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가 아닌 옆을 보게 한 사람들
어린 시절, 누군가로부터 칭찬을 받으면 꼭 내 주위로 동그랗게 작은 자리가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포크로 사과를 찍어 건네는 내게 한 어른이 ‘싹싹하다’고 말했을 때도, 중학교 시절 단발머리에 검은색 머리핀을 한 내게 담임교사가 ‘모범생 같다’고 말했을 때도 그랬다. 칭찬은 나를 둘러싼 세상이 내게 우호적이라는 신호, 내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신호로 여겨졌다. 나는 어른들이 만들어 주는 그 안전한 자리가 좋아 부지런히 그들 맘에 들고자 애썼다.
그건 정말 안전한 자리였을까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나는 여전히 어른들의 시선을 열심히 좇았다. 성적순으로 반을 나누고 다른 대우를 하겠다는 학교 정책도 성실히 따르고, 친구들을 때리거나 폭언을 일삼는 교사들도 욕하지 않았다. 그런 내게 친구 A가 말했다. “너 중학교 때 진짜 재수 없었어.” 중3 때 같은 친구 무리에서 지냈지만 그렇게 친하지 않다가 고등학교에 와서 단짝이 된 A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듯 웃으며 그 시절의 나를 회상했다. 부반장이라고 맨날 새초롬한 얼굴로 학급일지를 품에 껴안고 다니던, 착한 척하던,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거 같다. 단어 시험을 본 뒤 틀린 개수대로 체벌을 하던 영어교사에 대해 성토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내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을 때 “넌 선생님 욕 안 하제?” 하고 내 침묵을 꼬집은 것도 A였다.
그즈음 나도 내가 안전한 자리라 믿었던 곳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 누구는 웃겨서, 누구는 착해서, 누구는 지오디 팬이어서, 누구는 키가 커서 각자 다양한 이유로 가지게 된 자리는 고등학교에 오자 사라졌다. 대신 각자가 떠안은 시험 등수가 자기 자리가 되었다. 성적을 이유로 어떤 이들에게만 새로 지은 건물의 깨끗한 독서실과 추가적인 수업이 제공되었고, 같은 교사가 수업 시간에 존 학생에 대해 어떤 반에선 관대하게 넘어가고 어떤 반에선 학생의 공책까지 찢어 던지며 화를 내는 일이 수시로 벌어졌다. 사람에 대한, 그것도 한창 자신과 세상에 대한 그림을 만들어 가고 있는 어린 사람들에 대한 이토록 다른 대우가 과연 옳은 것일지 의문이 일었다. 그건 내가 혜택을 받는 쪽에 처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교사들이 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게 보여 주는 다정과 호의에는 분명한 조건이 있었고, 그건 그들이 칭찬과 인정으로 만들어 준 이 자리가 그들 뜻에 따라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걸 의미했다.
나는 A의 말들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론 시원했다. A의 말들은 날 향한 비난이나 공격이 아니었다. 내가 아픈 건 어른들에게 잘 보이고자 애쓰던 내 모습들에서 비로소 굴욕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의심 한 톨 없이 필히 지고야 마는 게임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에 대한. ‘싹싹하다’거나 ‘모범생 같다’는 말이 왜 ‘칭찬’인지에 대해서도 그제야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 말들은 동등한 관계에서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위계가 있는 관계에서 한쪽의 손만 철저히 들어 주는 말, 한쪽의 생각은 묻지도 않는 말이었다. 나를 길들이기 위한 말들이었지 나를 해방시키는 말들이 아니었다.
