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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Jun 06. 2020

누구도 설득할 필요 없는 이력서를 쓴다면

줌마네 엮음, 《이력서를 쓰는 밤》을 읽고


공무원이면 공무원에 맞게,
회사면 그 회사가 바라는 인재상,
이렇게 그들의 쓸모에
나를 맞춰서 각색을 하게 되죠.
하지만 우리 삶을 구성하는 일들은
그보다 훨씬 넓고 다양하잖아요.



이력서 앞에 서면 작아진다. 내 삶은 한순간도 멈춘 적 없지만 이력서 위에서 어떤 시간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아기를 키우며 보낸 1년은 아마 이력서상에 빈칸으로 남겨질 것이다. 이력서가 요구하는 양식에는 학력과 자격증과 점수로 인증받지 못한 경험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으니까. 이력서는 그런 방식으로 무엇이 이 사회에서 ‘가치 있는’ 일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이력서가 취업할 때만 쓰고 말 특정한 문서 양식에 그치지 않고 내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양식이 되는 건 그래서일 테다. 사실상 나는 늘 이력서를 쓰면서 산다. 살다가 문득 이력서에 쓸 수 있는지 여부로 내 경험의 가치를 저울질하는 자신을, 이력서에 쓸 수 있을 만한 경험들로만 삶을 채우려는 자신을 발견한다. 줌마네에서 엮어 낸 작은 책 《이력서를 쓰는 밤》은 그동안 우리가 해 온 이러한 이력서 쓰기가 자기 삶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길들여지는 과정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길들여지면 삶도 길들여진다는 걸 이력서 밖에서 살아가는 동안 절절히 느낀다.


아쉽게도 판매하는 책은 아니다.


《이력서를 쓰는 밤》에서 서른 명의 여성들은 이력서에는 차마 담을 수 없었던, 그러나 지금의 자신을 만든 크고 작은 경험들을 모아 각자의 연대기를 쓴다. “그들의 쓸모에 나를 맞춰서 각색”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기 삶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1977년에 결혼한 뒤 쭉 전업주부로 지내온 듯한 한 참가자는 왼쪽에 간단히 자기 이력을 기록한 뒤 옆쪽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녀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제목 아래 망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일단 해 보는 자신을, 분노할 줄 아는 자신을, 매일 새벽 미사를 드리는 자신을 쓴다. 회사에 내는 이력서였다면 그녀의 삶은 ‘경력 없음’으로 쉽게 요약됐을 것이다. 그러나 삽질의 기억까지 보듬어 안는 이력서를 다른 여성들과 함께 쓰면서 그녀는 그런 성의 없는 시선을 폴짝 뛰어넘는다.


서른 명의 이력서를 읽다 보면 어린 시절부터 어떤 꿈을 가져서 그것을 일관되게 추구해 나갔다는 식의 서사는 거의 없다. 나라는 사람은 계속 바뀌고 인생은 내가 만들지 않은 사건에 의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지만 사회적 경력이 멈추고 바뀌는 순간에도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다른 경험들은 계속해서 이어져 가고 있었다. 나에겐 그 사실이 너무 큰 위로가 되었다. 책을 만들다 전혀 관련 없는 회사에서 다시 신입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곧잘 이전의 회사 경력과 다음의 회사 경력이 매끈하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 삶을 전개가 엉성한 드라마를 보듯 못마땅해하곤 했다. 그런데 사실 구멍도, 헛발질도 없는 완성도 높은 삶을 사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무엇보다도 삶을 이루는 수많은 일들 중 단지 회사 경력만을 가지고 내가 잘살았느니 못살았느니 논하는 건 너무 편협하고 인색한 거 아닐까.


이력서를 앞에 두고 ‘그동안 대체 뭘 하고 산 거야’라고 스스로를 한심해할 때, 육아휴직을 하고 하루 종일 아기를 돌보면서도 ‘하는 일 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고 불안해할 때, 나는 누구의 시선으로 내 삶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을 잠재적 고용주로 대하던 취준생 시절처럼 나는 항상 내 안에 고용주의 시선을 품고 살았던 것 같다. 그에게 내 쓸모를 납득시키기 위해 종종댔다. 그러나 이 책의 여성들처럼 나도 누구도 설득할 필요 없는 이력서를 쓴다면 그때도 나는 ‘그동안 대체 뭘 하고 산 거야’라며 스스로를 타박하게 될까. 내가 지금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낸다고 불안해할까. 어쩌면 누구도 설득할 필요 없는 이력서란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한 글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펴낸 '줌마네'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면

https://cafe.naver.com/zooma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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