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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윤 Aug 16. 2023

리틀 라이프 (A little life)

  주드는 유능한 소송 변호사이다. 로젠 프리처드 앤드 클라인 로펌의 소송 분과장인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는 재판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는 냉철하고 무자비한 모습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래서 동료들은 그를 존경하거나 두려워한다.

  뉴욕의 성공한 변호사인 그는 소호 그린 스트리트와 런던 메릴본에 넓고 근사한 아파트를 하나씩 소유하고 있고 뉴욕 외곽 개리슨에는 아름다운 숲에 둘러싸인 주택도 하나 있다.

  그에게는 또한 친구들이 있다. 대학 시절 후드 홀 기숙사에서 룸메이트로 만나 평생을 함께한 세 명의 친구들.

  맬컴은 대대로 막대한 부를 쌓아온 가문의 막내아들로, 건축을 전공한 뒤 쟁쟁한 건축회사인 랫스타에 근무하다가 퇴사 후 랫스타 시절 동료들과 함께 벨카스트라는 회사를 창업한다. 벨카스트는 도하의 디자인 뮤지엄 건축 프로젝트를 맡게 된 것을 시작으로 점점 성장하여 홍콩과 런던에 지사를 두게 되고 맬컴의 건축가로서의 커리어도 단단하게 쌓여갔다.

  누구보다 건설적인 인생을 구축한 맬컴이지만, 모순적이게도 그는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완전하게 확신을 가졌던 일이 별로 없었다. 20대 때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기로 한 이유부터 시작하여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에 대한 확답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성적 지향성에도 늘 물음표가 따라다녔다.

  후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는 제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거나 결정을 내린 후에도 그 결정을 의심하곤 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확신을 가진 일은 20대의 주드가 살던 리스페너드 스트리트 아파트에 있는 책장의 귀퉁이를 반드시 잘라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을 때와(주드가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30대가 된 주드의 그린 스트리트 아파트를 리노베이트 할 때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설계해야만 한다고 주장할 때였다.

  제이비는 호기로운 화가이다. 맬컴과 다르게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으로 가득 찬 그는 대학시절부터 본인이 그의 친구들보다 훨씬 더 빠르고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티 이민자 가정에서 풍부하게 사랑받고 질적으로 지원받으며 성장한 그는 때로 예술가로서 너무 순탄하기만 했던 본인의 인생을 불평할 정도로 오만하고 철없는 구석이 있다.

  그는 친구들을 그의 예술의 소재로 삼았고 친구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그것을 다시 그림으로 표현하는 연작으로 크게 호평받아 그토록 바라던 예술계에 이름을 남기는 일을 천천히, 분명하게 실천해 가게 된다.

  그중에서 주드는 제이비의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이었다. 오묘한 색을 가진 주드의 눈동자와 머리칼을 표현해 내는 일은 제이비에게 예술가로서 도달해야 하는 어떤 경지 같은 것이었고 마침내 그곳에 가장 근접하고 나서야 작품은 완성될 수 있었다.

  사랑받는 것이 자연스럽고 익숙한 제이비에게 친구들이 본인에게 가장 먼저 연락하지 않거나 본인이 아닌 다른 친구들과 더 가까운 모습을 보는 것은 힘들고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제이비는 종종 심술을 부리고 친구들에게, 특히 주드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있었다. "왜 나에게는 다 얘기해주지 않는 거야?"

  제이비의 모든 감정은 그림에 쏟아져 나왔다. 마약 중독으로 지독한 시간을 보내던 시절의 그림은 마치 악마와도 같지만 주드와 친구들을 그린 그림에선 그 생생한 애정이 색으로, 붓칠로, 조도로 표현되었다. 세월이 지나며 변해가는 친구들의 모습을 가장 정확한 모습으로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제이비뿐일 것이다. 그림 속 친구들의 표정이 지닌 진짜 의미는 아마도 평생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채로.  

  그리고 윌럼. 윌럼은 스웨덴을 거쳐 와이오밍 서부에 정착한 아이슬란드계 아버지와 덴마크계 어머니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윌럼이 대학에 갈 즈음엔 부모에게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자식이 된다.

