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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윤 Oct 11. 2020

땡큐 그레이스 앤 프랭키!

새로운 인생 멘토를 만났습니다

*해당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레이스 앤 프랭키는 애초에 스포일러랄 것이 없으며, 받아들이는 입장에 따라 스포일러라고 느낀다고 하여도 그것이 극의 내용이나 의미를 절대로 좌지우지하지 않으니 안심하고 편하게 읽어주세요.




살다 보면 가끔 스스로가 너무나도 기특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 솟구치는 엔돌핀은 열흘의 피곤함을 단 일분만에 풀어버린다. 최근에 난 이 엔돌핀을 제대로 맞았다. 엔돌핀의 원천은 넷플릭스 시리즈 '그레이스 앤 프랭키'다. 넷플릭스에서 이 시리즈를 찾아내고 시작한 스스로가 정말 기특하다. 그 볼까 말까 하는 찰나의 순간에 볼까의 직감을 믿고 재생 버튼을 누른 나 자신이 진짜 진짜 자랑스럽다. (내가 찾아낸 게 아니라 넷플릭스 알고리즘 덕분이라는 사실은 이 기분을 조금 더 만끽하기 위해 잠시 넣어두자)


어떤 작품을 보고 '이건 지금 내게 딱 필요한걸 하늘에서 선물로 내려준 게 분명하다!'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때가 왕왕 있는데,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그랬고, 오랜만에 그레이스 앤 프랭키가 그렇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그레이스 앤 프랭키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40년 동안 함께 산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커밍아웃을 하며 이혼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 동성 파트너가 반평생 가장 가깝게 지내온 이웃 부부의 남편이다. 단순한 이웃을 넘어 이들은 비즈니스 파트너이기도 했다. 남편들끼리 맨날 출장 간다고 하더니 알고 보니 그게 다 몰래 바람피우러 간 거였다. 무려 20년 동안이나. 여기서 난데없이 커밍아웃과 이혼 요구 폭격을 쌍으로 맞은 아내들이 바로 그레이스와 프랭키다. 헐 진짜 개파격 아닌가? 우선 주인공이 70대 여성 두 명(시즌6까지 가면서 나이대는 80줄이 된다)이라는 것부터가 신선함 그 자체인데, 내용은 더 기가 찬다. 노년을 다루는 서사가 황혼의 아름다움, 지혜와 현명함에서 나오는 통달한 부처 미소, 인생 후반부 건강의 쇠퇴를 통해 깨닫는 삶의 소중함...(아련+눈물)에 집중된 게 아님이 분명해진다.


