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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윤 Oct 05. 2020

아무 글이나 일단 써보자

아무거나 생각나는 걸로~

나의 브런치는 정체성을 잃은 지 오래다. 처음 브런치를 오픈한 게 2016년인데 꾸준히 쓰지 않아서 글도 몇 개 없고, 그나마 몇 개 없는 글들도 다 중구난방이다. 처음 브런치를 오픈한 계기는 여행기를 써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다가 런던이라는 도시에 살며 취업이라는 걸 하게 되어 그쪽으로 방향을 약간 틀어볼까 시도해보았지만 이내 급격하게 겸손해졌다. 내가 뭐라고... 그냥 나는 운이 좋았던 건데... 그러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글을 거의 올리지 않다가 책 리뷰, 필사, 일기 정도만 맥락 없이 드문드문 올렸다. 그리고 이제는 에라 모르겠다. 어쩔 수 없다. 의 심정이 되어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부담감은 벗어버리고 자유롭게 아무거나 써보려고 한다.




우선 근황을 적어본다. 2020년 10월에 접어든 현재, 나는 글로벌 팬데믹 시대 여느 누구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생활 반경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제대로 된 휴가 없이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산 게 어언 10개월째다. 올초 일기장에 빼곡하게 적어두었던 올해의 계획들 중 상당수가 손 써볼 틈도 없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심지어 꽤나 잘 적응하고 있다(아마도?).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올해 2월부터 휴가 여행 계획 다섯 개를 취소했을 때에도 괜찮았다. 시국이 시국이니까. 언젠가는 지나갈 일이라고 믿으면서. 그렇지만 사라진 다섯 개의 여행을 보상하는 심정으로 손꼽아 기다려왔던 8월 말 친구들 및 가족과의 제주 여행을 여섯 번째로 취소했을 때에는 사실 멘탈 타격을 꽤 크게 받았다..ㅠ 근데 뭐 어쩌겠나. 다행히 나는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일에 미련을 갖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비대면 시대임에도 사랑과 우정이 시험받지 않고, 가족들과는 오히려 더 긴밀한 시간을 자주 가질 수 있었던 것에 집중해보기로 했더니 상황을 조금 더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올해에는 연봉협상 테이블이 사라지고 연봉 동결이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저 여전히 일할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가끔 우리는 내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으면 실재하지 않는 일이라고 여겨버리는 오류를 저지른다. 우리 동네에 사는 아기들은 다 잘 먹고 잘 사니까 전 세계의 기아문제가 소설 속 일 같기만 하고, 내가 아는 그 여자는 승진하고 잘 나가니까 여성들이 겪는 유리천장이라던가 임금차별 문제는 자극적인 기사를 쓰기 좋아하는 기자가 꾸며낸 이야기 같기도 하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그 좁은 시야를 넓히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책을 읽고, 뉴스를 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끊임없이 질문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코로나로 실직이 크게 늘었다던데 나도 그렇고 내 주변은 다들 회사 잘 다니던데?라고 가볍게 눈 감아버렸다면 나 역시 연봉 동결 소식에 그저 짜증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세상의 다양한 면을 알고 이해하고 또 받아들이고 행동하며 살고 싶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섣불리 재단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나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사는 사람, 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으며 사는 사람, 나한테 편한 곳이 좋은 세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만은 절대로 되고 싶지 않다.




2020년을 계획한 대로 보낸 사람이 전 세계 통틀어 거의 손에 꼽을 것이라는 사실이 묘한 안도감을 주는 건 왜일까? 2019년의 마지막 날 받은 신년카드에 적힌 Wish you a wonderful New Year! 가 무색해진 나의 2020년이 눈물 찔끔 날만큼 아깝다가도 나만 그런 게 아니니까... 하는 생각에 조금 덜 억울 해지는 건 대체 왜일까? 아마 그건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확인이 주는 소속감과 위로의 힘이 생각보다 크기 때문 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약점'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만약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 아름다운 계절을 만끽하며 마음껏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낼 때 나 혼자만 많은 것을 참아가며 집 안에 박혀 있어야 했다면 나는 정말 지금보다 열 배 백배는 더 슬프고 우울했을 것 같다. 그런데 어쩌면 지구 반대편에 사는 누군가도 나와 같은 상황에 놓여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위로가 된다.


