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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안 Nov 16. 2020

히스토리 보이즈: 아이러니를 사랑하는 한 관객의 이야기

#06. 내가 사랑하는 연극

*스포일러 주의



<히스토리 보이즈> 끝났다.

사실 일주일 전에 이 이야기를 했었어야 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귀찮음)로 마지막 공연을 올린 지 일주일 만에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작가 알란 베넷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섞여있다고 알려진 이 극은 2006년 토니상 수상부터 2014년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 수상 등 그 극의 우수성을 꾸준히 증명해왔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극 내용은 늘 논란의 중심에 서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헥터 선생의 문제적 행동과 그를 그려내는 옹호적 시선이 주 이유였다.


내가 이 극을 처음 본 건 2019년 가을의 초입. 당시 할인을 받을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어서 2층 2열의 시야제한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극을 관람했다. 3시간 여의 러닝타임 이후 극장을 빠져나오면서 했던 생각은,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데?


이걸 기승전결에 맞춰서 스토리 분석을 할 수 있을까? 모든 인물이 한 서사의 해결을 위해 짜임새 있게 움직이고 있었나? 열두 명이나 되는 등장인물, 그중 절반은 교복을 입고 등장하는 탓에 누가 누군지 구분하다가 극이 끝났다.(심지어 구분에 다 성공하지도 못했다) 파편처럼 흩어진 스토리 조각을 손에 쥐고 얼떨떨하고 있을 무렵 극이 끝나버린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내게 '히스토리 보이즈'는 헥터가 성추행을 했고, 제대로 처분을 받기 전 우연한 사고로 죽어서 왜곡된 추모로 진실이 가려지는 이야기였다. 내가 생각한 극의 주제도 '역사는 얼마나 우연하게 발생하며 허망하게 쌓이는가' 따위의 메시지였다.


그리고 1년 후, 다시 <히스토리 보이즈>가 돌아왔다.

처음에는 극을 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안재영이 와버린 거예요... 뮤지컬 <전설의 리틀 농구단>에서 흐물흐물하기 그지없던 종이인형 안종우 선생님이 대치동 일타 강사 뺨치듯 똑 부러지는 어윈 선생님으로 온다는 거예요... 게다가 작년의 락우드였던 최정우도 온다는 거예요... 그럼 별 수 있나. 보러 가야지.

안재영이.... 나를 이렇게 처돌게 만들어서...


그렇게 나는 2020년 8월 중순, 다시 <히스토리 보이즈>를 만났고 한 달 동안 다섯 번을 내리 보았다. 중간에 다른 극을 끼워 보지도 않고 '히보' 이전에 '히보', '히보' 다음에 '히보'를 보고 다녔다. 미친 나날의 연속. 평일에 퇴근 후 잽싸게 달려가 청량리행 분당선 막차를 타고 종로5가역에 내리면 딱 극 시작 30분 전이었다. 다른 극보다 30분 일찍 시작하면서도 워낙에 긴 러닝타임 탓에 극이 끝나면 열한 시였다.


다른 극보다 훨씬 귀찮고, 힘들고, 길고, 심지어 처음에는 보고 이해하지도 못했던 극을 나는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

아직도 나는 <히스토리 보이즈>가 상을 여러 개를 받은 것과 상관없이, 좋은 극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막 내내 산발적으로 캐릭터를 보여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바쁜 탓에 2막에서 급하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마저도 하나의 중심 서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헥터의 성추행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과 이후 대처, 포스너의 '당사자성'에 관한 이야기, 데이킨과 어윈 사이의 묘한 기류 등이 한데 뒤섞여 2막을 꽉꽉 채운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긴밀하게 연결되기보다는 병렬적으로 나열되다 마지막 교통사고로 모든 것이 얼렁뚱땅 마무리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극을 좋아했던 이유는, <히스토리 보이즈>가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 때문이었다.

