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취미는 무엇인가요?
이번 겨울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스노우보딩이다. 친한 친구 중에 시즌이면 주말마다 스키장에 가는 애가 있다. 대학 때 오래 준비해오던 시험에 합격한 후 남는 시간에 우연히 시작한 취미가 지금까지 이어져온 케이스인데, 그게 점점 진심이 되어서 동호회도 들고, 꾸준히 강습도 들어가면서 지금까지 성실하게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게 신기하면서도 멋지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러다 마침 어떤 주말에 나도 딱히 할 일이 없어서 한 번 따라가 보게 된 것이다. 돈만 가지고 맨 몸으로 오면 된다고 해서, 하필이면 41년 만의 강추위라던 그날에, 단단히 옷을 챙겨 입고 일요일 아침 일찍부터 평창으로 향했다.
스키장이라는 건 정말 돈만 있으면 다 되는 곳이었다. (그러보고니 성인 되고 내 돈으로 처음 와보는 거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비와 옷 대여가 가능하고 리프트권도 현장에서 사자마자 바로 입장되고 원하면 강습도 돈 내고받으면 된다. 차가 없어도 왕복 28,000원 셔틀버스를 타면 평창 스키장 코 앞까지 편히 날라준다. 대략 계산해보니 아무것도 없이 완전 맨 몸으로 당일치기 오면 먹는 비용은 제외하고 최소 10만 원 정도가 든다. 하루 노는 비용으로 10만 원은 기꺼이 낼만한 돈이지만 매번 올 때마다 10만 원 이상 씩 써야 된다면 그건 꽤나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내 친구 같은 스키/보드 매니아들은 시즌 동안 시즌권을 사고, 장비나 옷은 모두 자가로 갖추고, 나아가 근방에 사람들과 돈을 모아 시즌방이라는 것을 구해 아예 시즌 내내 그곳을 거점 삼아 겨울을 보낸다. 장기적으로 비용 면에서 그게 이득인 셈이며, 타다 보면 결국 대여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잡고 입문해보려 한다면, 입문 비용 만으로 시즌권+장비+옷+강습비+교통비까지 넉넉잡아 2-300만 원은 들 각오를 해야 할 것 같다. 만약 이걸 해외에서 한다? 그러면 모르긴 몰라도 대충 세 배는 더 들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스키와 스노우보드는 돈이 드는 취미인 것이다.
스키장에 들어선 뒤 어릴 때 타봤던 감만으로 불안정하게 보드 위에 서서 사방을 쭉 둘러보니, 밥만 먹고 보드만 탔나 싶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것이 굉장히 신선했다. 어릴 때부터 착착 강습받아온 사람도 있겠지만, 본인이 취미로 즐기다가 스스로 투자를 하고 그러다 어느 경지에 오른 듯한 사람들도 많아 보였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무엇보다 진짜로, 진짜로 즐거워 보였다. 내 옆에서 완벽히 장비를 갖춘 모습으로 고수의 향기를 풍기고 있는 이 친구도 그렇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아, 역시 모든 것은 기회비용의 차이구나.
내가 당장 스키/보드 입문에 몇백만 원을 쓰지 못한다면, 그 돈이 정말로 없어서가 아니라는 가정 하에, 그건 그 돈을 거기에 쓰기엔 아까워서 그런 거다. 취미가 우선순위가 아닌 상황일 수도 있고, 단순히 그 돈이면 딴 걸 사겠다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통장의 잔고가 줄어드는 걸 보기 싫을 수도 있다. 그런데 스키/보드 앞에선 그 기회비용이 0인 사람들도 있더라.
기꺼이 돈을 들이는 것만큼 무언가를 순수하게 즐기고, 푹 빠져있고, 깊이 몰두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을까. 돈이 드는 취미를 꾸준히 즐기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는 돈이 있어야 하기도 하지만 두 번째로는 즐거움 하나 만을 위해 투자를 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기도 한다. 비용을 들인 것 이상으로 이득이 돌아온다고 믿을 때 하는 것이 투자라면, 그들에게 이건 리스크 없는 안전 투자였다. 기회비용은 진정 상대적이다.
그러자 나는 무엇이 되었든 '초보'의 단계를 완전히 벗어나면서까지 집중하고 몰두하고 돈을 들이고 꾸준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뜨끔해져 버렸다. 삶에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어쩌면 이것이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취미의 부재. 몰두의 부재. 해방구의 부재. 미쳐봄의 부재. 즐거움 자체가 비용 이상의 프로핏이 되는 투자의 부재.
이제는 마치 선언처럼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진해질 감정이다.
그날 친구를 따라 스키장에 다녀온 이후 나는 이 세계에 한 발짝 더 다가가 보고 싶어졌다. 곧이어 주말 2박 3일간의 일정을 잡고 강습까지 정석대로 받아보기로 했다. 이 이야기를 했을 때 엄마가 무척이나 이 소식을 반겨했는데, 돈 아끼지 말고 제대로 한 번 해보라고 부추기는 엄마의 말에서 당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나 이거 하는 거 좋아해'라고 고민 없이 내뱉을만한 취미. 그리고 엄마의 아쉬움은 결코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더 옅어지지 않았다.
취미라는 건 정의 내리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넓고 관대한 관점에서 여가 시간에 하는 모든 행위를 통틀어 취미라고 말할 수도 있다. 티브이 보기, 누워 있기, 강아지랑 놀기, 산책 하기까지 모든 것이 취미가 될 수 있다. 누군가는 기록을 하고 싶어 진다면 그것이 취미라고 했다. 다른 누군가는 취미란 삶의 밸런스를 맞추고 지탱해주는 기둥이라고도 말했다.
