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r의 Parklife를 듣다가 해본 생각
blur의 1994년 앨범 Parklife를 최근 들어 다시 자주 듣고 있어요. 그중에서도 제 귀를 사로잡는 건 역시 메가 히트곡 Parklife인데요, 예전에는 이 곡을 <영국적임> 그 자체를 담고 있는 신나는 노래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이제 와서 다시 들어보니 가사가 새삼 정말 재밌는 거예요. 특히 이 부분이요.
I get up when I want
Except on Wednesdays
When I get rudely awakened by the dustmen
I put my trousers on, have a cup of tea
And I think about leaving the house
I feed the pigeons, I sometimes feed the sparrows too
It gives me a sense of enormous well-being
수요일 빼고는 일어나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일어나는 삶. 수요일은 아침 일찍 쓰레기 수거를 하러 오는 날이라서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나 봐요. 그렇게 일어나서는 옷 주워 입고 차 한 잔 마시고 집 밖으로 나온 다음 공원에 가서 비둘기나 가끔 참새들 모이를 주면 꽤나 괜찮은 삶을 사는 것 같이 느껴진다는 내용의 가사예요.
이 가사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설명하기 전 blur의 parklife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이 앨범 그리고 특히 이 곡은 90년대 브릿팝 전성기를 이끌었다고도 할 수 있어요. 최근에 Netflix 시리즈 '디스 이즈 팝' 5화 <브릿팝에 경배를!> 에피소드에서 본 내용인데 blur는 이 곡을 내기 직전 긴 미국 투어를 다녀왔었다고 해요. 당시 미국에선 너바나가 이끄는 그런지락이 대세였기 때문에 영국의 음악은 완전 듣보잡 그 자체였는데, 영국에선 꽤나 인지도 있는 밴드에게 그 사실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충격이었을 거예요. 영국 땅덩어리 다 합해봐야 미국의 주 하나 정도밖에 안 되는 미국의 광활함에 압도가 되기도 했고요. 그래서 밴드 멤버들은 투어 내내 미국의 문화와 음악, 그리고 그것이 영국 문화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대요. 그리고 영국에 돌아와서 만든 앨범이 Parklife이고 이게 제대로 먹혀 들어가서 메가 히트를 친 거죠. 우물 밖 세계를 경험하고 온 사람들의 시야는 절대로 이전과 같을 수가 없거든요. 미국에서 잘 나가는 걸 따라가기보다는 오히려 영국적임을 강조하는 정반대의 노선으로 가다니 그 담대함과 영리함 그리고 타고난 감각이 굉장했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Parklife는 <영국스러움>이 더 이상 촌스러운 게 아니라 오히려 트렌디하고 자랑스러운 것이 된 브릿팝 현상의 시작을 알리는 앨범이었어요.
Parklife가 담은 영국스러움은 그들의 스타일이나 평범한 런던 거리를 담은 뮤직비디오뿐만 아니라 위트 있고 다분히 냉소적인(sarcastic) 가사에서 잘 드러나는데요, 제목부터가 Parklife잖아요. 이게 별 뜻이 있는 단어는 아닌데 영국인, 특히 노동자 계층의 삶을 생각해보면 감이 와요. 영국 소시민들의 일상에서 공원의 존재는 정말 커요. 산책이나 조깅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하릴없이 시간 때우기 좋은 곳이기도 하거든요. 무언가 금지된 행위를 할 때도 영국인은 열린 공간인 공원에 모여들기도 해요. 락다운 기간에 붐비던 영국의 공원들부터 북런던의 아름다운 공원 함스테드 히스가 가진 길고 긴 게이신의 역사까지 모두 같은 맥락일 거라고 생각해요.
Parklife는 그런 영국의 공원 문화를 담고 있는데, 특유의 영국적인 냉소가 더해져 삶에 별다른 열정이나 의지 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근면한 것도 아닌 어떤 사람이 공원에서 시간이나 때우는 의미 없는 하루를 그리고 있어요. 이걸 비판하거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보이는 그대로의 날 것의 영국적인 모습을 위트 있으면서도 묘하게 비꼬는 것 같이 느껴지는 영국인 특유의 냉소적인 말투로 녹여낸 진짜 똑똑한 가사이자 곡인 거죠. 영국인들이 이 노래를 듣고 느꼈을 카타르시스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그 해 Parklife가 휩쓴 각종 차트와 수상 기록들이 말해주고요.
이런 배경을 생각하고 다시 노래를 들어보면 단순히 신나고 중독적인 멜로디를 넘어서 가사를 다시 한번 곱씹게 되는 거예요. 위에서 언급했던 가사로 돌아가 볼게요.
I get up when I want
Except on Wednesdays
When I get rudely awakened by the dustmen
I put my trousers on, have a cup of tea
And I think about leaving the house
I feed the pigeons, I sometimes feed the sparrows too
It gives me a sense of enormous well-being
여기서 특히나 저를 육성으로 피식거리게 만든 가사는 마지막 줄, <It gives me a sense of enourmous well-being> 부분이에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일어나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일어나서 공원 가서 새들 모이나 주면서 시간 때우는 삶이 그다지 웰빙에 가까운 삶은 아니잖아요. 세상에는 이런 삶도 있고 저런 삶도 있다지만 웰빙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은 공원에서 새들 모이나 주고 있으면 잘 사는 것 같기도 한 느낌을 받는다는 거죠. '그런 것 같다'라는 어떤 착각에 가까운 그 느낌 때문에 내일도 비슷한 하루를 보내게 될 거예요. 여기서 포인트는 느낌(sense of)이에요. 진짜로 잘 사는 게 아니라, 잘 사는 것 같은 느낌.
