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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ul 24. 2018

1904, 흐르는 섬 가덕도_최성길님

내눌마을 최성길님

인터뷰 영상 링크


https://youtu.be/-13XNJXOa2I







내눌 최성길(72세) / 남성 _ 굴 채묘장의 하루

     

     

어르신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올해 72살입니다. 1947년생이고요. 내눌 마을에 사는 최성길입니다. 가덕도가 고향입니다. 13대째 가덕도에 살고 있어요.

     

이곳(굴 채묘장)은 어떤 걸 하는 곳인가요?

굴 포자만 키우는 곳입니다. 30대에 이 일을 시작해서 한 35년 했어요. 그 전에는 객지에서 직장 생활했지요. 군대도 다녀오고 학교도 다니고요. 여기서 초등학교 나와서 중․고등학교는 밖에서 공부를 했지요. 직장 생활하고 사업하다가 여기로 돌아 왔어요. 가덕도는 일제강점기 전부터 굴 양식을 했습니다. 가덕도 굴 유명했어요. 지금처럼 연승식으로 안 하고, 살포식이었어요. 살포식은 굴 씨앗을 부숴가지고 뻘 바닥에 흩어지게 뿌리는 거예요. 그냥 바닥에 뿌리면 그게 솟아올랐어요. 그게 크면 카쿠리(갈퀴)가지고 뻘을 메는 거지요. 지금은 연승식. 줄에다가 포자를 줄줄 매달아서 키우는 겁니다. 그기 좀 자라면 수하를 해가지고 충무(통영)로 가져가지요. 지금은 통영굴이 더 유명한데, 통영도 가덕도 보다는 늦게 시작한 택이지요. 통영은 원래 석화같이 돌에 붙은 거나했을까, 청정해역이라 해가지고 지금은 더 유명한 데가 됐지만요. 가덕도는 소나무나 갈대, 이런 걸 뻘 바닥에 꽂아 두면 밀물과 썰물 같이 조류의 날씨, 온도 차이에 의해 거기다 굴 포자가 붙어요. 그게, 굴이 크면 땅바닥에 쏟아지는 거라. 그거를 우리가 주워서 까고 이럴 정도였거든.

     



굴 양식은 통영으로 왜 다 넘어갔을까요?

통영은 바다가 깊잖아요. 여기는 이제 바다가 깊은 데가 없어요. 수심이 40-50m는 되어야 양식을 해요. 전에는 양식을 했는데, 이젠 신항 때문에 못 하잖아. 다 쫓겨 나버리니까. 옛날에는 조금씩 했어요.

     

구체적으로 무슨 작업을 하시는가요?

원래는 굴 껍데기에 하나하나 구멍을 손으로 뚫어서 줄에 달았어요. 그 줄을 부표에 달아서 이래이래 물 안에 늘어뜨리가 어린 굴을 키우는 기라. 그러다가 그게 안 좋아가지고 일본 이나 중국에서 가리비 껍데기를 사가지고 온다고. 구멍을 뚫어서 줄에 꿰인 가리비 껍데기. 80개씩 한 줄에 넣은 것을 사가지고 와서 통영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한 개 한 개를 10-15cm간격으로 넓혀 주는기라. 그래야 그 사이로 종패가 붙어서 성패가 자라오르니까.

     

     




통영에서 다 큰 굴을 가지고 와서 까서 파시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인력이 많이 있나요?

많이 없어요. 인력이 많이 모자라서, 항월 같은 데서는 중국이나 베트남 여성들이 와서 작업을 합니다. 내눌은 사람이 없어서 일을 못 해내요. 저런 콘테이너 같은 데, 거기서 숙식을 하고. 굴 까는 거는 자기 노력대로 벌거든. 외국 여자들은 돈을 벌라고 들어오는 거니까, 새벽 3시나 4시에 나온다고. 저녁 6시까지 일해요. 그러면 하루 버는 돈이 10만 원 이상은 되더라고요. 중국에서는, 물론 베이징 같은 곳은 아니지만, 안쪽 한족들이 사는 곳에서는 하루에 이천오백 원 벌기도 힘들잖아요. 그런데 여기서는 10만 원 이상을 번다고요. 자기들 말로는 1년만 벌면 아파트 한 대 산대요. 더 노력해서 더 버는 사람들도 있고요. 국내 인력은 이제 없어요. 젊은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고, 나이 많은 사람들만 남았는데 어쩔 수 없잖아,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인데. 나이 많은 사람들은 아프면 쉬어야 하고 그러니까 외국사람들이 없으면 일을 못 해냅니다. 굴 작업하는 바지선은 아직 많아요. 내눌에서 굴 작업하는 집은 세집 정도 되고, 항월 같은 한 2~30집 될 거야. 외눌에도 한 4-5집 정도 되고.

     





항만이 들어서면서 어떤 부분이 불편해지셨나요?

전에는 배로 왔다 갔다 왕복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바다로 못 나가잖아요. 신항이 있기 전에는 여기가 바지락, 피조개, 굴, 갈미조개 같은 게 복합적으로 나오던 곳입니다. 예전에는 일본 수출선까지 스탠바이 되가지고 했어요. 그땐 젊은 사람들 돈 잘 벌었지. 다리 딱 놓고부터는 이동할 데가 없잖아, 작업할 데가. 그러니까네, 지금 어렵다고, 사는 게. 이 동네가 반농 반어업이었어. 눌차가 4개 부락이라. 내눌, 외눌, 항월, 정거 이렇게 4개 부락이 한 어촌계로, 옛날에는 어업을 할 수 있는 범위가 상당히 넓었어요. 그런데 신항 때문에 우리자리를 다 빼앗겨 버렸어요. 나이 많은 사람이 외지에 나가면 옳은 직장이 있습니까?

