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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ul 24. 2018

1904, 흐르는 섬 가덕도_이차연님

남중마을 이차연님

인터뷰 영상 링크


https://youtu.be/1gOQgPyVXkQ






남중 이차연(84세) / 여성 _ 태풍 매미가 쓸어간 집

     

남중 마을은 어떤 마을인가요?

옛날부터 소문난 게 남중 마을이에요. 말할 것 같으면 남중 사람들은 어질고요 서중은 좀 그거하다 그래요. 어진 사람들만 살고 있어요. 장사들도 오면 밥을 얻어먹어도 남중에서 얻어 먹는다 그래요. 대항에서 고기장사들이 오면 남중에서 고기 팔고 간대요. 서중 가면 고기 안 팔린대요. 한 마을이라 해도 서중하고 남중하고 성격들이 조금 달라요. 남중 사람들이 순한 택이에요.

     

오빠가 일제강점기에 실종되셨다고요.

마을에서 우리 오빠 똑똑하다고 소문났었어요. 우리 오빠가 반장이었어요. 천가면 사람들도 다 알았어요. 오빠가 나한테 일본말로 1, 2, 3, 4를 가르쳐서 데리고 소학교에 시험 치러 갔어요. 내가 1935년생이니까, 여덟 살 때. 일본 선생이 히도츠(하나), 후다츠(둘), 미츠(셋), 요츠(넷) 하는 걸 해보라는데, 그건 안 배웠는데요 하니까, 선생이 이치(1), 니(2), 산(3), 시(4)는 아느냐고, 10까지 세보라고 해요. 그래서 세니까 일본말로 이름도 가르쳐 줘요. 성은 기억이 안나고 내 이름은 사렌이라 했어요. 선생님이 합격이 되 든 안 되는 통지가 갈 거니까 집에 가라고 해요. 통지가 와서 입학을 했고요. 오빠는 그해 10월에 군대에 가서 아직 소식이 없어요. 지난 9월에사 오빠가 전쟁 때 죽었다고, 돈이 형제간에 6만 얼마씩 나왔어요. 그 돈을 받고 내가 한없이 울었어요. 중간에 언니가 하나 있었는데 17살에 아팠어요. 가덕도에 병원도 옳게 없어서 진해에 데리고 가니, 맹장염이래요. 맹장염으로 죽었어요. 내 위로 아들 하나 있었는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죽었고요.

     



해방을 몇 살때 맞으셨어요?

소학교 2학년 되니까 해방되었어요. 일본말 배울 동 할 동 하니까 해방되어서 일본어도 못 배웠어요. 해방 되고 나서는, 학교는 계속 다녔어도 엄마는 물에 일하러 가고, 나는 살림 산다고 공부도 옳게 못했어요. 보리타작해서 돌도구통(돌절구통)에 보리랑 물이랑 넣어서 찧어서, 껍데기 벗겨서 널어놨다가 또 찧고, 그렇게 두 번 찧고 씻어서 불 때서 가마솥에 밥을 해 먹었어요. 보리쌀을 이고 들에 샘이 있으니, 들에 가서 씻어서 이고 오다가 손이 시려서 손 한쪽은 보리쌀을 잡고 한쪽은 입에 넣고 오다가 돌부리에 넘어져서 팍 엎어져서 보리쌀 그놈, 쓸어 담아서 또 씻어서 밥 해 먹고, 그런 세월을 살았어요. 저녁거리는 소쿠리에 건져 담아놓고, 아침은 보리밥을 했어요. 반찬은 시래기. 지금은 배추나 좋은 게 나왔지만 그때는 배추도 상추 맨쿠로 잔잔한 거, 그런 걸 키워서 씻고 소금 좀 쳐서, 고춧가루도 많이 없고, 마늘 찧어서 좀 넣고, 젓갈에 무쳐서 먹고. 아버지가 고기 좀 사오면 먹고요. 갯가라서 고기잡는 배들이 많이 있으니. 우리 아버지는 한의사였어요. 침놓는. 중풍으로 입 돌아간 사람도 침 놔서 다 돌려주고 이랬거든. 여기나 천가면에서 이경서,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죽어가는 사람 많이 살렸어요. 돈도 안 받고. 옛날에 돈이 어디 있어요. 대항에서 다 죽어가는 사람 업고 오면 살려주고, 울 줄도 모르는 애기 데리고 오면 울게 해서 살려주고, 우리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니 술 한 잔 대접하고 가고 그랬어요.

     

언제부터 해녀를 하셨어요?

