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보는 걸 좋아했다.
게임이나 유튜브도 없으니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놀잇감이 되는 시절이었다.
바닥에 동아대백과사전을 펼쳐놓고 좋아하는 그림과 사진을 골라 보는 놀이를 했다.
화려한 르네상스 시대 그림이나 꽃, 보석 사진 같은 걸 자세히 보곤 했다.
그때 처음으로 내 탄생석이 오팔이라는 걸 알았는데
왜 다이아몬드나 사파이어처럼 예쁜 보석이 아닌가 슬퍼했던 기억이 난다.
백과사전에서 한 장씩 알려준 세상은 어른이 된 후에야 알 수 있을 것 같은 미지의 세계였다.
지금은 궁금한 게 있으면 검색창에 입력만 해도 모든 정보가 나와서
내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는 것을 마주치고 나서야 내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앎은 점점 넓혀지는 원 같다고 한다. 그 원의 지름이 커질수록 내가 모르는 바깥의 원 바깥의 닿은 세상도 커져서
알면 알 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많아진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원 안의 세계, 내가 알아야 하는 원과 맞닿은 세계, 내가 모르는 원 밖의 또 다른 세계가 합쳐져야 비로소 내가 사는 세상이 된다.
영화 <행복한 사전>은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엔 백과사전에 모든 것이 있는 줄 알았지만,
사실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 중 사전에 들어가야 하는 것을 고르는 작업이 있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이 의미를 찾을 만한 것, 그 시대에 기록되어야 하는 언어, 그 시대에 의미를 계속 질문받아야 하는 존재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람들을 통해 사전에 실릴 단어들이 골라지고, 뜻이 정리되고, 사전이 채워진다.
<행복한 사전>의 소설 원작의 제목은 <배를 엮다>다.
광활한 언어의 바다, 세상을 건너기 위한 사전이라는 배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그렇다.
주인공 마지메는 종종 바다에 빠지는 악몽을 꾼다.
그 바다를 제대로 건널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 바다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두려움들.
원 밖의 세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채 원 안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는 막막함이 그를 괴롭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전편집부의 사람들은, 생각이 타고 항해할 배를 만들기 위해,
단어들을 열심히 고르고, 찾아내고, 엮어서 세상에 내놓으려 한다.
4만 자의 단어들 중에 대부분은 예전부터 사전에 실려왔을 일상적이고, 명확한 단어들일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은 새로이 만들어진 단어들을 찾고,
이미 존재하는 단어들의 의미들을 정리하고, 사람들이 찾게 될 단어들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단어는 사전이라는 세계 안에서 명확한 의미로 존재하고,
둥둥 떠다니는 단어들은 사전이라는 배에 실려 세상을 설명해준다.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된 주인공은 '사랑'이라는 단어의 뜻풀이를 맡는다.
그가 고민하고 정리한 사랑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사랑 愛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자나 깨나 그 사람 생각이 떠나지 않고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게 되며
몸부림치고 싶어지는 마음의 상태
사랑의 모양과 경험은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이 정의하기 어려운 단어의 뜻에 반대할 수도 없다.
사랑의 어떤 순간은 정말 주인공의 묘사와 닮았으니까.
마음의 상태를 바꾸는 일이니까 말이다.
'오른쪽'이라는 관념적 기준을 설명하는 데에 수많은 사전이 다 각자의 뜻을 가진다.
'사랑'은 더 많은 뜻과 정의로 모두에게 남아있지만, 다들 조금씩은 닮아있는 것들을 모아 뜻이 될 것이다.
감정과 행동, 생각과 실체에 이름을 붙이고 그 뜻을 생각하는 일은
상상보다 더 복잡하고, 숭고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전은 15년이 지나 비로소 완성된다.
그 사이 세상도 변하고, 사람들도 변했겠지만
세상을 설명하려는 15년간의 의지는 뒤쳐지거나, 변질되지 않아 정말로 '배'가 되었다.
사전이 필요한 시절이 있었다.
두툼한 국어사전엔 사락사락 넘어가는 아주 얇은 종이에 쓰인 생전 처음 보는 낱말들이 있었다.
영어사전은 항상 책상에 놓여있기만 하다가, 언젠가 전자수첩 (!)이라는 것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요새도 애매한 단어는 검색해서 그 정의를 찾는다.
사전이라면 그 사전이 정리한 한 종류의 정의만 있을 텐데
검색창에는 수많은 뜻이 함께 떠돌고 있어서 더 모르게 될 때도 있다.
세상을 건널 배를 만들지 못하고 정처 없이 표류하기 쉬워져 버린 시대를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글을 쓰는 순간 내가 골라내는 단어, 내가 엮어내는 문장이 얼마나 읽는 사람들에게 가 닿는지 모르겠다.
계속 오르내리며 길어진 문장을 줄이고, 최대한 내 생각을 닮은 말로 바꾸려 애쓴다.
하지만 온전히 내 생각을 표현하지도, 그렇게 와닿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을 거다.
어쩌면 사전이 세상을 건너는 배를 만드는 일이라면,
우리의 글과 노래는 서로의 세상을 오가는 작은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는 일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닿을 힘도 약하고, 바람도 없지만 끝없이 접어 날리며 연결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닮은 일인 것 같다.
내가 모르는 세상에 닿도록, 내가 알고 싶은 세상과 사람들에게 닿도록,
제대로 보고, 읽어서 생각의 끝과 끝에 가 닿는 일을 계속해나가야겠다.
깊은 밤을 날아갈 종이비행기를 계속 계속 접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