이 극의 등장인물은 모두 각자의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특히 린톳 선생은 이 아이러니를 가장 복합적으로 표현하는 존재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린톳 선생, 극 중간에 관객을 향해 대놓고 자신은 기능적인 인물이라며 열변을 토하는 린톳 선생, 하지만 도리어 그 발언으로 린톳이 더욱 기능적인 인물에 머무르게 되는 현상. 뜬금없이 주창하는 여자들의 역사는 그 발언 자체로는 사이다로 느껴지지만, 조금만 더 곱씹어보면 그는 극과는 융화되지 않은 별개의 이야기를 혼자 했을 뿐이다.

교장 선생님 역시 마찬가지다. 누구보다 헥터를 폄하하고 싫어하던 이 인물은, 헥터의 죽음 이후 추도사에서 과장된 눈물과 슬픔으로 헥터를 추모한다. 역시 추모는 망각하기 가장 좋은 수단이고, 추모가 사건의 본질을 가리지.


 아이러니가 좋았다. 관객이 극과 거리를 두고 의아함과 껄끄러움을 느끼는 순간이 좋았다.

내가 이 인물을 마냥 옹호할 수 있을까? 이 인물을 무조건 비판해도 괜찮을까? 어떤 질문에도 답할 수 없다. 헥터를 좋은 교육자라 칭하기에 그는 이미 많은 일을 저지르지 않았는가. 저널리즘에 가까울 정도로 '시소의 반대편'을 강조하던 어윈의 역사관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수 있을까. 누구보다 저널리스트를 '극혐'하던 스크립스의 미래가 저널리스트인 기묘한 이야기.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이킨이 중심처럼 보이려고 애쓰던 순간들. 그런 하나하나의 순간이 모여 캐릭터는 절대선 절대악의 평면을 벗어나 입체적인 인물이 되었다.


심지어 이 입체성은 관객이 극과 거리를 두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많은 관객들이 이 극을 비판한다. 헥터의 행동과 그를 미화하는 마무리에 대한 비판. 여성 인물을 활용하는 낡은 방식에 대한 비판. 그들의 감상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나는 이마저도 극의 의도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꿈보다 해몽일 수 있겠지만!

<히스토리 보이즈>는 카메라처럼 등장인물의 행동을 관찰하는 관조적 역할을 한다. 그러니 실제 있었던 일들이 늘 그렇듯 기승전결이 뚜렷하지도 않으며, 인물은 긍정적으로 보이다가도 비판할 만한 행동을 스스로 하곤 한다. 극은 관객에게 아무런 메시지를 주지 않는다. 그저 나열하고 보여줄 뿐이다. 관객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양면적인 모습을 전부 보여준다. 하여 인물에 대한 판단은 오롯이 관객의 몫이 된다. 문제적인 질문을 던지고 관객이 그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하도록 만드는 것. 놀랍게도 어윈의 수업 스타일과 닮아있는 셈이다.


나는 절대선과 절대악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고, 모든 사람은 하나씩 남들이 실망할 만한 구린 면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특히 인간의 찝찝한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을 좋아한다. 그게 가장 인간적이고 솔직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없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그 자리에 분명히 존재하는 인간의 성격을 마주해야만 하니까. 사람의 좋은 모습만 보고 싶은 욕심과 그 욕심을 도와주지 않는 인간의 껄끄러운 모습 사이에서 생기는 모순과, 그 괴리가 만들어내는 불편한 감정 모두를 나는 사랑한다. 변태 같다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히스토리 보이즈>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이 극은 필연적으로 관객에게 불편할 수밖에 없는 극이었다. 그건 극이 너무 현실을 적나라하게 조명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이었다. 사람들이 이 극을 보며 내리는 감상은 시간에 따라 변하겠지. 그렇게 <히스토리 보이즈> 오랜 시간 뜨거운 감자로 연극계에 남아있을 것이다. '낡고 빻은 '이라는 비판을 망토처럼 둘러메는 한이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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