작곡하는 파비앙도 안정적인 수입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당시 그와의 사이도 그다지 좋지 않을 때여서 아빠없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어.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다 내가 싸워냈어야 할 일종의 시험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어쨌거나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결정을 내려야 했으니까. 스스로의 선택에 자신이 있다면 결국 다른 사람들의 우려가 사실은 그들 자신의 두려움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게 되거든"
에밀을 맞이하며
파니는 아이를 낳겠다는 결정을 내린 후, 일사천리로 출산과 그 이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먼저 미혼모를 위한 정부 지원금을 받기 위해 관청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유럽 여느 나라보다 미혼모에 대한 혜택이 좋은 독일에서는 3년이라는 충분한 시간 동안 방값과 적당한 생활비를 지원해준다. 대신 무수히 많은 서류 준비와 관청 직원과의 실랑이를 거쳐야 한다. 고생 끝에 기적적으로 파니의 지원금 신청이 받아들여지고, 줄곧 해 오던 베이비 시팅 일을 그만둘 때가 임신 7개월 차였다. 집을 셰어 하던 친구가 파니를 배려해 이사를 가고 남자친구 파비앙이 출산 때까지 함께 있어주었다. 그들은 태어날 아이를 배려해 집에서 출산을 하기로 결정했다.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렇게 진통제도 먹지 않고 견디기를 스무 시간째, 드디어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 찾아왔다. 희미하게나마 방을 밝히고 있던 촛불마저 꺼지고 모두가 숨죽이던 조용한 순간이었다. 파니는 가장 편안한 자신의 침대 위에서 그렇게 에밀을 세상에 맞이하였다. "사람들은 보통 아이를 낳기 좋을 시기와 나쁜 시기를 이야기하곤 해. 하지만 나는 그냥 아이가 내게 스스로 찾아온 그때야말로 그 일이 일어날 가장 적절한 시기이라고 생각해."
상냥한 베를린
여느 젊은이들처럼 온갖 파티와 이벤트로 화려했던 파니의 베를린 삶은 에밀이 태어난 후 180도 바뀌게 되었다. 에밀 또래의 엄마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또 하루의 대 부분을 에밀과 보내게 되면서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베를린의 새로운 면면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이토록 아이들에게 상냥한 도시였다니, 뜻밖이었다. "베를린은 내게 아이를 키우고 가족과 함께하면서 동시에 내가 하고 싶은 예술을 할 만큼의 충분한 그리고 안전한 공간을 제공해 줘. 또 런던이나 파리 등의 다른 대도시와는 다르게 도심 속의 시골 같은 고즈넉함과 수수함 또한 느낄 수 있어. 집 근처 바이센제(Weissensee) 호수에서는 에밀과 함께 작은 보트도 탈 수 있고 작은 어린이 농장에서 동물들에게 직접 먹이를 줄 수도 있어. 특히 내가 사는 지역(Prenzlauerberg)은 도심의 작은 마을 같기도 해. 근처 시장에서는 사람들이 직접 텃밭에서 키운 채소를 팔고 있고, 매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동네 벼룩시장에서는 돈을 받는 대신 필요한 물건을 서로 교환하기도 해. 이런 여유와 따뜻함을 에밀한테 보여줄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아."
천진한 사람
현재 파니는 블루 아방가르드를 공식적인 사업장으로 등록하기 위해 다시금 수많은 서류와의 싸움을 마주하고 있다. 미혼모 지원금을 끊고 작업실과 워크숍 운영만을 통해 생계를 꾸려나갈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그냥 편안히 3년 누리면 될 것을 그세를 못 참고 몸이 근질거리나 보다. "예전에는 나 자신만의 생활과 행복을 위해 돈을 벌었다면 이젠 책임져야 할 사람이 하나 더 생겼잖아. 다행히 기간이 넉넉한 지원금 제도 덕에 아이와 내가 살아갈 수 있을 방법을 나름 여유롭게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아. 근데 가만히 안주하기 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이 예술 일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게 에밀에게도 더 떳떳할 것 같아서 서두르는 참이야." 파니는 곧 아뜰리에에서 열릴 재즈 공연에 우리를 초대하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 가녀린 체구에서 뿜어나오는 그녀의 강인함이 아이를 둔 엄마의 모성에서 나오는 것이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가 강한 이유는 엄마라서 이기보다 그녀 스스로가 어린아이처럼 겁 없고 천진한 사람이라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