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폴의 드래그 레이스>를 보며
혹시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라는 프로그램을 아시나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TV 쇼인데요, 드래그 퀸들이 드래그 슈퍼스타 자리를 놓고 벌이는 경쟁 쇼예요. 루폴은 쇼의 진행자이자 레전드 슈퍼스타 드래그 퀸이자 언더 문화였던 드래그를 메인 스트림으로 끌어올린 주인공이고요. 루폴과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는 매일이 새로운 역사예요.
최근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로 루폴은 에미상 역사상 가장 많은 상을 받은 흑인이 되기도 했어요. (기사 참조)
https://edition.cnn.com/2021/09/19/entertainment/rupaul-emmys/index.html
루드레의 시작은 어언 12-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09년에 시즌 1이 첫 방영되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열악한 제작환경 때문에 루폴의 집 차고에서 촬영을 하기도 하고, 화질은 카메라 렌즈에 바세린 발랐다고 할 정도의 수준이에요. 시즌 1은 딴 게 아니라 구려도 너무 구린 화질 때문에 진입장벽이 좀 높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여러모로 초반 시즌들이 21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믿기가 힘들어요. 반드시 세기말적인 화면 퀄리티뿐만이 아니더라도요. 새삼 세상은 참 빠르게 변하는 듯..)
이렇게 소자본으로 시작한 루드레는 그들만의 리그였던 마이너 시절을 지나 점점 입소문을 타면서 시즌 4-5가 되면 그 인기가 절정에 달해 참가자들의 수도 늘어나고 부상으로 주어지는 상금도 커졌어요. 점점 발전하는 무대 스케일만큼이나 그 영향력도 커졌죠. 꾸준한 인기로 2022년 지금까지 14개의 본 시즌이 나왔고(14는 한창 방영 중이에요! 엄청 재밌음!!), 그 외 6개의 올스타전 및 태국, 네덜란드, 영국, 캐나다, 호주+뉴질랜드 등의 해외 프랜차이즈까지 제작되었어요. 그러는 동안 루폴은 60대의 나이가 되었고 초기 시즌들에 등장했던 퀸들도 40대가 되었지만 (물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최근 시즌에서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퀸들이 신성처럼 나타나기도 해요.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를 어린 퀴어 아이들은 티브이 속 루폴 그리고 드래그 레이스를 해방구처럼 여기며 컸고 시간이 흘러 본인이 드래그 퀸이 되어 루폴 앞에 나타난 거예요. 이게 참 굉장해요. 지금의 10대 20대 그리고 어느덧 40, 50대가 된 퀸들의 롤모델은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변치 않고 루폴이라는 인물 한 사람이라니 엄청난 영향력이죠.
드래그라는 게 기본적으로 언더그라운드 서브컬처를 기반으로 발전한 게이 문화라서 우리나라엔 여전히 생소한 개념일 수 있어요. Drag가 지금의 드래그의 의미를 지니기 시작한 건 19세기부터였다고 해요. 이전에는 연극 및 오페라 무대에는 남자만 오를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여성 역할도 물론 모두 남자가 맡아서 했었죠. 그리고 영어 단어로 drag에는 '끌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드레스를 입은 남자들이 드레스를 끌고 다니던 모습에서 드랙, 혹은 드래그라는 단어가 유래했다고 해요.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드래그는 기본적으로 사회에 통용되고 정의된 성별의 전형적 모습에서 탈피하여 겉모습을 꾸미고 새로운 페르소나를 창조하고 이를 관중에게 드러내 보이는 행위나 쇼 비즈니스 혹은 행위 예술을 모두 아우르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어요.
단순히 호모 섹슈얼 남성이 여성의 모습으로 분하는 모습으로 정의되던 드래그 퀸도 시간이 지나며 그 범위와 의미도 확장되고 그것은 쇼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요. 바이섹슈얼/헤테로 섹슈얼 남성 혹은 에이펩(AFAB: Asigned Female At Birth), 그리고 논바이너리(Non-binary), 트렌스젠더(남성에서 여성으로, 여성에서 남성으로 모두)도 드래그 씬, 그리고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 쇼에 등장하고 있어요. 드래그도 여성복 레디 투 웨어를 입는 것에서 진화하여 지금은 패션과 예술적 표현의 수단으로 여겨지죠.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늘 저의 큰 관심사 중 하나였는데, 메인 씬에서 다루어지지 않던 다양성을 드래그 레이스에서는 가감 없이 볼 수 있어 눈과 마음이 넘치게 즐거워요.
