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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Jan 18. 2020

서로에게 지어 주는 집

아기와 호의 속에 사는 일에 대하여

“여기 앉으세요.”


아기띠를 하고 처음 혼자 지하철을 탄 날이었다. 목적지까지는 다섯 정거장. 10분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라 서서 가려는데 그 짧은 사이에 두 분이 내게 자리를 양보해 주려 했다. 곧 내릴 거라 괜찮다며 공중에 손을 휘젓고는 고맙습니다, 감사 인사를 크게 했다. 노약자석에 앉은 어르신들도 빈자리를 가리키며 잠깐이라도 앉으라는 손짓을 연신 하셨다. 나는 당신을 보고 있지 않다, 나는 당신을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암묵적인 신호를 통해 비좁은 열차 안에 사람들과 겨우 함께 공존하는 데 익숙하던 내게 이는 낯선 풍경이었다. 사람들은 내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과 아기를 보았고, 당신과 아기가 서서 가는 게 신경 쓰인다고.


나쁜 말들의 힘을 누그러뜨린 건


아기와 본격적으로 외출을 시작하면서 사실 겁이 났다. 여전히 ‘맘충’이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고 있었고, ‘노키즈존’을 둘러싼 논쟁도 계속되고 있었다. 노키즈존 관련 기사 댓글에는 우리도 모두 한때 아이였고, 따로 격리시키지 않고 함께 공간을 공유하는 어른들의 관용 속에서 타인과 어울려 살아가기 위한 태도와 예의를 배울 수 있었다는 노키즈존 반대 측 의견과, 자신의 가게에 어떤 손님을 받을지 말지는 사업자의 영업의 자유이며, 소비자로서 식당이나 카페에서 내가 보낼 시간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고, 여전히 공중예절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들이 너무 많다는 찬성 측 의견이 팽팽하게 부딪쳤다. 그런데 많고 많은 댓글 중 내 마음에 오래 살아남아 힘을 발휘한 건 내가 동의하는 의견도, 내가 동의하진 않지만 이해가 되는 의견도 아닌 바로 이런 말들이었다. ‘네 새끼 너나 예쁘지.’


나쁜 말들은 왜 힘이 셀까. 아기와 함께 어디를 가든 그 말이 계속 나를 따라다녔다. 마트에 가서도, 카페에 가서도, 식당에 가서도, 지하철을 타서도 문득 그 말이 귓가에 울렸다. 그러면 나와 아기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지 모를 누군가가 그려지고, 아기의 작은 칭얼거림에도 마음이 다급해졌다. 나와 아기의 뭔가가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진 않을까 종종대며 자기 검열이 이루어졌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내뱉은 무심하고 날선 말들이 아기와 함께 앞으로 살아나갈 세계에 대한 내 인식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 나쁜 말들의 힘을 조금씩 누그러뜨린 건 얼굴을 마주한 사람들의 호의였다. 남편과 아기와 꽤 먼 길을 지하철을 타고 간 날, 남편이 자꾸 칭얼대는 아기를 달래려고 잠시 자리에서 일어서 있자 그 자리에 혹여 누가 앉을까 싶어 앞에 굳건히 서서 자리를 지켜 주었던 중년의 여성들. 유모차를 끌고 공원에 산책을 가면 아기와 나에게 꼭 말을 걸어 주시는 할머니들. 아기가 신기한 듯 빤히 쳐다봐도 환하게 웃어 주던 옆 테이블의 연인. 조용한 카페에 잘못 들어가 눈치를 보고 있던 내게 마치 그러지 말라는 듯 노트북으로 일을 하다 말고 아기 좀 봐도 되냐며 내게 우호적인 신호를 보내 준 사람. 우연히 한 자리에 있게 된 사람들이 꺼내 보여 준 호의가 내가 감지하는 세상의 온도를 높여 주었다. 그리고 그 호의들은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선 나쁜 것들을 없애 가는 것만큼이나 좋은 것들을 현실에 보태 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새삼스런 사실을 깨닫게 해 줬다.


귀엽고 예뻐서가 아니라


물론 현실을 마냥 낙관적으로만 바라보긴 어렵다. 나는 나와 아기가 겪고 있는 호의가 일정 정도 아직 나의 딸이 돌도 안 된 아기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외적으로 한창 귀여울 때이자 시끄럽게 말을 하거나 뛰어다니며 ‘미운’ 짓을 하지 않는 시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을 갖고 있다. 사람들의 친절과 배려가 진실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작고 귀엽고 우리에게 호감을 표하는 대상에게 인간의 마음은 더 우호적으로 움직이기 쉬우니까. 아직은 아기가 낯을 별로 안 가려서 눈을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쉽게 방긋 웃어 보이지만, 아기가 좀 더 자라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울고 식당에서 지루함을 못 견뎌 투정을 부린다면 그때도 사람들은 지금처럼 관대하게 아기를 바라봐 줄 수 있을까. 나는 지금과 같은 온도로 세상을 경험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요즘 나는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을 향한 우리 사회의 호의가 좀 더 단단한 기반을 가진 것이 되면 좋겠단 생각을 자주 한다. 작고 귀엽고 예뻐서가 아니라, 말을 잘 듣고 순해서가 아니라 동등한 한 사람의 동료 시민으로서 아기와 어린이들이 사람들에게 배려와 환대를 받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이때의 환대란 아이들을 ‘예뻐하는’ 개인의 감정에 기댄 행위가 아니라 이 사회에 한 사람의 자리를 만들어 주고자 하는, 때론 내 감정과는 반대로 가기도 해야 하는 의지적인 행동이다. 자꾸만 특정 연령대의 사람들을 균질한 특성을 가진 덩이로 묶어 배제하는 일을 멈추고, 함께 살아가는 일은 함께 살아가는 자리에서만 배울 수 있단 당연한 사실을 상기하는 일이자, 서툴고 힘이 없는 이들을 더 쉽게 미워하는 우리 마음의 습관에 지지 않으려 애쓰는 일이다. 댓글을 쓴 이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네 새끼 너나 예쁘지’란 말은 어찌 보면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바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맞다. 내 새끼는 당신에게 예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안 예쁘고 꼴 보기 싫어도 그렇게 사람을 쉽게 치워 버리려 해선 안 된다. 우리가 인간이 예뻐서 인권을 보장하지 않듯이 말이다.


사람들의 호의에 기대 건너갈 수밖에 없는 시절을 살면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존재 없이는 살 수 없는 취약한 존재임을 날마다 깨닫는다. 꼭 아이를 낳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그걸 절실히 느끼는 시기가 온다. 우리가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호의가 상대가 호감을 주는 모습이 아닐 때 언제든 거둘 수 있는 얕은 무언가가 아니라, 함께 힘을 모아 서로에게 지어 주는 튼튼한 집 같은 것이 되면 어떨까. 그 튼튼한 집에서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가 조금씩 더 안전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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