제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내던 친구들
나와 달리 A는 어른들의 칭찬을 갈구하지 않았다. 여학생을 두고 성희롱 발언을 하는 교사에게 들리게끔 “미친놈이”라며 노려보는 사람이었고, 교사 앞에서든 누구 앞에서든 태도와 말투, 눈빛에 차이가 별로 없었다. A는 자기가 동의할 수 없거나 화나게 하는 것들을 주변으로 밀어내며 자기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 A뿐만이 아니었다. A와 함께 친해진 친구 B도 그랬다. B도 교사나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B는 우리가 모르는 외국 가수의 음악을 듣고 우리는 처음 듣는 영화를 보고 우리가 제목만 들어 본 소설을 읽으며 그저 고요하게 자기만의 울타리를 만들었다. 남의 칭찬에 기대지 않고도 자기를 긍정하고 지킬 수 있는 길이 존재한다는 걸, 나는 친구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그런 친구들 곁에 있었던 덕분에 고등학교의 남은 시간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해방감 속에서 보낼 수 있었다. 우리를 존중하는 교사에게는 존중을 표하되 그렇지 않은 교사에게는 똑같은 자세로 그를 대했다. 건방지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그런 반응이 내게 더 이상 타격을 주지 않았다. 나에겐 친구들과 만들어 가는 연대감이 더 소중했다. 그리고 좋게든 나쁘게든 나를 평가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에게 나 역시 그런 시선으로 응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더없는 힘을 줬다.
위가 아닌 옆에 서는 일
시간이 흘러 취준생이 되었다. 취준생이란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야만 이 사회에 자기 자리 하나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을 의미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해 대학에 다니는 동안 여기저기 찧고 까불며 내 마음대로 살던 패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는 한껏 쪼그라들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잠재적 면접관처럼 대했다. 무엇이 나를 고용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게 할지에 따라 말과 태도를 고르고, 당신들의 회사에 결코 시비를 걸지 않을 순응적인 사람이라고 나를 포장하는 자기소개서를 썼다. 고등학생 때 교사들 앞에서 당당하게 굴었던 건 사실 내가 그렇게 해도 그들이 나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 것임을 알아서가 아니었을까. 사람들 틈에서 준비된 일꾼으로 보이려 종종 대다 마침내 내 방에 돌아와 혼자가 되면 그런 생각들을 하며 자괴감에 휩싸였다.
그러다 평소 희망하던 일을 하는 회사에 취업을 하게 됐다. 내가 원하는 상대가 나를 선택해 줬다는 감격이 꽤 오래 나를 휘감았다. 나는 그곳의 선배들이 술을 좋아하니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긍정적인 청년을 원하니 긍정적인 청년이 되었다. 인정받고 싶어서 전전긍긍이었다. 물론 박봉과 잦은 야근에 불만이 일기 시작했지만 그건 내가 혼자 삼킬 문제라 여겼다. 무엇보다도 회사에는 그것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 공간의 유일한 신입이자 20대였고, 선배들은 이전 직장에서부터 함께 일한 사람들이라 유대감이 깊었다. 한 선배가 창립 1주년을 맞이해 쓴 글에 회사 구성원들 중 내 이름만 언급되지 않았을 때, 나는 여전히 여기에 아직 온전한 내 자리는 없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한 동료가 새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C는 경력직으로 들어왔고 선배들과 이전 직장에서 같이 일한 사이였다. 선배라 부르는 나에게 C는 선배는 무슨 선배냐며 그냥 이름으로 자기를 불러 달라 했다. 얼마 안 있어 서로 쓰던 존댓말도 거두고 C와 나는 반말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C는 먼저 일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나를 평가하려 하거나 선배들의 인정을 두고 나나 다른 동료와 경쟁하지 않았다. 애초에 우정, 환대, 협동을 기치로 내건 조직이고 구성원이 6명밖에 안 돼서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는 충분히 나에게 선배나 중간 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선배들도 그에게 그런 역할을 주고자 했으므로. 그러나 C는 오히려 철저하게 나와 같은 위치에 섰다. 그리고 나와 같은 위치성을 공유하는 사람이 생기고서야 나는 비로소 안심하고 월급이나 처우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랬던 것처럼 눈에 보이는 문제들에 눈 감고 ‘착한’ 구성원이 되고자 애쓰던 일을 멈췄다. 그 결과로 회사에 월급을 올려 달라는 요구도 하게 됐다. 한 선배는 그 과정에서 내가 ‘변했다’고 말했다.