아무튼간에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어찌어찌 같이 살게 된다. 더 이상 남편들과 함께 살 수는 없었으니까. 이미 전남편 둘은 이사를 마치고 결혼식까지 준비하고 있는 단계였다.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서로 상극 중의 상극이지만 힘든 시기를 같이 겪어낸 것을 계기로 결국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동거인이자 소울메이트가 된다. 그리고 둘은 이혼 후 찾아온 삶의 모험을 함께 헤쳐나간다. 그것도 아주 용감하고 멋지게! 그 모험은 새로운 연애, 새로운 사업,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감정 등등 온갖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고 20년 동안이나 성 정체성을 숨기고 바람을 핀 걸로도 모자라 아내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은 남편들은 극악무도한 파렴치한으로 남아있느냐? 그것도 아니다. 남편들 역시 결국에는 본인들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결정을 한 것이고, 그들은 이기적인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커밍아웃과 결혼을 통해 더 늦기 전에 두 번째 삶의 기회를 쟁취한 것이었다. 누구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가 아닌 진정 자신을 위해 살 두 번째 기회.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처음엔 엄청난 분노와 배신감과 충격에 치를 떨었지만, 이내 이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서로의 인생의 일부분으로 남아있는다. 어쩌면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져버렸을지도 모르는 그 시간 동안 그레이스에겐 프랭키가, 프랭키에겐 그레이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는 이게 완전 비현실적이고 개막장이고 이런 것도 다 미국이라서 가능한 거지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잊지 말자. 우리에겐 남의 인생과 결정을 함부로 평가하고 재단할 권리가 없다. 그리고 원래 드라마 밖의 삶이 드라마보다 백배 천배는 더 드라마틱하다. (물론 극적인 요소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프랭키와 그레이스. 출처: 넷플릭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레이스 앤 프랭키를 보기로 결정했던 나 스스로가 왜 그렇게도 자랑스러웠는가 하면, 그때의 작은 선택이 불러온 나비효과가 너무나도 파워풀하기 때문이다. 그앤프를 본 뒤의 나는 이전보다 더 자신감 있고 용기 있는 여성이 되었다. 게다가 마침내 평균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고 다짐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많은 드라마에서 해피엔딩과 결혼은 동일어였다. 결혼에 <골인>한 행복한 커플이 자막의 몇 달 후... 를 기점으로 배가 불러온 상태로 나타나면 완벽한 마무리가 된다. (여기서 임신 확인할 때 꼭 깜짝 놀라 줘야 됨) 임신 단계 건너뛰고 작고 귀여운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야기는 항상 여기에서 끝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완벽한 가족이 40년 후에는 어떤 모습일지 까지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결혼(혹은 임신이나 아기 낳기)에 성공했으니 주인공들의 삶은 이후 술술 잘 풀릴 거라고 오해한다. 그리고 그걸 실제 삶에도 대입시킨다. 이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의 모습을 더 다양하게 담아내지 않았던 미디어의 탓이 크다. 자 그럼 이제 한 번 상상해보자. 이들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라는 완결 이후 40년이 지났다. 물론 여전히 사랑이 넘치는 커플이자 가족일 수도 있다. 그런데 아닐 수도 있다. 결혼한 지 20년이 지나서 갑자기 남편이 본인의 동성애적 정체성을 깨닫게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했는데 알고 보니 불임이라 안타깝게 아이를 갖지 못할 운명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아이는 잘 낳았는데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거나 건강검진에서 암을 발견할 수도 있다. 결혼과 출산은 분명 커다란 이벤트이지만 거기가 끝이 아니라 사실 그 이후에 펼쳐질 인생이 훨씬 훨씬 더 다이나믹하다. 우리는 이걸 종종 잊기 때문에 결혼 혹은 출산까지 만을 인생의 마일스톤으로 삼게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나만해도 내 짝을 찾지 못하거나 아이를 낳지 못한다면 나의 노년기가 너무 쓸쓸해질까 봐 두려워하곤 했다. 나 역시도 미디어의 모습에 익숙해져 마치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는 것이 그 이후 나머지 인생을 책임져주기라도 하는 듯이 생각했던 것이다. 결혼과 정착, 출산이라는 단어가 점점 어깨 위 숙제처럼 느껴지는 어른이 된 것에 스스로 소름 끼쳐하며 어느 정도 평균의 틀에 맞춰지고 싶다는 생각, 그러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걱정을 늘 일부분에 가지고 있었다. 10대 때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20대가 되었을 때 좋은 대학에 못 가고 그러면 30대에 좋은 직장 절대 못 가지고, 그러면 결혼을 월세로 시작해야 하고 그러면 돈을 못 모으고...라는 식의 가지 뻗어가기식 논리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는 K-청년들이 인생의 각 마일스톤 별로 주어진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면 대단히도 불행한 노년기를 맞이할 것이라는 일종의 귀납적 공포증을 갖게 되는 건 어쩌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이 허구에 가까운 망상을 아주 통쾌하게 산산조각 내준다.


출처: 넷플릭스


그레이스와 프랭키도 40년 전에는 행복한 커플로서 결혼에 성공하였다는 사실에 숙제 하나를 해치운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예쁜 두 딸도 낳았다. 프랭키는 안타깝게도 그토록 원했던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운명임을 알게 된 후 두 아들을 입양하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그녀들의 아들 딸들도 모두 어른이 되었고, 그 이후에는 위에서 설명한 대로다. 인생의 짐을 조금씩 내려놓고 그저 편하게 지내기만 하면 되는 지점에 도착했을 때 지금까지의 인생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발칵 뒤집어버리는 초초초대형 쓰나미가 온 것이다. 사실 이것을 '발칵'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 40년의 세월을 지나오며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어딘가 이 부부생활에 문제가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즌1에서 커밍아웃 후 전남편이 된 로버트가 그레이스에게 묻는다. '나와의 결혼생활이 정말 행복했었냐'라고. 그 질문에 그레이스는 '남들도 다 이러고 사는 줄 알았기에 이 정도면 행복한 건  줄 알았다'라고 대답한다. 사실 그녀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가 이미 성공적인 사업가였고, 돈 잘 버는 변호사 남편에 딸 두 명까지 건강히 키워냈으니 사실 겉모습으로만 보자면 상위 10% 안에 드는 삶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그녀는 남편과 진정한 반쪽으로서 서로 교감하지 못했고 충분한 사랑을 주고받지 못했다. '이 정도면 되었다.'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모르게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었던 건 이혼 후 프랭키와 함께하면서부터 였다.