요즘에 제가 자주 생각하는 것도 바로 이 '진짜'와 '느낌' 사이 간극에 대한 거거든요.
예를 들어볼까요?
저는 요즘 인스타그램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렇다고 제가 인스타그램을 안 하는 건 아니고 오히려 한심하게도 이걸 끊어내지 못해서 자주 하는 편이죠. 제가 먹은 거, 본거, 읽은 거, 갔던 곳, 그리고 거기서 퀄리티 있는 시간을 보냈음을 은근히 암시하는 사진을 포스팅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이 올린 사진들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들여다보면서 그들이 보냈을 시간을 짐작해보기도 해요.
어느 날 꽤 잘 차려먹은 건강한 한 끼 사진을 스토리에 올리려다가 멈칫했던 적이 있거든요. 이걸 내가 왜 올리지? 싶어서요. 인스타그램은 '남이 나를 이렇게 봐주면 좋겠다'라는 과시적 심리에 입각했다는 논리가 지배적이잖아요. 근데 제 개인적인 경험을 생각해보면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내 삶의 어떤 조각을 공개적으로 포스팅함으로써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스스로에게 주입시키는 것 같기도 해요. 그니까 제가 건강하게 차려먹은 어느 날의 식사를 올리면 제가 건강하고 의식적으로 또 예쁘게 잘 차려먹는 삶을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이런 걸 먹으면서 사는 내 삶이 꽤 괜찮아 보이는 것 같게 되는 것 같달까요? 실제로 제가 그렇게 먹는 비율은 반도 안되는데 말이죠. 나머지 반의 모습은 눈에 안 보이게 지우고, 눈에 보이는 것만 보면서 그런 웰빙의 느낌을 스스로 가지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Parklife의 삶을 사는 어떤 사람처럼요.
일주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고립되어 외롭게 보내다가도 주말 하루 친구들과 가진 즐거운 술자리 사진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리면 내가 외롭지 않고 사교적이고 즐거운 삶을 사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해요. 그 느낌이 일시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계속된다면 내가 가진 고독함과 외로움을 진정으로 뒤돌아보지 못하고 그 하루의 즐거움에 매달려 내 삶 전체를 온전하게 돌보지 못하는 오류를 저지를지도 모를 것 같아요.
또 하나의 예시를 들어볼게요.
제가 지난 몇 달간 자동차 구매를 진지하게 고려했었어요. 예산을 정하고 그 예산 내에서 살 수 있는 차 리스트를 세워 원하는 모델까지도 정해놨죠. 표면적으로는 면허도 땄으니 실전 운전 감각을 기르기 위해서 자차를 가지고 꾸준히 연습하면 좋겠다는 이유를 댔지만 사실 자동차 구매가 주는 '어른의 느낌'을 간절하게 원했기 때문이에요. 저한테 어른이 되었다는 기준 중 하나가 자차로 운전하면서 여기저기 막힘없이 다니는 사람이거든요. 나이가 저보다 한참 어려도 그런 사람은 제 기준 어른이에요.
고백하건대 올해 한국 나이 서른인 저는 아직도 제대로 된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답니다. 요즘엔 어른 아이들이 많다고 하지만 제가 그중에 한 명이 될 줄은 몰랐죠. 스스로 밥벌이 정도는 그럭저럭 하고 있는데, 그 외의 모습에서는 도저히 스스로를 어엿한 어른으로 바라보질 못하겠어요. 몇 년째 똑같은 회사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 지내는 나의 커리어 시계는 흐르지 않고 멈춘 것 같은데 실제 시계는 가차 없이 흘러서 별다른 커리어적 성취 없이 나이만 먹은 모습을 발견하면 서글퍼지기도 해요. 이 나이 되도록 발전하지 못했다는 느낌 때문에. (근데 이것도 그저 느낌일 뿐이겠죠. 같은 일을 하더라도 5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스킬 셋과 경력, 일하는 태도와 가치관에서 크고 작은 변화와 과정들을 겪어왔을 테니 진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허송세월만 보낸 건 아니니까요.)
아무튼 이런 콤플렉스와 슬럼프의 늪에서 저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나름대로 떠올린 게 바로 자동차 구매였던 거예요. 차 한 대 살 정도의 재무 상태와 운전이라는 능력치까지 가졌다니 이 정도면 나도 어엿한 어른이다!!라는 그 느낌을 우습지만 너무나도 원했고 또 그게 필요했어요. 그래서 실제로 차를 샀다면 저는 어른이라는 느낌에 분명 만족했을 거고 꽤나 우쭐했을 거예요. 근데 그렇다고 제가 진짜 어른이 된 건가요? 감정적,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굳은 가치관을 바탕으로 스스로 내린 선택들로 내 삶을 채워가는 사람이 된 건가요? 대외적으로 성공적인 커리어 패스를 이룬 영감이 주는 사람이 된 건가요? 전혀 아니죠. 그니까 저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 무슨 차를 얼마에 살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어른이 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되는 거잖아요. 최소한 그런 어리석음은 피할 수 있어야 진짜 어른인 거겠죠.
이런 생각과 번뇌의 과정에서 듣게 된 Parklife가 제 뒤통수를 후려 친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거예요.
어떤 행위가 주는 허구적 느낌에 사로잡혀 진짜로 추구해야 할 것을 놓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blur의 Parklife를 듣고 저는 이런 다짐을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