생각해보면 늘 그랬던 것 같다. 언젠가 힘든 일을 겪고 그걸 잊기 위해 잔뜩 벌려놓은 일에 역으로 짓눌려 감당이 안 되는 불안함에 자주 울던 때가 있었는데, 당시 내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말은 '그게 정상이야'였다. 언제나 남다르고 싶던 나였는데,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된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아 남들도 다 겪는 일이구나. 나에게만 있는 줄 알았던 약점을 다른 누군가도 가지고 있더라는 사실에 반응하는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자면 그 이름은 공감과 연대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힘은 굉장히 세다.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누군가와 함께 마주 앉아 '많이 힘드시지요. 저도 그 마음 다 압니다. 그래도 우리 함께 힘내요.' 하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된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약자와 소수자를 위해 연대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공동체가 있는 걸 생각하면 이 힘을 이해하기 쉬워진다. 이 팬데믹도 같은 논리로 조금 더 슬기롭게 헤쳐나가 볼 수 있지도 않을까?


나는 지금 너무 답답하고 종종 기분이 폭삭 가라앉기도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무기력해질 때도 있고, 미래를 떠올려보려고 하면 자꾸 회색 먹구름이 낀 것처럼 뿌예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걸 잊지 말자. 지금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지극히 정상이며, 나와 같은 마음으로 힘들어하는 누군가가 반드시 있을 거라는 것, 나의 마음을 공감해주고 이해해줄 사람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나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숨기보다는 나의 마음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누면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도록 하자.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공감하고 위로해주며 함께 나아가는 것만이 이 어려운 시기를 이길 유일한 검증된 해결책이다.




대 집콕 시대, 줄줄이 취소한 여행으로 환불 비가 통장에 성실하게 입금되자 나는 이 돈을 어떻게든 다 써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소비가 주는 행복감을 무시하지 말자. 어차피 여행을 갔으면 다 썼을 돈인데 상관없는 거 아닌가? 의 심정은 자연스럽게 집에 머무는 시간 동안 삶의 질을 높여줄 만한 물건들을 구매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주로 먹는 것과 보고 듣는 것에 대부분의 지출이 집중되었다.