그런데 쇼라는 것은 결국 재미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보장하건대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는 당최 재미없으래야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답니다. 패전트(미인대회), 패션, 메이크업과 헤어, 코미디, 댄스, 뮤지컬 등 쇼 비즈니스의 총집합체와도 같은 쇼니까요. 게다가 각 분야에서 한 가닥씩 하는 퀸들을 모아뒀으니 네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기싸움은 당연하죠. 게다가 매주 참가자들에게 주어지는 미션은 경쟁 리얼리티 중에서도 최상급 난이도거든요. 옷도 직접 잘 만들 줄 알아야 하고요, 춤도 잘 춰야 되고, 무대 장악 능력도 있어야 되고, 성대모사도 잘해야 되고, 거기에 웃기기까지 해야 되니 시청자들은 지루할 틈이 없어요.
이제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메인 스트림이 된 드래그 씬.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는 드래그 레이스 시즌과 프랜차이즈들로 쇼의 완성도와 진정성에 대한 논란도 피할 수 없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해외 어플을 통해 새로운 시즌의 본방송을 사수하는 열혈팬을 자처하고 있어요. 어째서 그렇게까지 애착을 갖는 거냐고 묻는다면 재미의 차원을 넘어 쇼에 참여하는 퀸들의 모습에 제 모습을 투영하기 때문일 거예요.
저의 젠더 정체성을 정의하자면 저는 씨스젠더 헤테로 여성이에요. 생물학적으로 여성으로 태어났고, 스스로도 여성 성별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이성애자라는 의미입니다. 평소에는 매일 같이 청바지를 입고 스니커즈를 신고 다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고, 발산할 만한 끼도 가지고 있지 않아 무대 위보다는 관객석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그런데도 왜 저는 아찔한 하이힐, 변신과도 같은 메이크업, 감출 수 없는 끼로 무장한 드래그 퀸들 안에서 제 모습을 발견하는 걸까요?
그건 우리 모두 겉모습만으로는 구분되어지지 않는 인간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일 거예요.
본능과도 같은 외로움, 간절히 원하는 것은 결국 소속감과 연대, 내가 철저히 나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결심과도 같은 의지, 무엇보다 온전히 이해받고 싶은 마음... 저는 화면 속 화려한 그들의 모습 이면의 그런 것들을 본 것 같아요. 그리고 거기에서 스스로의 모습이 겹쳐 보인 거죠.
제가 드래그 퀸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은 본인들의 선택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서에요. 드래그 퀸이라는 직업은 누가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어떤 계기로 드래그의 세계의 발을 들인 그들은 전통적인 남성상에서 벗어나 본인을 치장하고 무대에 올라 사람들에게 유희를 주는 일에서 통렬한 해방감과 자유를 느끼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을 거예요. 가족으로부터 거부당하면서도 나 자신으로 살기를 선택한 그들을 어떻게 응원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앤디 워홀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와요.
"Warhol could see beauty all around him, but not very much in himself. For a gay guy, If you're not gonna be the stud, you might as well be the freak. Drag queens have taught us this for a long time. You're not gonna beat me up because I'm gonna dress up. I'm gonna create something. I'm gonna create this image that's so powerful, that you can't get to me.
"워홀은 주변의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보았지만 정작 본인 자신에게서는 아름다움을 찾지 못했어요. 게이들은 매력적인 알파 남성이 되지 못할 바에야 괴짜가 되죠. 드래그 퀸들이 오랜 시간 그래 왔던 것처럼요. 이렇게 차려입고 있으니 시비 걸진 않을 거잖아요. 강력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여 자신을 해치지 못하도록 하죠."
전통적인 남성상에서 벗어난 게이들이 받았던 탄압과 차별, 폭력의 역사 속에서 드래그는 하나의 생존 방식이기도 했던 거예요. 외적으로 그리고 내적으로 양쪽 면 모두로부터.
