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유독 길다.
아침은 일찍 시작되고, 더위에 잠 못 드는 밤도 길어
실제로도 깨어있는 시간이 다른 계절보다 더 긴 것 같다.
게다가 여름의 습도 때문에 여름의 기억은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 후덥한 공기와 흐르는 땀까지 기억을 둘러싸고 있어서 여름의 기억은 더 진할 수밖에 없고,
여름의 공기가 돌아오면 기억도 같이 돌아오게 되는 걸지도.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여름이 되면 생각나는 영화다.
왠지 여름이 되면 이 영화의 배경음악을 듣게 되고, 파란 포스터를 떠올리게 된다.
타임리프를 다룬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은 대개 하지 못한 일들, 전하지 못한 이야기 때문에 가고 싶은 과거를 고른다.
나 또한 일어난 일을 바꾸는 것보다 하지 못한 순간을 되뇌게 하는 과거를 고를 것 같다.
이미 해버린 일들은 어떻게든 내 시간 속에서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는데 미처 하지 못한 말, 포기해버린 일들은 과거에 계속 머물러 있으니까.
수많은 순간 중 단 하나를 골라 돌아가 볼 수 있다면 나는 언제로 돌아갈까. 돌아가서 바꾸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맴도는 기억은 언제일까.
영화의 주인공, 마코토의 타임리프 방법은 달리기다.
있는 힘을 다해 달리면 원하는 시간으로 뛰어들 수 있다.
마코토는 소소하고 별 것 아닌 것들을 위해 수십 개의 과거로 수십 번 달려간다.
소녀의 일상은 맛있는 메뉴, 쪽지시험, 노래방, 캐치볼 같이 예쁜 구슬로 된 기억이 이어진 목걸이 같고,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계속 그런 시간이 이어질 것만 같다.
지구를 구하는 일도, 세계의 평화를 위한 일도 아닌 작은 소녀가 만든 세계의 목걸이는
주어진 타임리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에야,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뒤늦게야 깨닫는 순간 '툭' 하고 끊긴다.
그렇게 바닥에 떨어진 시간들을 뒤로하고 숨차게 달려, 시간을 건너 단 한 사람을 위해 마지막 타임리프를 한다.
마코토의 마지막 질주는 유독 길고, 멀다.
2차원에 사는 주인공의 달리기가 그렇게 숨차고, 마르고, 간절하게 느껴져서 어딘가 저릿할 정도다.
나는 숨이 차서 더 길어 올릴 숨 한 조각 없을 만큼 달려본 적이 있었나?
그렇게 어딘가를,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 본 적이 있었나?
사실 그런 기억이 없다 해도 괜찮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지만 항상 결승선을 조금 앞두고 속도를 낮춰버리곤 했던 것, 진공 상태의 열망을 손 끝에서 놓쳐버린 느낌이 슬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조금 더 끝까지 달렸다면 달라졌을까. 한 번 더 달려봤다면 다른 시간을 꿰어낼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풀리지 못한 채 빈칸으로 계속 남아있겠지.
그래서 끝까지 달려서 시간을 뛰어넘지 못하는 지금의 나는 하지 못한 말을 남겨두는 것보다 지금 무언가를 남겨두는 일을 선택한다.
언젠가 시간 여행의 기회를 얻어도, 지금으로 돌아오지는 않기를 바라니까.
영화 속에서 말하듯 Time waits for no one. 이니까.
영화의 마지막, 치아키는 마코토에게 "미래에서 기다릴게"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거꾸로 달려도 시간은 앞으로 나아갈 거다.
하지만 지키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은 우리를 기다려 주리라는 믿음 덕분에,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으리라는 어떤 기대 때문에 여름날의 추억들을 한 페이지씩 넘겨 갈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 마지막 노래의 제목이 "변하지 않는 것"이었을까.
여름마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떠오른 작은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