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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ul 24. 2018

1904, 흐르는 섬 가덕도_김태수님

선창마을 김태수님

인터뷰 영상 링크


https://youtu.be/jA29gQisXEM









선창 김태수(80세) / 남성 _ 징용에 대한 기억

     

선창마을은 몇 세대가 있나요?

옛날에는 68세대, 지금은 240세대로 더 많아졌어요. 옛날엔 집을 지으면 거기 살았는데 요새는 시내에 있건 어디에 있어도 집은 지어 놓고 안 와요. 뭐 자식들 이름으로 했는가 몰라도. 옛날하고 다르지요 여기는.

     

선창에는 새 집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빌라는 전부 전세 다 나갔어요. 집주인들은 전세만 받고 여기 안 살아요. 신항 하고 녹산공단하고 가까우니까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여기서 출퇴근해요. 주인은 부산 시내에 있고 집만 사가지고 남한테 세를 준 거지요.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여기 방을 얻어놓고요. 아침 8시쯤 되면 다들 출근을 해서 여기 차가 꽉 막힙니다.

     

신항만 때문에 세대 수가 늘어난 거군요.

여기에 신항이 된다고 한참 안 떠들었습니까, 우리 부산 시장님도 여기 신항 안 되면 옷 벗는다 했습니다. 그렇게 공약을 했거든요. 그런데 대통령이 신항을 여기 못 줬다 아닙니까. 그 이후로 사람이 딱 끊겼어요. 그 때는 토지가 없어서 못 팔았어요.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서 집을 짓고 그랬어요. 가덕도가 완전히 변했습니다. 집만 지어놓고 사람은 없어요. 좀 있는 사람은 집 지어놓고 토요일 일요일에 와서 쉬고 가고요. 공기 좋고 경치 좋으니까. 집은 시내에 있고 주말에는 자식들이랑 여기 와가지고 쉬었다가고.



  

가덕도에서 태어나고 자라셨어요?

우리 선조 때부터 들어와 가지고 제가 8대 손입니다. 밑에 후손이 9대, 손자가 10대. 내 밑에 자식들은 다 외지에 나가 있습니다. 다 육지에 나가 있기 때문에 제가 8대 손 장남입니다. 우리 집안(김해 김씨 안성공파)은 여기 5세대가 있는데 그 밑에 자식들도 전부 다 나가 있습니다. 제가 집안에 최고 장손입니다. 할아버지한테 이야기 들은 걸론. 5대 위에 할아버지가 벼슬을 했더라고, 정3품. 정2품은 국회의원이나 2급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는 정 3품이라고. 중학교 때 임명장을 봤어요. 임명장을 봤는데 큰 도장이 찍혀있습디다. 요새 같으면 도지사 벼슬이라고 하더라고. 아마 가덕도에 통치하러 들어오신 것 같은데, 증거가 없더라고요. 받았다는 그건 있는데, 기록도 없고 육지에서 한 업적에 대한 기록도 없고요.

 


어릴 때 기억나는 거 있으세요?


할아버지께서 창호지에 글을 써놓고 그러셨는데, 글씨가 참 좋았어요. 15살 때 할아버지께 하늘 천, 땅 지를 배웠습니다. 대나무 회초리를 가지고 손바닥, 종아리도 많이 맞았습니다. 내 손자가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인데, 집에 한 번 씩 오면 그래요. 내 쪼매날 땐 소 풀 먹이러 다니고, 나무하러 다니고 그랬다고. 소가 없으면 농사를 못 지으니 그땐 집에 다 소가 있었어요. 바다풀(잘피)이라는 게 있는데, 바람이 불면 그게 떠내려 오거든요. 그걸 말려서 소 밑에 깔아주고 그랬거든요. 애들은 소가 어떻게 크는지도 몰라요.

     

어르신의 삼촌은 일제강점기에 징용도 다녀오셨다면서요?

