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를 기하학적, 추상적 도형에 담아내기
작년 이맘때 결혼과 맞물려 굉장히 바쁘게 작업했던 외주가 하나 있었다. 전 직장 이사님께서 연결시켜 주신 노무법인 팀장님이 클라이언트였는데, 그 분도 디자이너 출신인 데다가 전 직장상사의 소개로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어서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덕분에 미팅부터 작업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첫 미팅 때 횡설수설했던 나 자신이 떠올라 이불킥...)
그렇지만 노무법인 B.I는 처음 작업해보는지라 설레며 작업했던 기억이 난다. 아래와 같은 기존 로고를 리뉴얼하는 작업이었는데, 몇 가지 요청사항이 있었다. 이 기업은 창립자인 노무사님께서 신앙인이셔서 성경말씀을 모티브로 하기 원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4)
*요청사항: 생명의 빛을 비추는 공동체, 사업장을 통해 빛이 세상에 전파되는 모습이 이미지화되는 로고 / 십자가가 직설적으로 노출되지 않고 간접적으로 표현되었으면 좋겠다-
쉽지 않은 요청이다. 하지만 듣자마자 선명하게 떠오른 이미지나 키워드들이 몇 가지 있었다.
#확장 #퍼져나감 #반복도형 #음각십자가 #크로스로드 등등... 요청사항을 듣자마자 떠오른 이 생각을 놓칠새라 스케치로 옮겼다. 처음에는 점, 선, 면이 한꺼번에 등장하길 원한 나의 욕심(?) 때문에 좀처럼 풀리지 않다가, 며칠이 지나 새로운 눈으로 단순화를 시키니 디지털로 옮겨내고 싶은 시안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역시 채움보다는 비움이다.
여기까지 진행하고 나니 이미지가 어딘가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인 아이콘으로 풀어낼 방법을 찾기 위해 레퍼런스를 서칭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썸네일 스케치를 진행하며 관련된 법무법인 로고들을 서칭해보니, 주로 한글이나 한자 법인명을 도장처럼 만든 곳이 많았다. 무엇보다 '빛' '하늘' 등이 생각나는 컬러보다는 노무법인 특유의 신뢰성이나 지적인 이미지를 위해 어두운 청색 남색 계열을 주로 사용하는 시안들이 많았다. 전혀 다른 방향의 결과물이어서 참고하기 어려웠다. 결국 다른 방향으로 서칭을 하기 시작했는데, 노무법인의 기업명이나 추구하는 방향과 연관된 단어(온누리, 빛, 확장, 생명, 국제 등)를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지구 모양이나 추상적, 기하학적 형태로 참고할 수 있는 로고들이 등장했다.
몇몇 사례들을 참고하며 다양한 썸네일들을 카테고리화 해보니, 세 버전 정도로 나뉘었다.
'빛'에 관한 시안들(기하학) -> 진중함을 주는 블랙과 빛을 가시화시킬 수 있는 옐로우를 이용해 그라데이션화.
'사랑'과 '연합'에 관한 시안들 -> 차별화를 줄 수 있으며 강렬함과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레드 컬러
'하늘'과 '확장'에 관한 시안들 -> 기존 노무법인이 주로 쓰는 청색이 아닌, 조금 따뜻한 느낌의 민트 컬러
이렇게 정리하여 풀어내어 보니, 아래와 같은 시안들로 구성되었다.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은 고객사 측에서 피드백이 온 후에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일단 시안을 보냈다.
고객사에서는 세번째 시안을 선택한다는 회신과 함께 몇몇 수정 사항 요청을 보내주셨다. 기존 로고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특징이 있었는데, 로고가 아무리 리뉴얼되어도 유지하고 싶은 부분이었던 것. (이 특징은 훗날 다른 로고 작업을 진행할 때 유용하게 사용하게 된다) 또한 추후 법인명의 변경(국제온누리노무법인 -> 온누리노무법인)에 따른 로고명 변경을 미리 요청하셨다.
주신 수정사항과 더불어, 추후 기업에서 로고 사용 시 주의해야 하는 부분과 컬러 기입, 폰트 사용 가이드 등을 기입하여 작업을 마무리했다. B.I 작업은 그냥 로고만 디자인하여 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규칙 안에서 기업 컬러와 문서 폰트, 여백의 크기 등 전체적인 디자인가이드를 제공한다. 이 가이드를 통해 브랜드는 통일성을 유지해 나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당장의 결과물보다 어쩌면 이 규칙이 더 중요하다.
선택된 로고와 가이드를 다시 돌아보니, 법인에 방문했을 때 잔잔히 들리던 음악이나 인테리어, 담당자님의 느낌 등이 반영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들었던 주관적인 느낌은 '따뜻함'과 '전문성'이었는데, 만들어진 가이드도 과연 그런 인상을 주었다. 작업 시에 주관적인 요소는 의식적으로 반영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브랜드의 아이덴티티가 어느정도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이 아이덴티티를 반영한 인쇄물을 만들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