용기는 옆에서 나온다
C가 선배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그들에게 인정받고자 애쓰는 사람이었다면 내 첫 직장생활은 꽤 고달파졌을 것이다. 그리고 선배들은 나도 C도 더 다루기가 쉬워졌을 것이다. ‘윗사람’의 권력은 ‘아랫사람들’이 흩어져서 서로 위에 잘 보이려 애쓸 때 효과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둘이서 뭉친 덕분에 선배들은 우리를 예전보다 좀 더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 시절 내가 선배들을 대한 태도나 행동, 싸운 방식에는 성찰하고 반성할 부분들이 많지만, C가 내게 선배 노릇을 하지 않겠단 뜻을 밝혔을 때 그를 적극적으로 친구로 받아들인 것은 정말로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나는 선배의 말대로 변했다. 그런데 그게 내 마음에 들었다. 회식에서 먹기 싫은 술을 억지로 마시지 않고 ‘너 그러면 자리 뺀다’는 농담에 정색할 수 있게 된 게.
어린이, 청소년, 청년, 거기에 여성이란 정체성까지 더해지면 남의 칭찬에 잡아먹히기 쉬운 상태가 되는 것 같다. 특히나 어린 시절엔 그런 칭찬들로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일들도 많다. 물론 세상에는 누군가를 성장시키거나 한 사람이 삶의 막힌 부분을 뚫고 나갈 힘을 주는 좋은 칭찬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세상엔 한 존재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거나 사회 통념을 재생산할 뿐인 칭찬들도 도처에 널려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건네는 칭찬이 대개 그렇다. 얌전하다거나 싹싹하다거나 애교가 있다거나 요즘 젊은이답지 않다거나 하는 칭찬들. 그런 칭찬을 듣고 나면 항상 끈적끈적한 뭔가가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나는 사실 그런 모습으로 지내는 게 편안하지 않은데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은 압박감, 그래야만 저 사람이 나를 계속 우호적으로 대할 것 같은 불안함.
그런 마음들을 작게 접어 던져 버릴 때마다 조금씩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꼭 그럴 용기를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앞서 ‘고등학생 때 교사들 앞에서 당당하게 굴었던 건 사실 내가 그렇게 해도 그들이 나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 것임을 알아서가 아니었을까’ 의문을 품었지만,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내가 마음을 꽉 채운 칭찬받고 싶은 욕구들로부터 해방됐던 순간엔 그저 그 일을 함께하는 친구들이 옆에 있었다. 분노하는 것이 같고 웃지 못하겠는 농담들이 같은 사람들이. 내게 없던 용기는 그런 것들을 안전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옆에 있을 때, 윗사람의 눈치가 아니라 옆 사람의 얼굴을 볼 때 간신히 생겨났다.
돌이켜 보면 나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갈구하고 그를 위해 대세에 따르는 데 더 익숙한 사람이다. 직장에선 상사가 무얼 좋아하는지에 귀가 솔깃하고, 명절에 남편의 할머니 댁에 가면 친척 어른들이 분명 세 명의 손주 며느리를 비교할 텐데 하는 생각에 초조해진다. 이렇게 여전히 수시로 그런 마음들이 울컥 올라오지만 이제 자동적으로 그 마음을 따라가지 않으려 애쓴다. 그리고 동료를 찾는다. 상사가 정당한 업무 지시 외에 추가적인 뭔가를 눈치껏 해 주길 기대할 때 같이 눈치 없는 사람이 될 동료를 찾고, 할머니 댁에서 계속 할 일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이려는 서로를 끌어 앉혀 함께 쉬자고 말할 동료를 찾는다. 내 친구들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기댈 구석이 되어 주길 바라면서. 더 나아가 한 가지 더 다짐해 본다면, 내가 나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경험이 적은 사람에게 칭찬이라며 함부로 말을 던지는 게 아니라 다만 그들의 좋은 면들에 영향을 받고 고마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보다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 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