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iyasu Furutami
나와 그의 이야기_
블루 아방가르드 아틀리에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새 일상에 적응하던 무렵이었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는 소문에 그녀의 친구들이 쉬도 때도 없이 작업실을 찾기 시작했다. 인사를 하려는 건지, 구경을 하려는 건지 한참을 내 옆에 머물러 참 난감하기까지 했다. 그중 로랑이라는 프랑스인 아저씨(?)도 한 명 껴 있었다. 실험 음악을 하던 친구였는데 김추자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는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주, 한국과 일본에 3개월 간 놀러 간다는 게 아닌가! 마침 파니가 알려줘서 당장에 나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괜히 신이 나 즉석으로 홍대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프랑스인 퍼포머 친구를 연결시켜 주었다. 이후에도 한참을 떠들다 로랑의 굿바이 파티에 꼭 참여하기로 약속까지 하고서 작업실을 나왔다.
파티 당일이 되었다. 마침 엄마가 겨울 대비용으로 보내주신 소주가 눈에 띄어 로랑 선물용으로 몇 병을 챙겨 집을 나섰다. 주소는 맞긴 한데, 깜깜한 밤에 눈까지 쏟아지는 바람에 혼자 힘들게 찾아 헤매던 찰나였다. 뒤에서 왠지 모르게 친숙한 일본어가 나긋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뭘 찾는 모양새가 나랑 비슷해 보였다. "너네도 로랑 파티에 가는 거니?" "응! 맞아!" 후루와 그의 여자친구 카나코였다. 무사히 파티 장소에 도착한 우리는 곧 서로 곁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추운 날씨에 몸이 녹아 와인 한 잔에 취기가 돌았고, 우리는 엉겁결에 로랑 소주까지 뜯어 버렸다. 그 이후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어쨌든 로랑은 다음 날 무사히 한국행 비행기를 탔고, 도착해서도 매우 좋은 시간을 보냈더랬다라는. 그리고 덕분에 우리는 각자의 전시와 공연을 오가며 응원해주는 좋은 친구 사이가 되었다.
Michiyasu Furutami
일본 오사카 출신으로, 여자 친구와 함께 베를린에 온 지 어언 4년이 다 되어 간다. 일본 현대 춤 장르의 하나인 부토를 내세워 퍼포먼스와 댄스 공연을 활발히 보여주고 있으며 체코, 폴란드 등 동유럽권으로까지 점 점 무대를 넓히고 있는 중이다. 베를린에서의 부토 강연 및 워크숍 또한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떠나자, 결심
지난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 대지진은 일본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릴 만큼 커다란 충격을 안겨줬다.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피해는 물론이고, 원전 폭발로 어마어마한 양의 방사능이 누출되면서 회복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에너지에 대한 인간의 지나친 욕심과 자연의 어마무시함을 간과한 탓이었다. 그러나 사고 발생 당시 일본 정부는 자국민을 안심시키고자 결과를 축소하며 사실과 진실, 꾸밈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도록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에 대해 일본 국민들은 놀라울 만큼 침착했고 의심스러울 만큼 덤덤했다. 후루는 바로 이때 일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목소리를 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이 사회에서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서 였다.
후루의 공연_ 출처_노조미 마츠모토 소장
부토와의 만남
후루의 퍼포먼스를 처음 접한 대 부분의 사람들은 쉬이 입을 다물지 못 한다. 부토라는 형식의 일본 춤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괴상하다 싶은 움직임이 춤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아마 그 주된 이유일 듯하다. "관객에게 내 공연이 어땠냐고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어. 아마 다들 이상하고 생각하겠지? 그래도 계속해서 퍼포먼스 요청이 들어오는 것 보면 꽤 인기가 많은 것 같기도 해. 하하." 때는 20년 전, 후루가 일본대학교 공연 연극학과에 입학하던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학교 선배가 속해 있던 산카이 쥬쿠(Sankai Juku) 부토 그룹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들의 연습실에 빈번히 오가기 시작했다. 발레 전공이었던 후루에게 부토의 세계는 꽤나 큰 충격이었다. 엄한 규율과 철저한 연습이 요구되는 발레와 달리 부토 그룹은 늘 헝클어진 옷차림으로 담배 피우고 사케 마시는 일이 일상의 전부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후루는 부토라는 춤보다 이렇게 멋에 취한 사람들에 더 큰 관심이 생겼다. "부토야말로 진정한 '펑크'처럼 느껴졌어. 음악 장르에만 있는 줄 알았던 펑크가 그들의 삶 자체에 녹아들어 있더라고."
신(新) 몸의 언어, 부토
1960년대 패전 후의 일본에는 여러 예술적 아방가르드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중 춤의 분야에서는 일본 가부키와 현대 무용이 결합된 부토라는 새로운 형식이 히지카타 타츠미와 오노 카즈오에 의해 고안되었다. 이는 일본 내의 팽배했던 허무주의와 세계의 흐름이었던 표현주의가 결합되어 탄생한 신(新) 몸의 언어였다. 하얀 물감으로 온몸과 민 머리를 칠해 개성을 지우고, 흉측하리만큼 끊임없이 몸을 뒤트는 게 기본 콘셉트이었다. "부토는 원래 기존 형식과 개념에서 철저히 벗어나고자 만들어진 춤이었어. 네가 줄곧 믿어 왔던 것을 '왜?'라고 의심하는 과정, 바로 이게 내가 부토에 매료된 이유야. 또 하나! 지구 반대편 호주 그리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베를린이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중력이 있기 때문인데 우리는 종종 그걸 잊고 살곤 해. 그걸 깨우쳐 주는 게 바로 부토라는 춤이야." 어둠의 춤이라 불리는 부토는 이처럼 하늘이 아닌 땅, 즉 땅의 중력을 향해 무겁고 또 무겁게 움직이는 춤이다.