우선 첫 번째로 주저할 것 없이 커피 원두와 프렌치프레스를 샀다. 8월 말 수도권에는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실행되어 프랜차이즈 카페는 모두 테이크아웃만 가능해졌고, 재택근무가 장려되었다. 졸지에 사랑하는 스타벅스에 앉아있지 못하게 되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노트북 옆에 두고 마실 커피를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커피라는 건 워낙 전문가나 기계가 만들어주는 맛을 아마추어가 절대로 따라 할 수 없다는 믿음 + 은근히 번거로운 커피 찌꺼기 버리는 일 + 마음에 쏙 드는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는 주문을 살짝 까다롭게 커스토마이징하는 편인데 그걸 집에서 어떻게 만들어?라는 이유로 커피라면 무조건 사 마시는 걸 선호했었다. 그런데 집콕 시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흥미를 돋울만한 소일거리가 절실했던 것이다. 집에서 커피를 직접 만들 수 있는 방법으로 핸드드립, 프렌치프레스, 커피 머신 등등을 알아보다가 핸드드립은 몇 번 망한 경험이 있고(그리고 귀찮고), 캡슐커피머신은 너무 맛없고, 에스프레소 머신은 과하게 본격적이라서 쉽고 간편한 프렌치프레스로 결정했다. 게다가 나는 잎차를 자주 마시니까 차 우리는 용도로 겸사겸사 사용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프렌치프레스 도구 자체는 프랑스가 아닌 덴마크 회사 보덤에서 처음 출시되었다는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두는 추출 도구에 따라 굵기를 서로 다르게 그라인딩 해야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물에 닿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굵게 그라인딩 한다.) 프렌치프레스는 원두가 물에 직접 닿는 과정을 통해 커피가 만들어지다 보니 타 추출 방법에 비해 카페인 농도가 조금 더 높을 수 있다는 막간 지식도 얻게 되었다. 행동을 했을 뿐인데 기대한 적도 없던 지식이 선물처럼 저절로 따라왔다. 그냥 '커피를 집에서 추출하는 방식 중 하나로 프렌치프레스가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과, '프렌치프레스로 직접 커피를 내려보자.'라고 행동하는 것에는 그러한 차이가 있었다. 행동 후의 기억이 언제나 더 짙게 남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두 번째 집콕 소비의 지분은 마켓컬리에 상당 부분 할당되어 있다.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정말 마켓컬리의 짱팬이다... 주변에서는 날 마켓컬리 전도사라고 부른다. 마켓컬리야말로 라이프스타일 상향 표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플랫폼이 아닐까!? 단순히 아무 상품이나 의미 없이 나열하여 빠르게 배송해주는 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마켓컬리는 정말 상품 셀렉부터 아트 디렉션이 꼼꼼히 들어간 스틸라이프 슈팅에 카피와 에디팅까지.. 삼박자가 그야말로 완벽하다. 값이 조금 더 나갈지라도 맛과 질이 뛰어난 식재료와 식품에 과감히 돈을 쓸 의향은 있지만 그것들을 사러 늘 압구정 갤러리아 고메 섹션이나 SSG 푸드마켓, 커다란 이마트를 뒤지고 다니기는 귀찮은 나 같은 사람에게 마켓컬리는 단비와 같은 존재다. 빵 하나를 먹어도 파리바게뜨 우유식빵 말고 진짜 유러피안 홀그레인 브레드를 먹고 싶은데, 마켓컬리에서는 오늘 밤에 주문하면 내일 새벽에 우드앤브릭 호밀 사워도우를 집 앞에 배달해주니 이건 뭐... 내 삶의 질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는 두 번 말하면 입이 너무 아프겠징. 등급제와 적립금, 쿠폰으로 마케팅과 동시에 고객관리까지 하는 건 또 어떻고. 원래 신규 유입된 뉴 유저가 리턴 유저가 되고 결국 충성고객이 되어야 브랜드가 오래가는데 마켓컬리는 이걸 너무 잘 알고 제대로 이용한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충성고객이 되었다. 이거 다 마케팅 전략이구나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면 결제 버튼을 누르고 있다. 하여간에 마켓컬리 전략이랑 톤 앤 매너랑 카피 진짜 좋아.


마켓컬리에서도 자주 사는 물품들은 정해져 있다. 이번에도 식량을 두둑이 채워놓을 요량으로 평소에 하나만 살 거 두 개 사두는 식으로 제대로 지출을 하였다. (뿌듯) 우선 우리 집 냉장고에서 절대 떨어지면 안 되는 1번은 뷰코 코코넛밀크이다. 코코넛 밀크는 100% 비건 식품이면서도 일반 우유보다 훨씬 더 맛있다. 콜드 브루에 타 마시면 콩다방이 따로 없고 무엇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방법은 냉동 와일드블루베리에 그릭요거트 두 스푼 더한 뒤 코코넛 밀크로 갈아 만든 블루베리 스무디이다. 와일드 블루베리는 일반 블루베리보다 알이 작지만 색이 훨씬 진하고 당도가 더 높아 꿀이나 시럽을 넣지 않고도 달콤한 스무디로 만들기에 제격이다. 여기에 토스티드 코코넛 플레이크까지 위에 뿌려서 마시면 정말... 매일매일 마셔도 질리지 않는 든든한 아침식사가 된다. 6-7천 원 내고 사마시는 블루베리 스무디보다 훨씬 달콤하고 그 달콤함은 순식간에 행복감으로 번진다. 다 마시고 나면 입술과 혓바닥이 거짓말처럼 보랏빛으로 변해있는 것도 아이 같아서 재미있다. 한 번은 코코넛 밀크가 떨어져서 오트 밀크를 대신 넣고 갈아봤는데, 블루베리랑은 딱히 어울리지 않아서 별로였다. 그 이후로 코코넛 밀크는 냉동 와일드블루베리, 그릭요거트와 함께 무조건 떨어지지 않게 충분한 양을 늘 냉장고에 구비해두는 편이다. 유통기한도 길다!


