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양포 마을 김광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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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자(79세) / 여성 _ 우리 어머니는 103살
외양포에는 언제 들어오셨나요?
6살때요. 내가 1940년생, 79살이에요. 외양포엔 일제강점기 전부터 원래 살고 있는 주민들이 있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 점령을 하면서 주민들은 저 너머 동네에 다 넘어가서 살았다고 들었어요. 해방 된 후에 주민이 도로 들어왔어요. 내가 5살 되던 해에 해방이 되었고, 6살쯤 이 동네로 들어왔어요. 여기 처음 들어오니까 정말 좋았어요. 나이가 어려도 새집인걸 아니까 다 호텔 같더라구요. 일본 사람이 키우던 말도 있고, 집도 좋고, 바다도 좋고. 일본사람들이 다 지어놓은 집에 들어와서 살았어요. 해방 된 후에 못 사는 사람들을 일본 사람들이 다 떠나고 빈 이 동네로 보내서 살게 하자, 해서 추첨를 해서 집을 정해 들어왔다고 들었어요.
외양포에 처음 들어왔을 때 어떤 건물이 있었나요?
처음 들어왔을 때는 다 일본 사람들이 지은 새집이었으니까 지금보다 좋았어요. 외양포 들어오기 전에는 작은 오막살이집에서, 식구들이 붙어서 살았었는데 외양포 집은 반듯반듯했어요. 바닷가에 부두도 다 있어서 좋았어요. 마을에 벚꽃나무도 가득 심어져 있었어요. 마을 전체에 나무가 많아서 참 좋았어요. 포진지에 가보면 똘방똘방한 구멍에 나무를 심어놨는데, 나무가 많이 크니까 위에 칡넝쿨이 덮여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해 두었더라고요. 꼭 외국에 있는 밀림 같았어요. 예전에는 밀림을 몰랐는데, 이제 와 생각 해 보니 딱 밀림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어요. 지금은 민간인들이 나무를 다 베어서 없어요. 밭도 줄이고, 나무도 자르고. 먹고 살려고 그런 거였죠.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이 좋아서 다 기억나요.
부모님은 뭐 하는 분이셨나요?
옛날에 아버지들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았고, 땅을 쪼사서 곡식을 심고 살았죠. 부모님은 원래 대항에 사셨는데 집이 없다보니 추첨을 통해서 외양포에 살게 되었어요. 나는 7남매였는데, 오빠 하나, 동생 하나가 죽어서 동생만 4명이었어요. 신발을 사 줘도 딸은 나뿐이었으니까, 동생들은 다 짚신 신었어요. 우리 아버지는 짚신을 삼을 줄도 모르고 술 마실 줄만 아셨죠. 노 젓는 배 타고 나가서 그물 놔서 잡을 줄 모르고 낚시로 다 잡았어요. 지금은 그물로 쓸어가니까 물고기가 잘 없는데, 예전에는 물고기가 많아서 낚시로도 잘 잡았어요. 육지에서 온 배가 바다에서 물고기를 바로 사갔어요. 가덕도에서는 노를 저어 가고, 육지에서는 보트를 타고 와서 거래를 했어요. 대구 같은 건 어장을 만들어서 새바지라는 동네에서 잡았고요. 월급을 주는 게 아니라, 삯으로 대구를 줬어요. 대구를 널어 말려서, 시장에 나가 팔았어요. 겨울은 대구로 났죠.
외양포가 예전에는 살기 좋은 동네라고 들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어른들 말로는 농토가 참 좋아서 잘 살았대요. 여기 사람들 중에 부자가 많았다고 하데요. 우물이 8개나 있고요. 일본사람들이 판 것 같은데, 우물물이 참 좋았어요.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고. 지금은 수도가 다 들어왔으니까 안 마시는 거지, 옛날에는 이 물만 마셨어요. 어릴 때 대항에서 일본사람들이 들어오는 걸 봤었죠. 말을 탄 군인들이 장화 같은 걸 신고, 칼 차고, 들어오더라고요. 어렸을 때니 많이 놀랐었죠. 남자들은 징용 많이 끌려갔었어요. 몇 년이나 다녀오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아버지도 갔다 오셨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어디 갔다 오셨는지 아셨는데, 저는 몰라요. 아버지는 67살에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가 가덕도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신데, 혹시 옛날이야기 들으신 것 있으신가요?
