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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Designeer Nov 03. 2021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신문연재] 행복한 동네문화이야기 2021년 11월호 - 인생단상 #18

얼마 전 외할머니가 우리 가족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친청엄마가 직접 모시고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뵐 수 있었지만 대화를 나눈 적은 많지 않았습니다. 주무시다가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지 않으신 할머니의 손을 잡아보니 차가웠습니다. 죽음을 눈 앞에서 목도하고 촉감으로 느낀 것은 살면서 처음이었습니다. ‘죽음’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느꼈지요.



요즘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내와 해외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어떤 주제인지 전혀 모른 채 이 드라마를 접하게 되었는데, 456억원을 손에 넣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게임이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인간의 원초적인 내면에 대해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많아서 충격적이면서도 흥미로웠습니다.


456명이 처음에는 죽을 줄 모르고 게임에 임했지만, 나중에는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게임에 참여합니다. 허구이긴 하지만 현실에 기반한 이 드라마 속 사람들은 왜 목숨 걸고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요? 과연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선택의 연속인 우리의 삶, 인간의 심리, 비인간적인 잔혹함 등 생각해 볼만한 여러 소재 중 저는 ‘죽음’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책에서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는 불행해서가 아니라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믿음, 그 절망감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드라마 속 참가자들은 수십억의 빚을 지고 돈이 없어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자신의 삶,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죽음이나 다름없는 삶을 사느니 게임이라도 해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라 여겼을 테지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막상 눈 앞에 죽음이 다가오면 죽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며 안달합니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참가자들 모두가 게임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 더 낮아지지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애원하거나 죽을 수밖에 없음을 인지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자신이 죽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알았더라면 같은 선택을 했을까요? ‘죽음’ 앞에 살고자 하는 인간의 간절함과 처절함은 이전에 했던 자신의 ‘선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오로지 이겨야 하는 게임 속에서 서로를 쉽게 믿을 수 없고 상대가 죽기를 바라는 상황은 우리의 삶을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극중 인물 ‘상우’와 노인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주인공 ‘기훈’에게 이렇게 주장합니다. 살아남아 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운’과 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한 ‘노력’의 결과이므로 기꺼이 받아들여도 되며 그럴만한 권리가 있다고 말입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현실의 나는 456억원이 있을만큼 부유하지도 않고, 엄청난 명성을 얻은 것도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단순히 나 혼자 잘나서, 나 혼자 잘해서 얻은 결과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게임을 창안해 낸 주최자들은 경마장에서 어느 말이 이길지 내기하듯 참가자들을 대하며, 게임에서 지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므로써, ‘죽음’을 단순히 게임의 요소로 여기며 즐깁니다. 갇혀있는 트랙 안에서 달리는 경주마의 삶을 살든, 자신이 선택한 말이 우승하기를 바라며 내기를 즐기는 삶을 살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 앞에서 겸허한 태도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 ‘죽을 때가 되었다’, ‘나를 죽이려고 한다’와 같은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단어는 ‘살고자 하는 강한 의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삶은 드라마에서처럼 ‘살아있을 확률은 높지만 지옥같은 삶을 사는 인생’과 ‘일확천금의 기회를 얻을 수 있지만 죽을 확률이 현저히 높은 인생’ 둘 중에 하나를 꼭 선택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살면서 죽을 확률을 정확히 알 수 없기에 현재의 선택 하나하나가 더 소중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본 글은 지역신문 <행복한 동네문화이야기> 2021년 11월호에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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