두 번째로는 블루베리 스무디와 함께 나의 아침을 열어줄 아침식사 메뉴를 위한 식재료이다. 기본적으로는 빵+치즈+채소를 넣은 샌드위치인데, 나는 특히나 사과와 브리치즈의 조합을 굉장히 사랑하여서 브리치즈 역시 떨어지지 않게 늘 구비해둔다. 마켓컬리에 파는 브리치즈 중에는 카스텔로 브리치즈가 맛있다. 컬리에는 없지만 이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상하치즈 브리치즈나 까망베르도 고소하니 맛이 정말 좋다. 국산품의 장점은 역시 맛보다는 유저의 사용성을 생각한 세심한 포장에서 그 빛을 발하는데, 카스텔로 브리치즈는 치즈를 감싼 비닐 테이프를 벗기는 게 약간 불편한 것에 비해서 상하치즈는 삼각김밥처럼 '이 줄을 잡고 당기세요.' 식으로 포장되어 있어 치즈를 꺼내기가 정말 쉽다. 가끔 수입품과 국산품에서 이런 아날로그 유저 익스피리언스에 대한 고찰이 있고 없고를 발견하는 게 재밌다. 이런 관점에서는 무조건 국산품의 승리다. 아무튼 브리치즈와 사과만 넣는 게 아니고 여기에 루꼴라를 꼭 듬뿍 곁들여야 하고, 빵에는 버터나 잼이 아니라 꼭 꿀을 발라야 한다. 여기서 꿀은 무조건 대니시비키퍼스 로모 섬의 봄 꿀로. 대니시비키퍼스 꿀은 스프레드 형태라서 빵에 발라먹기에 아주 찰떡이고 봄 꿀, 여름 꿀, 가을꿀 중에서 브리치즈+사과와 함께 제일 잘 어울리는 조합은 역시 약간의 박하향이 감도는 상쾌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봄 꿀이다. 빵은 부드러운 하얀 빵보다 거친 갈색 빵이 좋다. 우드앤브릭 호밀 사워도우나 그레인 브레드를 살짝 토스트 하여 바삭하게 만드는 방법이 내 취향이다. 한입 크게 베어 물었을 때 빵이 바사삭 갈라지면서 빵에 발려 있던 꿀 맛이 입에 확 퍼지고, 사과의 아삭함과 브리치즈의 몰캉한 식감이 어우러지며 달콤함과 상큼함이 한꺼번에 느껴지려던 찰나 루꼴라의 쌉싸름함이 더해지면서 그 맛이 궁극의 밸런스를 이룬다. 재택근무를 하는 내내 나의 아침은 늘 브리치즈 샌드위치에 블루베리 스무디였고, 이렇게 시작하는 아침이라면 아무리 이른 시간이라도 언제든 꿈꾸듯 행복할 것 같았다.