우리 어머니가 103살, 1916년생이에요. 일본 사람들 때문에 민간인들이 이 마을에 못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해 주시고. 앞의 포구도 미군이 폭탄으로 터뜨렸다는 이야기도 하셨고. 해방되고 6.25 전쟁 때는 미군을 봤어요. 지금 저 위 해병대 있는 자리에 부대를 작게 지어놓고 미군들이 많이 살았어요. 엄마는 연골이 닳아서 그렇지, 감기도 한 번 안 걸리셨어요. 예방접종도 안 하셨는데 아주 건강하세요. 그래도 소주 한 병씩 매일 드세요. 요즘은 한 컵 정도로 줄이셨는데, 매일 술 드시고 주무세요. 어머니 귀가 안 들리기 시작 한 건 3년 전부터예요. 원래 기억력이 아주 좋아서 전부 다 기억하고 계셨었는데 지금 연세가 많으시다 보니 약간 치매기가 있긴 한데 건강은 괜찮으세요. 가끔 양말을 한 짝만 신고 계신 정도.
어렸을 적의 기억 중에 남은 것이 있나요?
젊었을 때는 한복을 모두가 입었어요. 옛날에는 바지도 없었어요. 요즘은 얼마나 편해요. 예전에는 집집마다 다 옷을 만들어서 몇 년씩 입었어요. 옷이 떨어지면 기워 입고, 기워 입고 하는 걸 반복했어요. 양말도 없었어요. 짚신 신고 다녔죠. 우리 어머니가 짚신을 잘 만드셨어요.
대항에서 이사 올 때 산을 넘어서 왔어요. 짐을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넘어왔어요. 작은 나룻배엔 큰 짐을 실었고요. 그 때는 수레도 없었으니까. 귀중한 짐은 직접 들고 왔어요. 집에 가구도 없었는데, 엄마가 시집 올 때 삼층장이 있었거든요. 이사 올 때도 배로 싣고 오고. 어머니 외갓집이 좀 잘 살아서, 장승이 박힌 삼층장을 해 오셨대요. 어머니 외갓집은 농사도 짓고, 형제들이 엄마 말고는 다 일본에 살았던 덕에 돈이 좀 많았어요. 외삼촌이랑 이모는 해방되고 모두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천가동으로. 엄마 친정이 청가동이에요. 농사를 크게 지었어요. 엄마는 부모님 모시면서 혼자 한국에 남아있었대요, 위에 외삼촌이 셋, 언니가 하나니까 엄마가 다섯째였어요. 엄마 성함은 ‘김선이’에요.
외양포에서 학교도 다니셨어요?
지금 내 올케도 제 국민학교 친구였어요. 외양포 넘어와 보니 내 또래가 8명 정도 되었는데, 모두 산을 넘어서 대항 국민학교를 다녔어요. 제 아이들도 같은 곳에 다녔고요. 옛날에는 우비도 없었으니 비 오는 날에는 마대자루를 뒤집어쓰고 학교 오갔어요. 초등학교 졸업 후 학교는 더 이상 못 다녔어요. 다니고 싶어도 중학교가 없었고요. 사는 게 힘드니 딸들은 학교를 보내지 않던 시절이었죠. 또래 친구들하고는 다 비슷비슷하게 살았고, 가덕도 밖으로 나가 살기도 했고. 15살, 16살에는 어머니 돕고, 밑에 동생들도 보고, 소 풀 먹이려고 산에도 다니고. 옛날에는 소가 있어야 농사를 지었어요, 훌치이(쟁기)를 소에 메어서 땅을 갈았죠. 집집마다 소를 키우고, 소장수가 돛단배를 타고 들어오면 팔기도 하고.
어려운 시절에 뭘 잡수셨어요?