나는 국민학교 마치고, 살림하면서 바닷가에서 해녀해서 먹고 살았어요. 언제부터 물에 들어갔는지는 기억 안나요. 어릴 때부터 활딱 벗고 바닷가 가서 헤엄치고 목욕하고 나와서 자갈에 엎드려서 볕 보고, 몸 닦고, 집에 와서 배고프면 밥 먹고, 집안일 하고 빨래하고, 그랬으니까 아마 국민학교 졸업하고 나서 그 해부터 내가 개발을 시작한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시작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굴 깐 게 하얗거든요. 그거 바다에 던져놓고, 그 굴 껍데기 건져오는 거 하면서 놀았으니까. 사진 속(벽에 걸린 사진)의 저 친구들 다 그랬어요. 미역 뜯고, 우뭇가사리 뜯고, 그런 거 헸지요. 세월이 가니까 성게도 잡고 해삼도 잡고 전복도 잡고 멍게도 잡고 다 했지요. 잡아가지고 오면 용원 수협에 가서 경매를 했어요. 동네에서는 자유롭게 못 팔았어요. 어촌계를 통해서 관리를 했어요. 한꺼번에 팔아서 각각 주는 거예요. 수협에서 관리 안 할 때는 개인이 바다를 샀어요. 1년 치를 경매를 해서. 우리가 셋이고 넷이고 바다를 사려하면 싸움이 나니까, 경매를 해서 돈 많이 써 넣은 사람이 당첨 되구로. 그 걸린 사람 밑에 들어가서 품팔이를 했어요. 하루에 해삼을 10키로를 잡으면 1키로에 120원, 150원 받으면 그 돈만 내가 찾아오는 거예요. 한 50살이나 가까워서야 내가 잡은 게 온전히 내 몫이 되었지요. 작년까지 해녀 일을 했어요. 올해도 할 낀데 바다가 공사중이라 물이 어두워서 물건도 안보이고, 올 초 봄에 4월쯤, 반찬 한다고 미역은 조금 했어요. 우리 애들이 미역귀를 잘 먹어서 그거 한다고 이틀 했지요. 내가 심장이 안 좋아서 시술을 했거든. 병원에서 힘든 일은 하지 말라하대요. 그래서 못나가요.


  





저 사진 함께 찍은 친구들은 다들 어떻게 지내세요?

하늘나라 간 사람도 있고, 시집을 밖으로 간 사람도 많아요. 지금은 내까지 넷만 이 동네에 있어요. 아가씨 때는 할 거 없어서 모여 앉아서 수를 놨어요. 책상보에 수 놓고, 궤짝 위에 개놓는 이불 덮을 이불보 같은 거. 한 집에 모여서 쪼깨난 호롱불 켜 놓고. 제사 때나 촛불 쓰지 불이 어디 있었노. 요만한 호롱불에다가 처녀들 대여섯이 모여 앉아서 그 어두운데서 수 놓았어요. 열세 살에 625사변이 일어났는데, 미군들이 들어와서 롤롤거리는 소리 내는 거 보고 다들 겁이 나서 집에 제각기 숨고 그랬어요.                 

     

부모님은 어떻게 가덕도에 들어오셨나요?

