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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ilee Apr 09. 2020

봉쇄령 일기

28_ 이야기에서 일기로. 






오늘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는데 

좁은 방에서 애플 팬슬을 잃어버려 무려 한 시간 반이나 거북이 자세를 하고 침대 틈과, 주머니 속, 서랍 등을 반복적으로 뒤져댔다. 그중 가장 의심이 갔던 침대 쪽의 이불을 털어대며 쉴 새 없이 찾았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 거울에 비친 내 모습과 대화할 정도였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 매우 허기진 나머지 방을 한참을 뒤지다 아래층에 내려가 떡볶이를 해 먹었다. 


그리고 혹시 안경을 바꿔보면 더 잘 보일까 안경까지 바꿔가며 열심히 찾던 중, 그 비싼 애플 팬슬을 하나 더 사야 하나 라는 고민에 빠져 의자에 머리를 박으려던 찰나- 그것은 정말 한 순간이었다고 얘기하고 싶다. 그 의자 다리가 쇠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코너에 찰싹 붙어 아슬아슬하게 숨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너무 황당했지만 찾았다는 기쁨과 안도감은 이로 말할 수 없었다.  


사실 글 쓰는 시간이 매우 기다려지는 스케줄 중 하나라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쭉 나열 해 놨었는데 애플 펜슬이 없어지는 바람에 아주 소중한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을 날렸다.  

좋은 쪽으로 생각해보자면, 점심으로 먹었던 떡볶이가 잘 소화되는 시간이었다고 하자. 


오늘 발바닥을 만져보니 물집이 생각보다 크지 않아 동네 한 바퀴 걸을까 하는 마음으로 어제보단 몸을 좀 더 깨우고 보통 운동하는 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나왔다. 매일 성취감이 들도록 아직 정상까지 안 가본 같은 코스로 걷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오른쪽 발목이 시큰한 게 오른쪽에 체중을 실을 때마다 아파왔다. 오늘은 정말 달리고 싶지 않았는데 발목 부상이라니. 오늘 물집보다도 더 좋은 이유가 되어주었다. 


삼십 분 일찍 나오니 사회적 거리두기에 더 수월했던 아침이었다. 

쏟아지는 햇살은 어찌나 그리 아름답던지. 갈대밭을 온통 금색으로 물들였는데,  한동안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앞에 크림색 강아지와 아주머니가 열심히 걸어오고 있었다. 

뉴질랜드는 늘 그렇듯 거리를 걷는 중 가벼운 눈인사나, 안부 인사를 나누는 것이 문화이기 때문에 늘 그렇듯 짧은 인사를 하고 지나쳐 가려는 찰나에 아무 상관도 없는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요즘 매일 저녁 두통에 시달리신다고 하셨고 깊이 잠에 들 수 없다고 하셨다. 나는 반대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단지 누군가의 대화를 듣는 것이 이렇게 흥미로운 일이었던가 생각했을 뿐. 2미터는 생각보다 먼 거리가 아니었음을. 충분히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거리였다고 나는 오늘의 이 짧은 대화를 통해 느꼈다. 


어디에 사는 지도 잘 모르는데 어제오늘 똑같은 자리에서 마주친 두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한 명은 걷기도 힘든 언덕길에서도 너무나 잘 달리시는 아주머니 (내가 어제와 똑같은 사람인 게 틀림이 없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건, 어제와 같은 아주 알록달록한 레깅스를 착용하고 계셨기에- 그리고 모자와 선글라스와 나시가 딱 그 차림새였다는 걸 기억하기에 그렇다). 그리고 언덕길을 내려갈 때 마주치는 할아버지다. 오늘도 꽤 거리를 두고 지나가셨는데  특유의 기분 좋은 아빠 스킨 냄새가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이틀 연속 그 향을 스쳐 맡게 되는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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