드래그 레이스에는 그래서 처절하리만치 짙고 깊은 인생이 담겨 있어요. 미션을 수행하여 경쟁에서 승리하는 자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단순한 오락쇼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죠.
루폴은 늘 퀸들에게 vulnerability(약점, 취약성)를 강조해요. 머리부터 발 끝까지 완벽하게 치장되고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만 보이는 퀸들은 오히려 기대와는 다른 심사평을 받아요. 드래그 쇼에 나온 이상, 당신은 굳이 완벽해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어요. 드래그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멀고, 그 자리에 오기까지의 본인 만의 스토리가 없을 리가 없잖아요. 그걸 드러내고,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는 퀸들에게 더 많은 점수가 주어져요.
그리고 이건 시청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예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헤어, 메이크업과 스타일에 모든 미션을 100점 만점에 100점으로 수행하는 완벽한 퀸들보다는 조금은 서툴고 불완전한 모습이더라도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퀸들에게 마음이 가고 더 잘되길 바라게 돼요. 혹은 누가 봐도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일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갖추었지만 어쩐지 내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퀸이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순간, 그제야 이해할 수 없었던 모습들도 이해가 되고 마침내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게 되어요.
"사람들이 뭘 볼까 봐 두려워요?"
"저의 부정적인 모습이요. 우울증을 달고 살았죠. 늘 뭔가 부족하고 자신감이 없었어요. 데라라는 캐릭터 덕에 긍정적이 됐어요. 이제는 그녀가 나한테 배울 때인 것 같아요. 심사위원들이 말하는 진심을 갖는 법요."
"당신은 무척 세련됐어요. 하지만 차세대 드래그 슈퍼스타는 부드러움과 강함이 공존해야 돼요. 자신을 완전히 감싸요."
시즌 6, 벤데라크렘(BenDeLaCreme)과 루폴의 대화 중
"불안정한 면을 보고 싶은 거예요. 미셸이 말한 불안감이 바로 그런 거 아닐까요? 난 그거라고 믿어요. 어쩌면 당신한테 돌파구가 될지 궁금해요. 이번 대회뿐 아니라 채드의 인생에서도요."
시즌 4, 채드 마이클스(Chad Michaels)에게 루폴이 건네는 조언
"물론 잘하는 사람이 좋긴 하지만 약점을 가진 사람한테 끌리는 거 알지?"
"마음을 열어서 연약한 면을 보여준 덕에 모두 웃을 수 있었어요. 아주 아름다운 장면이었어요."
"우리는 가장 진실한 사람들에게 끌려요. 라트리스는 모두가 좋아하죠. 아도어도 그렇고요. 본인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에요."
기꺼이 내면의 불완전함을 말하는 퀸들에게서 제 스스로의 완벽하지 않은 모습도 알게 되고, 그 모습에 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그들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되고 그들의 웃음이 나의 웃음이 되는 순간 저는 이 프로그램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너무 세련되기만 해서 조금은 불완전한 모습을 보여달라는 루폴의 조언에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던 퀸들도 이내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곤 해요. 사실 나는 우울한 사람이라거나, 사랑하는 엄마의 병세가 악화되어 엄마를 잃게 될까 봐 두렵다거나, 아빠가 돌아가실 때까지 본인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점이 여전히 마음속 상처로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범접할 수 없을 것만 같던 드래그 퀸은 옆 집 친구가 되고, 나의 형제자매가 되고, 이내 내가 되어요.
루폴이 말하는 vurnarability 가 어쩌면 쇼를 넘어 내 인생에서도 돌파구가 될 힌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의 약점을 기꺼이 드러내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만으로 우리는 더 진실하고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상대를 논리로 설득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나의 마음을 솔직하게 내 보이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아요.
우리는 모두 완벽하고 싶고, 완벽하기 위해 애를 많이 써요. 하지만 그 어디에도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그걸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순간 세상이 조금은 쉬워지는 것 같아요. 완벽하지 않은 나의 모습도 내 모습이고 어쩌면 그게 진짜 내 모습이니까, 그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에 겁내지 않으려고 해요. 루폴이 말한 대로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에게 끌리는 법이니까. 불완전함마저 사랑하게 만드는 마법은 불완전함을 드러낼 줄 아는 용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에서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