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겨울, 서울에서
그날 저녁 서울 명동 광역버스 정류장은 피란민으로 북적이는 전쟁영화 속 기차역 같았다. 가족이 사는 경기도 용인에 가려던 연말의 어느 날, 나는 수백명의 인파를 헤집으며 내가 탈 버스의 정차 위치를 알려줄 바닥 표시 보도블록을 애타게 찾아 헤매고 있었다. 어지러운 군중과 혹한의 겨울바람이 영화적 분위기를 더했다.
며칠 뒤 다시 찾은 정류장에는 버스 번호가 적힌 팻말들이 들어섰지만, 무질서는 여전했다. 20년 이상을 경기 남부권에서 살았는데도 익숙해지지 않는 혼란이다.
서울시가 그 정류장의 버스 노선과 정차 위치를 조정한다는 뉴스를 본 건 얼마 뒤였다. 곧이어 인근 서울백병원 정류장도 그에 못지않은 전쟁통이라는 기사가 떴다. 서울시는 다른 정류장을 신설하고 요원을 투입하겠다고 했다.
노선 몇 개를 바꾸고, 정류장을 만들고, 요원을 세워둬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좋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정류장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얼마 전에는 취재 일정 때문에 출근시간대 9호선을 타야 했다. 아침 동선에 9호선이 껴 있는 날은 다른 날보다 더 긴장한다. 그날도 2대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겨우 낑겨 탈 수 있었다. 9호선 인파 대책을 마련한다는 뉴스가 적잖이 나왔는데도 여전히 이렇다면, 이미 자치단체 행정의 영역이 아니지 않을까. 타본 적 없는 김포골드라인에서도 여전히 아우성이 들려온다.
서울은 한계에 달한 물풍선이다. 우리 수도권 직장인의 대중교통 출근길은, 동물권에 전혀 관심 없는 양계장 주인이 오직 최대 이윤만을 추구하며 설계한 닭장 같다. 차량이 견딜 수 있는 한계까지 가축을 욱여넣은 가축운반차 같다. 자기비하적인 과격한 비유를 들긴 싫지만 그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그림이 없다. 균형발전은 아랑곳하지 않고 효율·성장만 외치며 덩치를 키워 온 이 나라 서울과 수도권의 출근길을 설명하려면.
매일 다른 사람을 짓누르면서 돈 벌러 가야 하는 우리는 원해서 이렇게 사는 걸까. 사람들은 수도권이 다 삼켜버린 일자리 때문에, 교육 때문에, 의료 때문에, 셀 수 없는 수많은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밀려든다. 그런 것들은 칼보다 더한 협박이다. 팔조차 움직일 수 없도록 미어터지는 서울에 옴짝달싹 못 하고 낑겨 살게 된 게 과연 우리 탓일까.
수도권의 과중력을 해소하자는 이야기를 그래서 책임 있는 누구에게서라도 듣고 싶었다. 노선 조정이나 시뮬레이션 이야기 말고. 거대한 원인을 해결하기란 쉽지 않겠지만, 누군가 한마디 말 정도는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했다. 기대는 구겨졌다. 정치인의 말은 없었다.
이번 겨울만의 일이 아니다. 얼마 전 국민의힘은 서울의 면적을 더 키우자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눈치를 보느라 며칠간 침묵했다. 두 정당의 산업 관련 상임위원들은 지역을 살리겠답시고 ‘노동법 치외법권’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들은 겪을 일 없겠지. 사람이 꽉 찬 9호선에서 누군가 “어어어” 하는 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철렁해지는 경험 같은 것들을. 사람들이 확 쏠리면 섬뜩해져 다리에 한껏 힘을 주는 일들을.
이 글은 <주간경향> 1563호(2024.01.29)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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