내가 말하는 취미는 단순하다. 나는 <취미=돌파구>라고 생각한다.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 그걸 잊게 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면 그때 그것을 취미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만의 취미가 있다는 건 나만 아는 안전지대를 갖게 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눈 밭에서 신나게 넘어지고 굴러 여기저기 쑤신 몸 때문에 오랜만에 온 몸의 감각이 활짝 깨어난 것 같던 그날 밤, 침대에 누워 나만의 안전지대가 있는 삶과 없는 삶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안전지대는 무엇이지?'
그동안 나는 지금까지 그 당시 내 곁에 있던 사람들 덕분에 신선한 경험들을 많이 해보았고, 덕분에 나의 세계가 확장된다는 느낌을 갖기도 했다.
스위스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 덕분에 그 시골집에서 한 달을 살아보기도 했고, 매년 여름이면 본인의 어릴 적 추억이 담긴 바닷가에 데려가 주는 사람도 있었고, 본인이 좋아하는 페스티벌에 데려가 준 거나, 주말에 집에서 뒹굴거리는 나를 끄집어 내 스키장에 데려가 준 친구도 있었다. 덕분에 나는 토끼굴에 따라 들어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생각해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놀랍도록 새로운 세계들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마다 나는 묘한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와! 이 친구 덕분에 이렇게 신나는 경험도 해보네!'라고 생각하면 복잡할 것이 없지만 성격이 꼬여도 단단히 꼬인 탓인가 그 선물 같은 순간을 100% 만끽할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닌 타인의 안전지대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혼자였다면 몰랐을 세계를 경험할 때, 경험 자체에 압도되기보다는 '혼자였다면 몰랐을'에 미세하게 더 많은 양의 신경이 집중된다. 순간적으로는 새로운 경험 덕분에 신이 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회적이라는 마음이 들어 금방 울적해지고 온전한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묘하게 외로워지기까지 한다.
'이 바다는 네가 어릴 적부터 가장 좋아하는 바다라 매년 질리지도 않고 찾아오는구나. 네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이곳에 와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으니 벅차고, 네 삶의 한 조각을 공유하고 또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뻐. 그런데 네가 아니면 내가 이곳에 다시 찾아올 일은 없겠지? 이곳은 네가 사랑하는 바다지, 내가 사랑하는 바다는 아니니까.'
'이곳은 네가 나고 자란 시골 마을이구나. 도시에서만 평생을 살아온 나에게는 이곳에서의 생활은 정말이지 신기하고 즐거워. 네가 데려와주지 않는다면 나는 이곳을 구경할 일도 없었을 거야. 하지만 이곳은 너의 고향이지 나의 고향은 아니니까, 이곳에서의 생활은 나에겐 일회적인 경험에 지나지 않아.'
'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여러 뮤직 페스티벌을 다 꿰고 있고 이렇게 나까지도 그런 경험을 하게 해 주다니 정말 고마워. 페스티벌은 정말 신나는 곳이구나. 네가 아니었다면 헤드라이너 뮤지션의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는 내가 이곳에 올 일은 없었을 거야. 게다가 너와 내가 내년에 함께하지 않는다면 내년 이 페스티벌에 내가 다시 돌아올 일은 없겠지.'
나는 자꾸만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단순하지 못한 성격은 나를 자칫 감사할 줄 모르는 못난 사람으로 보이게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게 나라는 인간이다.
그런데 또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타인의 세계에 초대된 앨리스가 꼬인 성격이라서기보다는 앨리스가 앨리스만의 세계가 없어서 한 질투였고 두려움이었다.
토끼는 어느샌가 내 삶에 뿅 하고 나타나 나에게 이렇게나 멋진 세계를 보여주었는데, 나에게는 토끼를 데려가면 토끼의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세계가 없었다. 그래서 내 인생의 토끼와도 같은 네가 없어지게 된다면 나는 이런 경험을 다신 못할 거고, 그럼 네가 없는 나의 삶은 급격하게 재미가 없어질 것 같아서 두려웠다. 동시에 너는 내가 없이도 너만의 세계에서 너의 삶을 이어가겠구나 하는 질투도 났던 것이다.
어쩌면 유치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정말로 그게 두려웠고 질투가 났고 어리석게도 그런 불안감에 사로잡혀 마법 같은 경험들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고, 감사하기보다는 자꾸만 의심을 품었고 오히려 그 순간들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자고 마음먹으며 심지어는 정을 주지 않으려고 애까지 썼던 것 같다.
이런 나에게는 무엇보다 나만의 세계가 반드시 필요했다. 온전히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 기쁘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토끼를 초대하고 토끼를 즐겁게 만들어줄 수 있을 만한 것. 그런 게 필요했다. 토끼가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도 늘 기쁨이 되어줄 만한 것. 이를 위해 이제는 정말 나만의 안전지대를 튼튼하게 쌓아 올려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스노우보드를 타고 온 그날 밤, 스노우보드 앞에선 기회비용이 0인 사람들과 스키를 사랑하는 내 친구를 보며 이들이 토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도 이제 스노우보드가 나의 안전지대 이자, 온전히 내가 가진 세상이자 나만의 zone이 되었으면 좋겠다. 무언가에 진지하게 심취해보고 싶고 토끼들을 앨리스의 세계에 초대하고 싶어졌다. 지루하지 않은 사람이고 싶고, 의외의 모습을 가진 입체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세계가 단단한 사람이고 싶고, 돌파구와도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고 싶고 그것에 과감히 투자하고 싶다. 삶을 다채롭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면 돈을 버는 것에 더 정당한 이유는 없으니까.
타면 탈 수록 늘 수밖에 없는 스노우보드의 매력에 빠져 예상치도 못하게 이변 겨울의 꽤 많은 날을 스노우보드와 함께 보냈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봄이 가까워오는 것이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