  첫째 누나 브릿과 셋째 형 악셀은 모두 윌럼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으며, 그보다 여덟 살 위의 둘째 형 헤밍은 뇌성마비를 갖고 태어나 평생 휠체어를 타고 살다가 암으로 죽었다. 윌럼은 평생토록 헤밍을 너무나 사랑했다.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부모님은 좀처럼 활짝 웃거나 따뜻한 사랑을 보여주는 법이 없었고 철저하게 본인의 분수를 알 것을 강조하는 '얀테의 법칙'과도 같은 스칸디나비안의 행동 양식을 지키며 남들 눈에 띄거나 민폐 끼치는 일 없이 조용하고 근면한 중세적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들 역시 오래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윌럼은 어릴 때부터 늘 착하다는 말을 들었다. 제이비가 그에게 너무 착해 빠졌다고 비난을 할 정도로 정이 많고 인내심이 깊으며 온화한 윌럼은 연극을 전공하면서 오톨란 레스토랑에서 서빙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던 배고픈 시절을 지나 가장 큰 시상식에서 주연상을 받는 무비 스타가 되기까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주드의 곁에 있었다. 주드에게 전화를 하고, 손을 잡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병원에 데려다주고, 안아주고, 언제까지고 기다려주는 일. 주드를 사랑하는 일이 윌럼에게는 종교적 신념보다 강한 의무였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게 무엇인지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친구들 중 주드와 윌럼뿐이었다. 가족이 없고, 돈이 없고, 인생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존재하지 않는 삶은 맬컴과 제이비가 끝까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인생에 빚진 것이 단 하나도 없는 주드이지만 맬컴과 제이비, 그리고 윌럼만큼은 그의 인생에 일어난 가장 좋은 일 중에 하나였다. 주드의 집을 고쳐주고, 주드를 가장 농밀한 시선으로 관찰하고, 주드의 평생의 반려자가 된 사람들. 그리고 주드가 자살하지 않도록 병원에 손수 입원시켜 매일 그를 지킨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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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드를 설명하는 일은 그의 친구들을 설명하는 일과 달리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주드의 현재 모습으로 그를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비치게 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의 출신 대학과 직업, 성과, 그리고 그의 재산을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 건축계, 예술계, 그리고 연예계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들인 친구들을 통해 그를 소개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주드가 지금의 주드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맬컴이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본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은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눈치를 봐야만 했던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인해 우유부단한 성인으로 성장하게 된 걸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르다.

  제이비가 남부럽지 않게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그 때문인지 그에게는 미성숙한 구석이 있어 연애에 꾸준히 실패하고 친구들의 아주 깊은 비밀까지는 끝까지 알지 못하게 된 것처럼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다.

  혹은 윌럼이 타고난 성품과 인내심으로 연기를 포기하지 않고 결국 스타가 된 일과 좀처럼 표현하는 법이 없는 부모를 대신하여 평생 휠체어를 타다 병으로 사망한 헤밍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마음 한 구석 남아있었고 그것이 주드에 대한 애정으로 확장된 것을 설명하는 것처럼 한 문장에 담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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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드는 25살이 되던 해에 뉴욕으로 넘어왔고 그전까지는 보스턴에서 대학을 다녔다. 하버드 로스쿨에서 수학했고 MIT에서는 순수수학 전공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주드는 천재라고 불려도 될만한 수재였다. 그의 인생은 사실상 보스턴에 오면서 시작된 것이고, 그마저도 어려운 인생이었지만, 그 이전에는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전혀 없었다. 그것이 주드였다. 인생답지 못한 인생을 산 인생. 리틀 라이프. 대학 입학을 위해 보스턴에 처음 왔을 때 메고 있던 배낭 하나가 그의 전 재산이자 삶이었다는 것을 맬컴은 끝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주드는 태어나자마자 쓰레기장에 버려져 죽기 직전 발견되었다. 그래서 부모라던가 집이라던가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라면 응당 받아야 마땅한 보살핌과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몰랐다. 그런 게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다. 본인만이 열 수 있는 방식으로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는 일이 그가 아는 유일한 보호장치였다. 보통의 아이라면 양치질을 잘해서 상으로 칭찬과 함께 달콤한 사탕을 받을 나이에 주드는 반짝거리는 작은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했다는 이유만으로 손등을 불로 달구는 벌을 받아야 했다. 성취의 보람과 보상의 기쁨, 애정 어린 칭찬을 받으며 커져가는 자신감을 배울 시기에 징벌의 공포, 존재의 무가치, 성병의 고통, 그리고 역겨움을 참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폭력과 학대로 점철된 어린 시절에 입은 척추 손상으로 인해 주드는 성인이 되어서도 오른쪽 다리를 눈에 띄게 절었고 가끔씩 찾아오는 격렬한 다리의 통증은 그를 거의 기절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의 등은 울룩불룩한 상처와 흉터로 가득하고 오른쪽 다리는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상처를 입고 곪고 감염을 일으켰다. 어쩌면 고행을 겪은 예수의 모습이 이랬을까.

  주드가 평생토록 신체적 고통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모두 어린아이게 가해진 폭력과 존엄성 훼손 때문이라는 것을 알 즈음에는 도무지 팔자라는 것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납고 고약한 팔자. 신의 장난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세상에나 너무나도 가엾고 가여운 팔자.

  주드는 한 여름에도 절대로 반팔을 입지 않는다. ("주드가 늘 긴팔 차림인 거 눈치채셨어요?") 그가 습관적으로 자해를 하여 팔에도 흉터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의 기억으로 견딜 수 없을 때 욕실에서 팔을 그었다. 로스쿨 시절의 스승이었던 해럴드가 주드를 너무나 사랑하게 된 나머지 30살이 된 성인 주드를 아들로 입양하겠다고 했을 때도 사실은 해럴드가 그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까 봐 아니면 언제라도 자기를 버릴 것이 너무 분명하여 늦은 밤 침대에서 빠져나와 욕실 불을 켰다. 자신이 너무나 싫어질 때마다 욕실로 향하게 되니 그는 거의 매일밤을 욕실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면도칼로 그어진 팔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면 그는 조금 안심되어 잠을 잘 수 있었지만 그 행위 자체가 자신을 더 혐오하게 만들었고 팔에 남겨진 흉터를 볼 때마다 그것을 잔인하게 복기해야만 했다.