베를린으로
후루가 베를린에 온 것은 현실적인 이유와 우연한 선택에 따른 것이었다. 유럽 여행을 하다 길게 머물게 된 덴마크에서는 그에게 장기 비자를 허용하지 않았고, 당시 베를린에 있던 친구를 방문할 겸 찾은 이 도시에 결국 자리를 잡게 되었다. 타 도시에 비해 비교적 예술가들에게 후한 비자 선택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곤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베를린 정말 끝내줘.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을 한 장소에서 만날 수 있고, 이들과 하나의 예술을 함께 추구할 수 있으니까. 또 매 번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이 도시 사람들이 나를 자극하곤 해. 마치 하나의 실험실과도 같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내 것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은 사회 내에서의 경쟁과 압박이 너무 심해. 그에 비해 베를린은 누구나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로운 도시야." 물론 후루에게도 힘든 시기는 찾아왔다. 아무리 베를린에 기회가 많다고 하더라도 부토 퍼포먼스 댄서로서 생활비를 충당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처음 친구 덕에 정착한 곳이 베를린의 전설처럼 남아있는 타헬레스*였고, 그때의 인연으로 여러 퍼포먼스 행사에 초대받으면서 현재 후루는 부토 워크숍과 공연을 번갈아하며 지금은 꽤나 여유 있는 생활을 갖추게 되었다.
*타헬레스_베를린 중심지역(mitte)에 위치했던 복합아트센터. 2차 대전 전에는 유대인의 백화점으로 쓰이던 건물이 이후 나치의 감옥으로 쓰이다 통독 후에 아티스트들의 점거로 인해 아틀리에, 영화관, 클럽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2012년 한 은행 회사가 건물을 사들이면서 타헬레스는 문을 닫게 되었고, 현재까지 건물은 비어있는 상태이다.
후루의 부토 워크숍에는 베를린에 거주하는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참가한다. 대 부분이 부토에 대한 개념을 미리 숙지하고 있는 상태라 이론은 가볍게 넘어가고, 바로 실전에 들어간다. 다행히 말보다 몸을 쓰는 워크숍이다 보니 수업은 매 번 만석이다. "네 자신을 느끼고 감정에 몸을 맡겨라 같은 주문을 거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부토를 과학적으로만 접근하는 건 아니지만 각자 몸의 움직임에 더 집중하도록 유도하는 편이야. 이 자세에서는 이 근육과 뼈를 사용해야 한다는 식으로." 10년 전부터 부토는 '아방가르드'함에 반한 베를린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의 유행과 지남을 반복하다 작년부터 다시 이 도시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덕분에 후루를 찾는 사람들이 최근 더 늘게 되었다.
비우고 또 채우는
말로만 듣던 후루의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 찾은 곳에서 우리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공연이 열리는 노이베스트(neuwest)는 과거 전쟁 당시 영국 공군이 베를린에 떨어트린 미사일을 특이하게도 천장에 그대로 남겨 놓았고, 후루는 그걸 부수려는 그야말로 '파괴적인' 즉흥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필을 제대로 받았는지 그는 격정적인 동시에 섬세한 부토의 움직임을 선 보였고, 이를 통해 풀어낸 그의 반전(反戰) 메시지는 명쾌하고 또 통쾌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장식이 우려된 스태프가 공연을 제지하는 해프닝까지 생기고 말았지만 그래서 더욱더 인상 깊은 공연이 완성될 수 있었다. "내 공연은 매우 쉬워. 그래서 더 쉽게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기도 해. 무리해서 관객과 벽을 둘 필요는 없으니까. 공연 전에 항상 내 스스로를 비우자고 다짐해. 머릿 속은 물론이고 몸까지도. 그래야 즉흥적으로 당일의 공연 장소와 관객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거든." 스스로를 비우라니, 뭔가 쉽고도 어려운 참 아리송한 주문이다.
일상의 후루
후루의 공연을 본 일주일 뒤 우리는 인터뷰를 위해 다시 만나게 되었다. 첫 만남에서의 만취한 유쾌한 모습도, 공연에서의 카리스마 넘치던 모습도 온대간데없었다. 이번엔 '수줍음이 많은 동네 독서실 총무 오빠'를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의 감탄에 한 없이 부끄러워하다가도 부토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또 조근조근 말을 이어 가는 모습에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포즈를 취해달라는 우리의 짖궂은 요구에 후루는 대뜸 손을 들어 올리더니 이리저리 움직여 보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재밌다면서 한참을 해와 씨름하는 그를 보며 이번엔 공연하는 후루가 왔구나 싶었다. 부토가 일상, 일상이 부토인 후루에게 모든 세상 일과 만물은, 이처럼 비워진 스스로를 채우는 과정이었다. 다음에는 또 어떤 후루를 보게될 지, 벌써부터 그 만남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