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람기자의 긁적끄적 Mar 23. 2024

지하철에서 섬뜩할 일, 당신들은 없으시잖아요

2023년 겨울, 서울에서

그날 저녁 서울 명동 광역버스 정류장은 피란민으로 북적이는 전쟁영화 속 기차역 같았다. 가족이 사는 경기도 용인에 가려던 연말의 어느 날, 나는 수백명의 인파를 헤집으며 내가 탈 버스의 정차 위치를 알려줄 바닥 표시 보도블록을 애타게 찾아 헤매고 있었다. 어지러운 군중과 혹한의 겨울바람이 영화적 분위기를 더했다.


며칠 뒤 다시 찾은 정류장에는 버스 번호가 적힌 팻말들이 들어섰지만, 무질서는 여전했다. 20년 이상을 경기 남부권에서 살았는데도 익숙해지지 않는 혼란이다.


서울시가 그 정류장의 버스 노선과 정차 위치를 조정한다는 뉴스를 본 건 얼마 뒤였다. 곧이어 인근 서울백병원 정류장도 그에 못지않은 전쟁통이라는 기사가 떴다. 서울시는 다른 정류장을 신설하고 요원을 투입하겠다고 했다.


노선 몇 개를 바꾸고, 정류장을 만들고, 요원을 세워둬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좋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정류장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얼마 전에는 취재 일정 때문에 출근시간대 9호선을 타야 했다. 아침 동선에 9호선이 껴 있는 날은 다른 날보다 더 긴장한다. 그날도 2대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겨우 낑겨 탈 수 있었다. 9호선 인파 대책을 마련한다는 뉴스가 적잖이 나왔는데도 여전히 이렇다면, 이미 자치단체 행정의 영역이 아니지 않을까. 타본 적 없는 김포골드라인에서도 여전히 아우성이 들려온다.

ⓒ KBS

서울은 한계에 달한 물풍선이다. 우리 수도권 직장인의 대중교통 출근길은, 동물권에 전혀 관심 없는 양계장 주인이 오직 최대 이윤만을 추구하며 설계한 닭장 같다. 차량이 견딜 수 있는 한계까지 가축을 욱여넣은 가축운반차 같다. 자기비하적인 과격한 비유를 들긴 싫지만 그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그림이 없다. 균형발전은 아랑곳하지 않고 효율·성장만 외치며 덩치를 키워 온 이 나라 서울과 수도권의 출근길을 설명하려면.


매일 다른 사람을 짓누르면서 돈 벌러 가야 하는 우리는 원해서 이렇게 사는 걸까. 사람들은 수도권이 다 삼켜버린 일자리 때문에, 교육 때문에, 의료 때문에, 셀 수 없는 수많은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밀려든다. 그런 것들은 칼보다 더한 협박이다. 팔조차 움직일 수 없도록 미어터지는 서울에 옴짝달싹 못 하고 낑겨 살게 된 게 과연 우리 탓일까.


수도권의 과중력을 해소하자는 이야기를 그래서 책임 있는 누구에게서라도 듣고 싶었다. 노선 조정이나 시뮬레이션 이야기 말고. 거대한 원인을 해결하기란 쉽지 않겠지만, 누군가 한마디 말 정도는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했다. 기대는 구겨졌다. 정치인의 말은 없었다.


이번 겨울만의 일이 아니다. 얼마 전 국민의힘은 서울의 면적을 더 키우자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눈치를 보느라 며칠간 침묵했다. 두 정당의 산업 관련 상임위원들은 지역을 살리겠답시고 ‘노동법 치외법권’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들은 겪을 일 없겠지. 사람이 꽉 찬 9호선에서 누군가 “어어어” 하는 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철렁해지는 경험 같은 것들을. 사람들이 확 쏠리면 섬뜩해져 다리에 한껏 힘을 주는 일들을.



이 글은 <주간경향> 1563호(2024.01.29)에도 실렸습니다.

(메인 사진 ⓒ연합뉴스)

매거진의 이전글 국가공인 MZ 자격증 기초반 강의록(녹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