부모님은 가덕도에 계속 살았어요. 우리 아버지는 원래 고향이 기장, 장안면 호암리 본토박이였고요. 우리 엄마는 제주도 사람이고요. 제주도에서 울산에 해녀 작업하러 나왔다가 우리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했어요. 가덕도에 물건 많이 있다고 여기 들어와서 자리 잡고 우리 낳고 키웠어요.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스물여섯에 결혼했어요. 조금 늦게 한 택이에요. 살림 살고, 가정형편도 안 좋아서요. 남편은 부산 사람인데, 우리 아버지가 사위 얼굴도 안보고 허락을 해버렸어요. 남편은 재혼이었어요. 중신애비가 우리 아버지한테 얼마나 구워 삶았는지, 나이는 많고 재혼은 해도 부산 범일동 시장에서 가구점 하고, 영도에서 극장을 운영한다고 해서, 말만 듣고 사진 한 장 보고 내 딸 준다고 결혼 시켰어요. 딸 낳고 6개월 만에 신랑이 죽었어요. 암으로. 사업 하던 사람이 절친한 친구한테 다 맡겼는데, 이 친구가 사기를 치는 바람에 화병이 난 거지요. 첫 남편 죽고 내가 7년을 딸 키우고 혼자 있다가, 아무래도 저 애를 공부시키자면 혼자 힘으로는 안 될 것 같았어요. 몇 군데서 중신이 들어와도 딸 데리고는 못 오게 해요. 자기들도 애가 있으니 아무리 부부간 애정이 있어도 금간다고 애는 외갓집에 두고 오래요. 그런데 나는, 남편 없는 세상은 살아도 자식 없는 세상은 못살겠대요. 절대 자식 떼놓고는 못 간다, 하고 7년 살았는데, 나이 많은 국민학교 교장이 중신이 들어왔어요. 젊은 사람이랑 재혼하는 것보다 나이 많은 사람한테 가면 이 애 하나만은 원만하게 살 수 있겠나 싶어서 33살에 61살 할배하고 결혼해서 40년을 살았어요. 우리 할배가 돌아가신지 7년째 나요. 사람들이 젊은 나를 얻었다고, 두밀도 초등학교로 전근을 시켰어요. 그런데 교장이라 하니 돈이 많은 줄 알고 섬에 젊은 사람들이 낙지 주낙하는 배를 하면 돈을 벌수 있다고 속여서 할배가 돈이 한 푼도 없이 됐어요. 그래서 내가 개발을 다시 시작했어요. 그래도 빚이 안 갚아지는 거라. 그래서 내가 모아놓은 돈을 다라모시(계) 안 넣었는가베. 30만원 좀 안 되는 돈을 다라모시 해가 빼고 넣고, 그 돈을 빼서 할배 저질러놓은 돈 다 갚았어요. 할 수 없어서 초가산간 집을 지어서 살다가 내가 개발해서 번 돈으로 이 집을 지어 내려왔어요. 고생, 내 말 못해. 내가 고생한 거 아무도 몰라. 소로 밭 다 갈고, 논에 모 심기 다 하고. 소가 내 빼면 따라가다가 엎어지고 다치고. 내 고생한 거 하늘이나 알지 몰라. 사람들은 교장 돈 얻어가지고 편안하게 산줄 알아요. 하늘이 내려다보지만, 나는 조그만치 거짓말도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따님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예, 딸이 시집을 잘 갔어요. 나를 닮아서 마음이 천심이라. 국민한교 2학년에 부산으로 전학시켰어요. 부산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보내고. 그런데 그게 한이 맺혀요. 대학에 간다고 공부하는데 밤에 참으로 뭐라도 깎아먹일걸, 애가 밤에 공부하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애미도 없이 지 혼자서 식은 밥 한 덩어리 먹고 학교 가서 저물도록 있다가 저녁에 와서 또 공부하고. 그래도 석대가리가 아니던가, 대학 시험에 붙었어요. 초등학교에서는 늘 월반을 했거든. 담임선생님이 그랬어요. 얘를 가르치려면 다른 학생이 뒤떨어지고, 다른 학생을 가르치려면 얘가 뒤떨어지니까 부산으로 전학을 시키라고요. 부산 가가지고도 그 많은 학생 중에서 잘 하는가 싶었어요. 어느 날 보니까 우등 뱃지를 달았는데, 다른 날 양식을 가지고 가보니까 우등 뱃지가 없는기라. 야야 니 뱃지가 없네, 카니까 우리 딸이 그때 딱 한번 거짓말 했어요. 친구가 집에 가면서 우등 뱃지를 빌려갔다고. 그런 줄만 알고 한 이틀 있으면서 반찬 해놓고 왔는데, 또 한 일주일 있다가 가보니까 또 뱃지가 없어요. 그제야 아 이놈이 거짓말 했구나, 했지요. 그래도 대학은 붙었으니까. 대학 등록금은 내가 다 해줬어요. 지는 혼자 자취해서 밥 해먹고.

     

댁이 바닷가에 있어서 태풍 피해를 많이 보셨겠어요.

가덕도에 태풍이 셀마, 매미, 이렇게 큰 게 두 번 왔어요. 올해 자가 태풍왔고요. 이 집 짓고 나서 태풍 세 번 지나갔어요. 매미 때는 마당까지 자갈이 다 들어왔어요. 파도가 치니까 담이 다 으깨지고, 마루에 냉장고 있던 게 나뒹굴고, 물이 한가득 우리 방에 다 들어오고, 장롱도 떠내려가고요. 집 뼈대만 남아 있었어요. 다행히 우리 애들이 일본에 있다가 마침 한국에 나와 있었어요. 우리 할배가 저쪽에 떠내려가는 거를 딸하고 내가 잡아 땡겨서 살렸어요. 울이 다 무너지고 없었을 정돈데요. 숟가락도 하나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우리 애들이 일본 가면서 즈그 살던 살림을 2층에다 갖다 놨거든요. 그걸 썼어요. 수재민 도우는 것도 없고. 우리 사위가 와서 사진 찍고, 항의를 하니까 요만한 가스렌지하고 쌀 쪼깨이 나오대요. 보상금도 나중에 나와서 늦게 50만원 받았어요. 집집마다 돈이 없어서 수협에서 마이너스 통장을 백오십만 원 빌려서 이 집 수리를 내가 다 했어요. 우리 집에 물가에 있으니까 우리 집이 제일 많이 부서졌어요.

     

가덕도가 달라졌으면 하는 점은 뭔가요?

거가대교 생기고 나서 대항 저리는 장사도 되고 좋은데, 우리 천성은 영 마 아무것도 안돼요. 보상도 못 받았고. 우리는 나이가 많으니 내일 죽어도 괜찮은데, 우리 후손들은 앞으로 발전이 잘 되어서 편한 세상 살도록 해주면 더 이상 바랄게 없어요.

     

     

          

     





1904, 흐르는 섬 가덕도

     

기획  부산광역시 강서구 문화체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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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김유리

원고  김유리

영상  문창현

사진/업로드 박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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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에 딸린 텍스트는 저자, 부산광역시 강서구청,

다양성출판사 키스더북스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 영상의 모든 인터뷰는 인터뷰이와의 동의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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