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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멀미 May 20. 2021

물 한 모금

네팔 여행기

그리운 것들에게 가는 나만의 방식이 있습니다. 우선 그리움으로부터 가장 멀리 달아나버립니다. 외면과 회피의 옷을 입고 등을 돌려 달아난 다음, 한 걸음만 더 가면 이제 평생 그립지 않아도 될 그 마지막 위치에서, 회군하듯 다시 그리움을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움의 크기를 측정해보는 일. 얼마만큼 내가 그리움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지, 견딜 수 있는 것인지 알아보는 방법입니다. 가장 위험한 경로. 가장 큰 비효율. 가장 큰 낭비. 필요도 없는 생의 소모. 그것이 내가 그리움에게로 가는 길입니다. 


사랑할 것 같은 예감이 들면, 우선 그 예감으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내 마음을 데려갑니다. 아닐 것이야. 아니다. 절대 아니다. 수없이 다짐해 본 뒤, 끝내 부정할 수 없을 때에만 마음을 돌려 그 사랑에게로 다가섭니다. 그러니까 나의 사랑은 언제나 가장 먼 지점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사랑은 언제나 늦습니다. 대부분 실패입니다. 


안나푸르나로 가야만 했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네팔의 지도를 펼쳐놓고, 안나푸르나로부터 가장 먼 출발점을 찾았습니다. 동쪽 끝, 인도와의 국경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 그곳이 안나푸르나로부터 가장 멀었습니다. 당연하게도 나의 목적지는 그곳이 되었습니다. 가장 멀리 달아났다가 출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나는 가장 먼 곳에서 시작하여 너에게 가겠다. 필요도 없는 생의 소모입니다. 여행의 가장 큰 비효율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그리움에게 가는 나의 방식 그대로, 나는 안나푸르나로 향했습니다. 


박타푸르는 그렇게 해서 닿게 된 곳입니다. 반대편 경로에 있던 첫 도시였습니다. 해질 무렵 도착하여 큰 지붕이 있는 사원 근처로 숙소를 얻었습니다. 몸을 잠시 쉬고는 조금 걸어볼까 하고 나섰다가 첫 번째로 길을 잃었습니다. 분명히 이 붉은 벽돌 담장의 오른쪽 길이었는데, 아무리 걸어도 숙소가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착각한 걸까? 반대 방향으로 가 봐도 소용없습니다. 골목이 미로처럼 건물 사이로 숨어 있고, 그 엉킨 길을 지나 사원 뒤쪽으로 들어가 보면, 그곳은 전혀 다른 상점의 입구였습니다. 그 안쪽으로 속옷처럼 은밀한 골목이 하나 더 있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걸어보면 거기 또 다른 골목이 있었습니다. 


어렵게 묻고 물어 길을 찾아낸 다음 지친 몸으로 숙소에 누워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이곳은 골목의 도시가 아닐까. 건물이 아니라 골목이 주인인 도시. 아무리 오래 걸어도 박타푸르에 닿을 수 없고, 아무리 오래 걸어도 박타푸르를 떠날 수 없는 길이, 골목의 형태로 도심 안 쪽에 가득 채워져 있는 곳. 


박타푸르는 그렇게 그리운 것들에게 가는 나의 방식을 그대로 닮은 도시였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다음 날부터 하루 종일 골목을 걸었습니다. 박타푸르에서 출발하여 박타푸르에 도착하는 가장 먼 길을, 나는 사랑하며 걸었습니다. 


그 작은 사원에 들어가게 된 것 또한 오래 걸었고 또 의도적으로 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골목을 걷다가 어떤 독경 소리에 이끌렸을 때, 이미 그곳은 어떤 사원의 열린 출입문 앞이었습니다. 안쪽에서 모두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노란 승복을 입고 경전을 펼쳐둔 모습.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서 들어 와 앉으라는 눈빛이었습니다. 


내가 올 것을 미리 알았다는 듯 어떤 승려 옆으로 빈 방석도 있었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고 들어가 앉았습니다. 바로 옆 어린 승려가 일어나 잡고 있던 실의 끝부분을 잡아당겨 내 손에 쥐어 줍니다. 그들 모두가 긴 실 하나를 늘어뜨려 잡은 채 서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끝부분을 내게 이어 준 것입니다. 그렇게 실이 연결되자, 그것이 신호였다는 듯, 다시 독경이 이어졌습니다. 


누가 당기는지 가끔씩 그 실이 팽팽해지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놓치지 않으려는 내 손도 함께 팽팽해졌습니다. 실이 느슨해지면 내 손도 느슨해졌습니다. 그것이 어떤 종교적 의미였는지, 아니면 어린 승려의 장난이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팽팽하고 느슨해지던 실의 장력이 알 수 없는 힘으로 그날의 나를 위로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떨어진 끈처럼 방황하며 오래도록 혼자였던 나는, 그곳에서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한 가닥으로 그들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누가 당기지도 않았는데, 나는 가끔씩 온 힘을 다해 그 실을 꼭 쥐곤 했습니다. 

긴 독경이 끝난 뒤의 일입니다. 어린 소녀가 작은 주전자를 들고 내게 다가오더니 잔도 건네지 않고 그 주전자를 조금 기울입니다. 이것 또한 종교적 의식인가. 흰 실의 맨 끝 부분을 잡고 있던 사람에게 처음으로 물을 건네는 것인가. 어색한 자세로 손을 내밀어 그 물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표정이 근엄합니다. 이 물을 어쩌라는 것일까. 마시라는 거겠지. 손바닥에 고인 그 물을 입술로 가져가 삼켰습니다. 풉. 하하하. 갑자기 모두가 웃습니다. 웃음소리가 독경보다 크게 사원을 채웁니다. 다음 승려의 모습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왼손으로 받은 물을, 오른손으로 찍어 씻어내듯 눈과 귀에 바르는 게 아닙니까. 


그 물을 마시고 돌아와 박타푸르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습니다. 모처럼 깊은 잠과 평온한 꿈이 이어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생각했습니다. 오래 걸었기 때문일 거야. 아니 어제의 내가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 그것도 아니라면 그 물을 마셨기 때문이겠지. 짐을 챙겨 나올 때 숙소의 열쇠를 보고 알게 된 사실도 있습니다. 며칠 동안 내가 묵었던 방의 이름이 바로 안나푸르나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멀리 달아나려 해도 결국 첫 지점부터 안나푸르나였던 것. 박타푸르에서 아무리 멀리 걸어도 박타푸르였던 것처럼, 아무리 멀리 떠나와도 나는 아직 당신 곁에 있는 것입니다. 


긴 실 하나가 내 손에서 이어져 나와 먼 당신의 손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허공으로 손을 뻗어 그 투명한 줄을 조금 당겨봤습니다. 당겨집니다. 이 모든 게 어제 마신 물의 힘일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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