옛날에는 밥도 가마솥으로 먹었어요. 솥이 커도 식구가 많으니까 밥을 지어 먹을 수 있었어요. 보리쌀을 많이 먹었어요. 보리를 꼭꼭 누르고 그 위에 쌀을 얹어서 밥을 지었어요. 쌀밥은 걷어서 아버지를 드리고, 밑에 있는 보리밥은 저희가 먹었어요. 몇 인분 정해놓는 게 아니라, 큰 공기에 방앗간 도구통(절구통)에 찧어서, 우물에서 씻어서, 삶아서 한 번 더 물 부어 쌀 조금 넣어서 밥 해 먹었어요. 보리는 길러서 먹고, 모자라면 사왔어요. 한 솥 하면 아침밖에 못 먹고, 남은 밥은 소쿠리에 넣어뒀다가 어른들이 드시고, 어린 우리는 먹으나 안 먹으나 하게 조금 먹었어요. 시래기 죽 끓여먹기도 했고요. 보리를 죽으로 끓여서 먹기도 하고요. 보리를 살짝 볶아 맷돌에 갈아서 가루를 내고, 물 부어서 끓여 먹었어요. 양을 늘리려고 그렇게 먹었어요. 식구가 많아서 그렇게 먹지 않으면 매일 굶어야 했으니까요. 옛날에는 맷돌도 자주 썼는데, 세상이 좋아지니까 어느새 없어지고 없더라고요. 믹서기가 언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식구가 많으니 쓰지도 못했을 거예요.
처녀시절에 친구들하고 밤에 뭐 하고 놀았나요?
수를 놨어요. 호롱불을 켜 놓고. 베갯잇 모서리에 수놓고, 베개 홑청에도 수를 놓고. 베 올마다 3땀씩만 떴어요. 수 놓은 걸 시집 갈 때도 가져가고, 밥상보도 만들고요. 명주실 같이 좋은 실로 뜬 거는 혼수를 만들었어요. 혼수 만들어서 선물하기도 했고요. 수놓는 건 어깨너머로 보고 배워서 했어요. 바느질도 보고 배워서 한복도 만들었고요. 버선이 헤져서 떨어지면 올을 맞춰서 깁고요. 실이나 천은 어머니가 배 타고 나가서 장에서 사오셨어요. 저는 어머니가 시장에 갈 때 수놓을 수 있게 천을 사다주었으면, 하고 바랬어요. 집이 잘 못 사니까 많이 못 사잖아요. 얼마큼만 좀 사와주세요, 하면서 울면서 애원하고 그랬어요.
결혼은 언제 하셨나요?
20살에 옆집 오빠하고 했어요. 8살 차이였어요. 식구들은 많고 사는 게 힘드니 하나라도 내보내야 밥이라도 정상적으로 먹겠다 싶어 제가 시집을 갔어요. 나이는 8살 많았어도 됨됨이를 보고 시집갔어요.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었어요. 결혼식 할 때는 한복 입고, 족두리 쓰고 저희 집에서 했어요. 우리 집에서 이틀 자고 바로 옆집으로 넘어가 시댁 살이를 했는데도 기분이 이상했어요. 옛날엔 시집 갈 때 가마솥 뚜껑을 세 번씩 들었다 놨다가를 반복하라고 했어요. 이 집을 졸업하고 간다는 뜻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정말 눈물이 많이 났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 집으로 간다는 의미였으니까. 시댁에 들어갈 때에는 짚에 불을 붙여서 넘어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친정도 가깝고, 남편이 막내여서 시집살이는 별로 안 했어요. 아들만 셋을 낳았는데, 지금 큰애가 58살이에요. 손자는 5명이에요. 남편은 결혼 하고 부산에 가서 배를 탔어요. 제가 부산에 가야 만날 수 있었고, 바다에 나가면 보름이고 한 달이고 나가 있다가 들어오곤 했어요. 큰 아이는 초등학교를 가덕도 에서 다니다가, 6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보내면서 보수동으로 저도 이사를 갔어요. 나머지 두 아이도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남편은 병으로 57살 때 죽었어요. 저는 49살이었고, 막내는 중학생이었어요. 어머님은 배 사업이 망하면서 편찮으시기 시작하다가 돌아가셨고요. 시어머님 병구완도 하고, 아이들도 공부시켜야 하니 그때 좀 힘들었어요. 부산 보수동 중복도로 쪽에서 20년 넘게 살다가, 남편 죽고, 막내아들 대학교 간 뒤에는 엄마 손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되어서 다시 가덕도로 돌아왔어요. 나이가 많으면 부산에서는 생활비도 많이 들고 불편해서, 친정도 옆에 있고 하니 돌아왔죠. 그리고 이제껏 우리 어머니하고 같이 살아요.
외양포가 군대땅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된 건가요?
