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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Dec 05. 2019

삼킨 말들

엄마가 된 여성의 말하기와 글쓰기


아이를 낳고 제일 먼저 부딪친 문제는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단 것이었다. 제왕절개 수술을 하고 둘째 날부터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는데, 마음속에서 일고 있는 어지러움과 울렁임을 말로 하기가 힘들었다. '호르몬의 급격한 변화'라든가 '산후우울' 같은 준비된 말들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런 선명한 말들로는 담을 수 없는 감정들이 있었다. 모성애에 대한 신화가 공고한 세상에서 아이를 안고 행복에 겨워하지 않는 엄마가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언어의 빈곤이 곧 존재의 빈곤이라면, 현재의 나를 설명할 수 없는 나는 무척이나 취약한 상태에 있었다.


어쨌거나 선명한 만큼 사람들이 가장 쉽게 이해하고 납득하는 말이기에, 친구나 가족에게 내가 겪는 감정적 어려움을 간단히 '산후우울'로 정리해 이야기하곤 했다. 실제로 호르몬의 변화와 회복되지 않은 몸 때문에 생겨난 어려움도 컸기 때문에 맞는 말이긴 했다. 다만 전부가 아닐 뿐. 사람들은 산후우울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누구도 아기에 대한 내 사랑을 의심하거나 내 의지를 탓하지 않았다. 이렇게 안전한 기댈 말이 있어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 말도 없던 시절엔 대체 여성들이 어떤 말을 빌려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수 있었을까. 아니, 힘들다고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아기 얼굴만 봐도 행복하지 않아?"라고 해맑게 묻는 세상 앞에서. 엄마는 우릴 키울 때 힘든 줄도 몰랐다고 하지만, 고통을 인식하고 가시화할 언어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아빠는 내가 쌍둥이나 다름없는 연년생 둘을 키우는데 너희 기저귀 한 번 갈아 준 적이 없다"를 비롯해 엄마의 여러 증언들을 봤을 때 힘들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자꾸만 주저앉는 말하기


한 달은 매일 울고, 한 달은 깊은 바다 속에 잠겨 있는 듯한 기분으로 지낸 뒤에야 다시 예전처럼 숨을 쉴 수 있었다. 아기를 돌보는 일에 조금씩 적응해 갔고, 아기를 낳고 못 하던 일들을 남편이 퇴근한 후에 조금씩 해 나갔다. 아기가 태어난 지 8개월이 된 지금은 아기를 돌보면서 집안일까지 제법 여유롭게 한다. 남편은 '돕는' 게 아니라 자기 일로서 아기를 돌보고, 더불어 나도 돌본다. 하루 종일 잠만 자던 신생아는 요즘은 며칠 단위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 나를 놀라게 한다. 아기가 나를 보고 웃을 때면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리 좋아해 주십니까' 황송한 마음에 벅차다. 어떻게 보나 행복이란 말에 가까운 상태다.


그렇지만 공원에서 아기와 산책하다 마주친 할머니들께서 "아기 낳고 키우는 게 제일 기쁨이지" 하시며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낼 때 멈칫한다. 어떻게 지내느냐는 물음에 떠오르는 여러 말들을 꾹 누르고서야 잘 지낸다고 답한다. 누구에게든 내 모든 걸 나누는 일은 불가능하다지만 아기를 키우는 일에 있어선 삼키는 말이 더욱더 많아진다. 내가 미처 느껴 보기도 전에 온 세상이 합심하여 내가 나의 경험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들이밀고, 늘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는 그 말들 앞에서 자꾸만 나의 말하기는 주저앉는다. 그리고 대개 그 말들이란 엄마 됨, 부모 됨에 대한 이 사회의 관념과 통한다. 공원에서 만난 할머니들의 말이 그러하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말이 그러하고,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그러하고, 자식을 낳은 게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이라는 말이 그러하다. 그 말들이 도저히 내 말 같지 않은 나는 사람들 앞에서 자주 할 말을 잃는다. 물론 언젠가 내가 그 말들을 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잘 지낸단 말에 구겨 넣은 마음들


어떻게 지내느냐는 물음 앞에 삼켜 버린 말들을 떠올려 본다. 나는 아기를 볼 때마다 내가 한 존재를 낳고 키우는 일이 신기하고 뿌듯하다. 오동통한 몸을 껴안고 뒹굴거나 숨을 내쉬는 아기의 조그만 입김을 느낄 땐 온몸으로 행복하다. 아기와 앞으로 함께 만들어 갈 삶을 기대하다 보면 사는 게 도저히 지겹지 않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아기에게 기민하게 반응하느라 모든 일들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쪼개듯 하는 게 아쉽다. 아기를 키우는 이 시간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경력'이 되지 못할 것에 불안하다. 육아와 가사노동을 여전히 하찮게 보는 사회에 분노하면서도 나 역시 그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해 작아진다. 나는 즐거우면서 우울하고,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푹 내려가길 반복한다. 이것도 내 마음, 저것도 내 마음인 혼란의 한복판에서 그래도 중심을 잡으려 애쓰며 다만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냐면, 바로 이렇게 지내고 있다.


잘 지낸다는 말에 다 구겨 넣은 마음들을, 아기 얼굴만 봐도 행복하지 않느냐는 말에 스쳐지나가던 순간들을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풀어가 보려 한다. 내 몸으로 겪어 내고 있는 이 시간들을 나의 눈으로 바라보고, 나의 언어로 기록하려 한다. 언제나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는 세상의 말들에 내 느낌과 경험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이상적인 어머니 상에 압도되지 않고 내 나름의 엄마 노릇을 꾸려 가기 위해서, 그리고 나처럼 어디선가 하고 싶은 말들을 삼키고 있을 누군가와 닿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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