우리 삼촌은 왜정 때 병종 항해사를 했어요. 병종 항해사하면 엄청 컸습니다. 삼촌이 이야기 해주시기를, 일본 시대에 한국사람 중에 보급대 갈 사람을 280명 배에 싣고 필리핀 남양군도에 가다가 미군 비행기의 폭격을 받았대요. 배가 침몰 했답니다. 삼촌은 섬사람이니깐 헤엄을 잘 할 거 아닙니까. 무인도까지 헤엄을 쳐서 야자수 밑에서 잠을 잤답니다. 가슴이 답답해서 눈을 떠보니 뱀이 몸을 감고 있더랍니다. 며칠 째 굶었으니 배가 안 고프겠습니까. 그래서 뱀을 생것으로 먹었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해방되고 1년인가 2년인가 지나서 왔는데, 새까매져서 일본 모자를 그대로 쓰고 배낭 메고, 각반을 두르고 왔더라고. 징용 갔다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천만다행 아닙니까. 삼촌은 그 후로 집에서 여객선 선장을 오래 하다가 72살에 돌아가셨는데, 묘가 가덕도에 있습니다. 참 고생 많이 하셨지요. 삼촌 뿐 만 아니라 가덕도에서 징용 간 사람 많았다 하대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우리 할아버지가 딸을 다섯 두었어요. 다섯 밑에 우리 아버지를 낳은 거지. 딸들이 우리 아버지를 받들고 살았어요. 그 당시엔 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이북 원산 위까지 갔다고 하더라고요. 할아버지는 똑똑했는데 아버지는 배를 탔으니, 배운 게 없죠. 농사도 지으셨어요. 그런데 옳게 하신 건 아니고요, 고모님이 많으니까 어린 아이처럼 키웠어요. 일을 잘 못하셨어요. 내가 어릴 때부터 일 다 했습니다. 내가 태생이 ‘너는 일해라’ 하는 거 같아요. 지금도 일 많이 합니다. 왜정때는 농사지으면 보리를 공출해야 되는데, 공출은 내기 싫고 농사 지을 사람도 없어서 밭을 다 묵혀 뒀습니다. 그때는 공출을 자꾸 내라 하니까, 2차 대전 말에요. 소나무 기름도 따러 다녔어요. 그것도 공출이라. 집에 놋그릇도 공출주고요. 배가 실으러 왔더라고요. 밭은 계속 농사 못 짓다가, 요 위에 2천 평인데, 내가 다 개간하고 지금은 유자나무 심어 과수원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육지 같으면 차가 다 하는데 여기는 산지 아닙니까. 엣날 에는 지고 다 올라갔어요. 똥도 지고, 뭐만 하면 지고 올라갔습니다. 저는 12년 전에 모노레일을 천칠백만 원 주고 600M 설치해놨습니다. 모노레일 설치 안 했으면 이 나이에 일 못 합니다.

     

동장도 하셨다고 들었어요.  

17년 전에 여기 동장을 했습니다. 동장할 때만 해도, 아침에 변소 치우면 9장군이 나옵니다. 일찍 일어나서 위에다가 나르고 씻고 출근했거든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동장 앞에는 예비군 중대장을 했어요, 그때는 예비군 중대장을 장교가 하는데 가덕도는 장교가 없었어요. 내가 하사로 제대해서 예비군 중대장을 했고, 군 시절에 인사과에 있었기 때문에 행정을 한 3년 배웠거든요. 지역 발전도 많이 시켰습니다. 예전엔 여기서 대항까지 차가 다닐 길이 없었어요. 내가 불도저하고 덤프트럭하고 사비를 들여 8일 동안 장항까지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두 대를 넣었어요. 1980년대 초반이었어요. 처음엔 도로를 밀어만 놨지 차가 못 다녔어요. 제가 8일 동안 정비를 해서 차를 사서 넣었어요. 장항까지 차를 넣었습니다. 대항 애들이 늘 걸어 다니다가 차를 타고 다녔죠.

첫 동장할 때가 그 때 1991년도입니다. 외양포라는 곳이 있습니다. 주민이 30세대 정도 삽니다. 거기는 전부 개발(해산물 채취)해서 사는 분들이에요. 외양포에서 대항 넘어가려면 이고 지고 와야 해요. 바람 안 불 때는 조그마한 배를 노 저어서 자기 개발한 거 싣고 와서 우리 배, 도선에 실어가고 했는데, 내가 동장 되던 해에 청장님도 바뀌고 해서 청장님을 모시고 외양포로 순시를 같이 갔어요. 지금은 집을 새로 짓고 도로도 생기고 나무도 심고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눈물이 나더라고요. 집이 새까맣고 일본 집 그대로. 여기도 강서구 주민이 삽니다, 하고 나니까 눈물이 나더라고요. 무엇이 필요 하냐 길래 배 대고 할 방파제가 제일 필요합니다, 해서 오천만원을 들여서 방파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도선을 넣었어요. 얼마나 편리합니까. 하루에 배가 다섯 번 다녔습니다. 제가 진짜 봉사했습니다, 지금도 봉사하고.

     






앞으로 가덕도는 어떻게 변화했으면 하시나요?

신항이 들어오고 거가대교도 나고, 공기 좋고 인심이 좋고 하니까 전부 이주한 거 아닙니까. 가덕도가 엄청 변했습니다. 항상 그럽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나만 생각하지 말고 조금  넓게 생각하자고. 객지 사람이 우릴 살린 거 아니가. 객지 사람이 우리 지역을 발전시킨다. 안 그렇습니까. 그 사람들이 와서 땅을 사고 집을 짓고. 외지 사람이 우리 지역을 발전시키지. 우리 지역 사람들이 돈이 어디 있노. 만약 공항이 들어오는 거 같으면 대항은 철거를 해야 합니다. 대항서부터 양쪽 바다를 끼고 공항이 될 거거든요. 앞으로 10년 뒤에는 여기 옵니다. 김해 저거는 공항이 아닙니다. 야간에는 뜰 수도 앉을 수도 없는 거거든요. 김해시에 오십만이 살지 않습니까. 시끄러워 잠 못 잡니다. 결국에 공항은 가덕으로 와야 합니다. 그러면 가덕이 급속도로 발전이 안 되겠습니까. 내 지역이 발전되려면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가덕은 침체해 있습니다.

                                    










1904, 흐르는 섬 가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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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김유리

원고  김유리

영상  문창현

사진/업로드 박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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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에 딸린 텍스트는 저자, 부산광역시 강서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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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의 모든 인터뷰는 인터뷰이와의 동의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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