집콕 기간 동안 아침은 블루베리 스무디와 브리치즈 샌드위치로 시작하고, 이른 오후에는 프렌치프레스로 직접 커피를 내려마시니, 내가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이 정도면 제주도 못 간 거 치고 집에서 잘 먹고 잘살며 돈도 필요한 곳에 진짜 잘 쓴 것 같았달까. 이런 기분을 얻을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더 바라는 것이 없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집콕 소비는 작은 휴대용 스피커이다. 침실에 두고 쓸 작은 스피커를 하나 사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비행기 값이 환불되자마자 더 미루지 말고 하나 사기로 했다. 가성비만 따지기는 싫고 하이 퀄리티의 음질이 구현되는 스피커를 원했고 여러 비교 끝에 나의 선택은 뱅앤올룹슨 베오플레이 P2 샌드 컬러였다. 18만-19만 원 사이 정도 나쁘지 않은 가격에 작은 방을 꽉 채우는 음질에 휴대하기에도 간편하며 슬릭한 디자인에 반해 골랐다. 스피커가 없을 때는 몰랐는데, 스피커를 통해 듣는 음질이 확실히 그냥 랩탑이나 핸드폰으로 듣는 것에 비해 훨씬 현장감 넘치더라. 밤에 음악 틀어놓고 춤추면 기분이 굉장히 좋아지는 거 다들 아셨나요? 이렇게 즉석으로 기분전환이 되는 방법이 있었다니 이걸 몰랐던 지난 내 인생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스피커로는 넷플릭스도 보고 라디오도 듣는다. 특히 자기 전에 밤에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책 읽고 일기 쓰는 게 하나의 리추얼이 되어버렸다. 무슨 음악을 들으면 좋을지 모르겠을 때 난 늘 BBC 라디오 채널 6을 튼다. 무료 앱이고 BBC 라디오를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다. 물론 시차 때문에 밤에 듣는 라디오에서 좋은 아침이라는 말을 듣게 되기도 하지만, 그거 빼고는 다 좋다. BBC 라디오에는 채널이 여러 개인데 6 채널은 음악 중점 채널로 배철수의 음악캠프 같은 코너가 다양한 버전으로 하루 종일 이어진다고 보면 된다. 영국 방송국에서 음악 중점으로 트는 라디오인데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60년대 70년대 시대별로 음악이 나오기도 하고, 전설적인 밴드의 전기를 보이스 다큐멘터리 형태로 내보내기도 한다. 아니면 그냥 진짜 끝내주게 좋은 음악이 계속해서 나온다고 생각하면 된다. 트렌디한 음악만 나오지 않는다는 게 제일 좋은 점인데, 그 와중에도 반복해서 자주 나오는 노래는 꼭 있다. 요즘에 제일 많이 플레이되는 음악은 Arlo Parks의 Hurts와 Poppy Ajudha의 Watermelon Man, Doves의 Prisoners 인 듯하다. 라디오를 듣다가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음악을 발견하면 바로 내 개인플레이 리스트에 더해두고, 그러면 꼭 지갑에 두둑하게 돈을 넣는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집에서도 나 스스로를 아끼고 돌봐줄 수 있는 방법이 너무나도 많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행복감을 선사하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다거나 전에는 생각해본 적 없던 방식의 도전을 해보고 직접 행동해보는 것과 같은 적당한 정도의 자극을 꾸준히 느끼는 것만으로 나는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진지하게 대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보낸 하루의 끝에는 늘 한 줄 일지라도 일기장에 어떠한 작은 문장이 적힌다. 그런 날을 조금 더 많이 만들고 싶다. 고요함 사이사이에 작은 뿌듯함과 흥분이 진동하는 날들을 말이다. 좋아하는 것들로 머리와 배를 채우고 감각을 활짝 깨우고 싶다. 지금 나에게 찾아온 이 느낌을 부지런히 느끼고 기억하고 싶다. 그것들을 솔직하게 표현해내고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더더욱 강렬하게 든다.


언젠가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거짓말 같은 일들을 과거로 회상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땐 그렇게 밖에도 잘 못 나가고, 하늘길이 막혀서 여행도 못 갔고, 어딜 가든 마스크를 써야만 했었어. 하는 날. 그런 날이 왔을 때 암울했던 나날들로만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그 불확실의 시대 속에서도 좋은 일은 늘 있었던 나날들로 기억하고 싶다. 작은 걸로 나를 위로해야만 했고 감사해야만 했던 시기였다고, 그래서 그 일을 절대로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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