이 드라마가 정말 멋진 건 그 과정을 세상 쿨하게 그려낸다는 것에 있다. 그레이스와 프랭키가 70대에 들어서야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고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발견하고, 종교적 신념에 가까웠던 가치관을 흔들어가면서까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는 것까지만 말하면 이 드라마의 위대함을 반도 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70대에 들어서 새로운 연애가 싹트려던 때 그레이스는 그로부터 답장이 없는 페이스북 메시지 때문에 손톱을 달달달 물어뜯는다. 그레이스가 새로운 연애에 설레 할 때 프랭키는 부엌에서 그녀만의 방식으로 천연 질 윤활제를 만든다. 우리 나이 때는 건조하다면서... 그리고 그녀들이 의기투합하여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엔 그 아이템이 바로 바이브레이터였다. 바이브레이터가 젊은 여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것을 생각하면 꽤나 파격적인 아이템이다. 하지만 이건 노년기의 여성들이 더 이상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들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이 점을 아주 제대로 파고들어 바이브레이터계의 퍼플오션을 개척한 것이다.


그레이스와 프랭키를 보고 나서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의 롤모델을 전면 재정의하였다. 예전에는 막연하게 한가로운 정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양 옆에 손자 손녀들이 뛰노는 평화로운 할머니, 은퇴 후 남편과 여행 다니는 모습을 상상했었다면 (그리고 그걸 이루기 위해서 언젠가 결혼도 해야 하고 애도 낳아야 하는데! 정원 딸린 집에서 살려면 은퇴자금까지 착실히 모아야 하고!!라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지금은 달라졌다. 물론 정원 딸린 집과 평온하게 책을 읽을 수 있고 여행도 다닐 수 있는 건강함, 토끼 같은 손자 손녀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겠지만 나의 깨달음은 본질은 그게 아니라는 것에 있다. 나에게 필요한 건 결혼 생활과 남편이 아니라, 교감할 수 있는 소울메이트 라는 것. 그 소울메이트는 남편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다. 혹은 나 자신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절대로 인생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완벽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언젠가 예상치 못한 파도가 덮쳐올 수도 있고 삶이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왕이면 쿨하게 나아가고 싶어 졌다. 이상적인 노년기라고 하면 괜히 푸근하고 인자하고 넉넉한 인심의 할머니만을 생각했는데 그것보다는 나의 가치관이 뚜렷하고 여성으로서의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사업에 뛰어들만한 용기와 배짱이 있고, 새롭게 사랑을 시작하는데 눈치 보지 않고, 정의롭지 못한 일에는 먼저 나서서 목소리 낼 줄 알고, 이런 불타는 열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늙은이 취급하는 애들 앞에서는 과감히 가운데 손가락을 펼쳐 보이는 70대, 80대가 되고 싶어 졌다.


그레이스 앤 프랭키가 너무나도 좋았던 이유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할머니'의 모습을 다룰 때 흔히 미디어에서 사용하는 클리셰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나 한국 미디어의 전형적인 할머니는 자식을 위해 한 몸 희생하는 순고한 사랑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레이스는 자기 손자 네 명 이름도 다 못 외운다. 프랭키는 본인 손녀가 너무 예뻐죽겠기는 한데 실수로 애를 돌보다가 길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나는 늘 우리네 부모님들이 자식이 아니라 본인들을 위한 삶을 더 갖게 되기를 바라고, 미디어에서도 그런 모습을 더 자주 보고 싶다. 신파극은 지겹다. 가죽 스키니진과 스모키 화장을 하고 바에 가는 할머니, 보드카를 물처럼 마시고 대마를 숨 쉬듯 들이 마쉬는 할머니들을 나는 더 많이 보고 싶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중년과 노년의 사람들도 그런 모습을 보고 <진정으로 나답게,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한 영감을 더더더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




덧1: 이렇게까지 길게 말할 것도 없이 그냥 생각 없이 봐도 개그감 + 넷플릭스 초월 번역 만으로 100% 재미를 보장하니 넷플릭스에서 뭐 볼지 모르겠을 때 그레이스 앤 프랭키를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당신이 여성이라면, 열 배로 추천합니다.


덧2: 최근 흥미롭게 읽은 기사를 첨부합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510707?lfrom=facebook&fbclid=IwAR0mywo4-Xq10vra1NHrX_i0LHlZBUYT3f0dU75HT_mu24q0Y0Lyyf5fu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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