     

옛날 내눌에서는 어떤 업종이 주였나요?

눌차 중에서 우리 이 안모(내눌) 동네가 다마네기(양파)로 유명했어요. 양파가 가덕도에서 왜 유명하냐면, 가덕도에 농촌 운동 하는 박한택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일본서 양파를 가져와서 알려준 분이라. 농지가 좁은데 소득을 많이 올리는 작물이 다마네기라. 여개 맞는 영농 방법을 개발해 가지고, 평당 2000원 받던 거를 평당 7000원 받게 됐어. 그 분이 71년에 5·16 산업 부문에 민족상을 받았어요.  그 이후로 가덕도는 양파의 주산지였어요.
 

옛날에는 가덕도를 대표하는 생산물 하면 뭐가 있었나요?

가덕도하면 대구지, 그 다음 양파, 미역, 바지락.

     

그럼 요즘은요?

나오는 거 해봐야 대구 조금. 말고는 없어요. 특산물이라 해봐야. 우리가 하는 거, 굴 채묘. 이거 밖에 없어. 천성, 연대봉 봉화불, 외양포 같은 것도요. 옛날부터 있었구나, 그렇게만 생각했지요. 먹고 살기가 바쁘니까 생각을 못 했는데, 지금은 정부에서 문화재로 지정할라는가 보더라고.

     

옛날 가덕도는 어땠다고 들으셨나요?

굶는 사람은 없었어도 참 못 살았어요. 옛날 사람들 고생 많이 했지요. 다 노 젓고 다녔으니까요. 구포장이고 뭐시고 갈려고 해도 노를 젓고 가야하니까.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겨울 오면 이 바다가 얼었어요. 그만큼 추웠어요. 가덕도 사는 사람들은 생활권이 부산이거든요. 남포동. 아침엔 수심이 낮아서 여객선이 접안을 못 하잖아요. 그러면 수로가 있어. 거기에 배를 대면 여기서 노를 젓고 타고 가서 올라타고, 내릴 사람은 또 내려가지고 이리 오고. 그 때 진해 쪽으로 가는 배가 하나 있었고 거제도 가는 배가 있었어요. 두 척이 하루에 한 번 씩 오갔어요.

     




예전에는 가덕도 안에서도 마을을 이동할 때 배타고 갔다고 들었어요.

그렇지, 눌차도 다리 놓기 전에는 섬 중의 섬이었어요. 그 때는 나룻배가 있었지요. 우리가 육지로 가려하면, 돈을 주고 배를 타고 선창부터 가야 했었지요. 지금은 다 돌아가시고 없지만 나룻배 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이쪽에서 아저씨, 부르면 노 저어 오고하는.

     

가덕도에 관한 옛날 기억 중에 가장 좋은 건 무엇인가요?

인심은 참 좋았지, 인심이 얼마나 좋았나 하면, 오늘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내면, 동네 나이 많은 사람들을 다 대접 했어요. 밤에라도 상을 갖다드리고, 어르신들도 다 알고 이랬는데, 지금은 삭막해서 그런 거 없잖아요. 제사를 지내고, 생일이 있고 하면 이웃집 막 불러가지고 서로 앉아서 식사하고 오순도순 이야기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안 그러지요. 그때는 TV가 없었잖아요. 라디오라도 한 대 있는 집에 전부 다 모이는 거예요. 이 동네에 내가 TV를 제일 먼저 가져 왔는데 우리 집이 극장보다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어요. 그것도 등석이 있어요. 방에서 보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지. 나이 많은 사람은 1등석, 마루에서 보는 사람은 2등석, 마당에서 보는 사람은 3등석. 그러니깐 아침에 마당을 보면 엉망이야(웃음).

     

TV 한 대 가덕도에 들어오는 것도 힘들었다고 하던데요.

들여오는 것도 힘든데, 그 텔레비전을 또 어떻게 봐야 하냐면요, 우리 동네는 발전기가 있었어요. 그걸 딱 12시까지만 켜는 거야. 그러니 12시 이후로는 못 봐요. 부산시 되고서야 전기 혜택을 본거지요, 그 전에는 전부 호롱불 켰어요. 90년대 초반에도 호롱불을 썼어요. 전기가 없는데 뭐. 제사는 자정에 지내니까, 제사를 지내는 날이면 그 기계 보는 사람한테 제삿밥하고 뭐 막 갖다드려야 해. 그분한테 ‘1시간만 더 켜주이소’하고. 그 분은 이 동네 제삿날 모르는 집이 없었지.   

     

     

         

                                      

     

     

 

           

                 

           







1904, 흐르는 섬 가덕도

     

기획  부산광역시 강서구 문화체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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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김유리

원고  김유리

영상  문창현

사진/업로드 박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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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에 딸린 텍스트는 저자, 부산광역시 강서구청,

다양성출판사 키스더북스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 영상의 모든 인터뷰는 인터뷰이와의 동의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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