경로당 회장님 말씀이, 우리 조상들은 200년 전부터 땅을 개간해서 살았어요. 어느 날 갑자기 일본군들이 들어와서 나가라고 총칼을 겨누고 집에 불을 질렀대요. 해방되고 다시 들어와서 다시 경작을 했죠. 1959년인가, 진해 해군에서 와가지고 깃발을 다 세우더니 이제 자기들 관할이래요. 그 이후부터는 해군에 사용료를 주고 있었는기라. 겨우 2-3년 전에 해군 관할에서 국방부 관할로 넘어가서, 집집마다 집 면적에 따라서 평당 얼마씩 사용료를 내요. 보통 집은 1년에 10 몇 만원부터 그 이상씩. 옛날에는 등기 개념이 없었으니까 이렇게 됐어요. 국가를 상대로 소송도 해봤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돈도 많이 들고 이긴다는 보장도 없대요. 1997년에 국방부에서 불하를 주겠대요. 그런데 다음 대통령으로 바뀌면서 참모총장이 바뀌니까 더 늦어졌어요. 결국엔 개인한테는 땅을 못주고, 지방자치단체에는 준대요. 관광지로 바뀐다고 강서구에서 길도 새로 냈는데, 국방부에서 강서구청에서 땅을 사라고 했대요. 돈이 없으니까 다는 못 사고 도로하고 주차장만 산거지요. 국방부하고 협상이 아직도 잘 안된대요. 규제가 되어 있으니까 집을 새로 짓기도 어렵고, 고치기도 어려워요. 2019년엔 예산을 확보해서 강서구청에서 매입할 예정이래요.
내가 62살일 때 불법으로 살짝 집을 지었어요. 벌금도 받고, 뜯으러 온다고 하더라고요. 벌금은 구청은 구청대로 나오고, 법원은 법원대로 나오고. 예전에는 내부수리도 불법이었는데 이제는 지붕은 고칠 수 있어요. 집이 10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어떻게 수리를 하지 않고 그냥 살 수 있겠어요. 전에는 손도 대지 말라고 하더니 이제는 수리는 할 수 있는데, 새로 짓지는 못하게 하죠. 못 지으니까 이렇게 한 집에 두 가구씩 살게 된 거에요.
대대로 살던 땅을 쓰지 못하게 된 외양포 주민 분들 마음은 어떠세요?
억울하죠. 대대로 살던 땅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땅도 전부 다 구역 정하기를 해서 구역을 1번, 2번 하는 식으로 나누어서 받았어요. 땅을 나눠서 농사도 짓고 살았는데 어머니들이 나이가 드시니까 이제 일을 못 하게 되었잖아요. 젊은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서 살고. 그러니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땅을 안 쓰니 다 회수되고, 묶어버리고. 다 선을 그어버리고. 여기 사는 사람들은 다 억울해요.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 사람들이 땅을 빼앗아가고, 해방이 되니 국방부에서 땅을 빼앗아 가고.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에게 빼앗겨서 그렇게 고생을 했으니, 이제 좀 풀어주었으면 좋겠어요. 100년 이상 산 땅을 묶어버렸으니, 땅 한 평도 없이 집 한 채도 짓지 못하게 하면서 괴롭히니까요. 나는 이 집 짓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우리가 경찰서를 가 봤겠어요, 파출소를 가 봤겠어요. 집을 지었다고 경찰서에 불려갔는데,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닌데 놀라서 너무 무서웠어요. 나라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100년 이상이나 땅을 묶어놓았으면 풀어줘야죠. 그게 원칙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일본 사람에게 고통 받고, 해방 후에 저희 부모님들은 세상도 모르고 자식들 조금이라도 더 잘 먹여 살리려고 농사지어서 먹고 살았어요. 허덕이다 보니 불하를 받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거예요. 무식해서 몰랐던 거죠. 우리는 못 배워도 티비도 보고 라디오도 듣고 하면서, 세상도 보고 다른 사람 말도 듣고 하면서 알게 되는 게 있는데, 우리 부모님들은 먹고 사는 것만 신경 썼지 그런 건 전혀 몰랐거든요.
외양포에도 젊은 사람들이 있나요?
나이 많은 사람들은 농토도 있고 해서 계속 살고 하는데, 젊은 사람들은 거의 나가고 없어요. 몇몇 남은 사람들은 이리저리 살다가 결혼도 하고, 생선도 잡고 같이 살아요. 여기 남은 젊은 사람들 다 괜찮은 사람들이에요. 벌이도 괜찮게 하고.
1904, 흐르는 섬 가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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