  주드는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처럼 다 같이 긴 테이블에 둘러앉아야 하는 날도 어려워했다. 커다란 접시에 놓인 음식을 돌아가며 본인의 그릇에 덜어 먹는 식사가 어색하고 불편했다. 자기 몫을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는 사치를 주드는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랬다. 본인을 제외한 모두가 자연스럽게 식사를 하는 모습에 주드는 또 절망할 수밖에 없다. 배우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 매일의 행동에 끼치는 지독한 영향을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이질을 통해 깨닫는 순간은 더더욱 절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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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가 중요한 이유는 현재가 곧 미래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과거라는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과거란 결국 미래에 기억하게 될 현재의 합일뿐이다.

  그러니 주드에게 현실이 끔찍한 이유는 압도적인 과거 때문이 아니라 단 한 번도 현재를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늘 벗어나고 싶었던 현재라서 미래의 주드에게 남겨진 것은 벗어나고자 했던 그 소망뿐이었다. 그 소망의 날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서 주드의 두 발을 땅에 제대로 디디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 소망의 날개는 또한 견딜 수 없이 무거워서 주드를 훨훨 날아가지도 못하게 했다. 주드의 무릎을 꿇리고 주저앉게 만드는 지저분하고 축축한 잿빛의 날개.

  수준 높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 일상에 자연스러운 순간이 많은 삶이다. 누군가가 베푸는 친절을 진실한 감사와 기꺼이 교환하는 태도. 태연하게 사랑받고 순진하게 사랑할 줄 아는 재능.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구분 짓고 인생의 이물질을 걸러내어 입맛에 맞게 삶을 가꾸어가리라 다짐하는 자세. 이 모든 것을 공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해낼 줄 아는 능력은 삶에서 쌓여온 학습과 경험의 기억으로 만들어진다. 옳은 일을 하면 칭찬을 받는다는 걸 학습하고, 노력의 끝에 보상이 있음을 경험하고, 존재 만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애정의 말을 듣고, 소중한 것을 다루듯 볼을 쓰다듬어주는 손길을 느끼고, 선물을 받고, 동등하게 대우받은 기억이 삶을 수월하게 만든다.

  학습되지 못한 사랑과 보살핌으로 주드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모를 것이라서 슬프다. 주드의 인생이 가혹해서 슬픈 게 아니라 주드가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아서 슬프다. 주드가 그걸 알았더라면 그의 인생도 조금은 달라졌을까 싶어서 슬프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까지나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역사를 가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 가슴이 메이도록 슬프다.

  해럴드에게 접시를 던지며 격렬하게 화를 냈던 그날, 이제 해럴드가 징벌할 차례라고 생각하며 얻어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주드. 고통에 지쳐 쓰러진 본인의 머리를 무릎에 얹어 애정 어린 손길로 쓰다듬어주는 해럴드가 곧 바지 지퍼를 내릴 것이라고 겁먹은 주드. 그때 그의 나이 쉰한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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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드가 윌럼에게, 어쩌면 윌럼이 주드에게 읽어주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게 되는 월트 휘트먼의 시. (이브 생 로랑의 평생의 연인이었던 피에르 베르제가 이브 생 로랑의 1주기에 낭독하기도 하였다.)


만일 한눈에 나를 찾지 못해도 그대,

용기를 잃지 마오.


만일 나 이곳에서 달아난다면,

다른 곳에서 나를 찾아주오.


나는 어딘가에 멈춰 서서

당신만을 기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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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학에 갔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친구가 되어주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만났어. 그 친구들이 내게 가르쳐줬어. 정말이지 모든 것을. 그 친구들이 나를 만들었고, 진짜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어.

  지금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내가 보기에, 우정의 오랜 요령은 너보다 더 나은 사람들 - 더 똑똑하다거나 멋진 사람들이 아니라 더 친절하고 더 아량 있고 더 관대한 사람들 - 을 찾는 거야. 그리고 그 친구들이 네게 가르쳐주는 것들에 감사하고, 친구들이 너에 대해 말해주는 것들, 아무리 나쁜 - 혹은 좋은 - 말이라도 경청하려고 하고, 그들을 믿으려고 노력하는 거지. 그게 제일 힘든 일이야. 하지만 가장 좋은 일이기도 해." (1권 p.311)


우정은 상대방의 더딘 불행을, 길고 긴 지루함을, 간간이 찾아오는 승리를 목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가장 비참한 순간들에 함께 있을 수 있는 특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그 대신 자기도 그 사람 옆에서 비참한 모습을 보여도 되는 것이다. (1권 p.333)


맬컴은 (...) 그들의 이런 점이, 여전히 압도당할 수 있는 능력이, 성인이 되어서도 인생에서 놀라운 경험이 계속 주어질 것이라는, 대단한 시절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믿음이 부러웠다. (...) 어른이면서 여전히 세상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1권 p.391)


어느 순간 해럴드와 줄리아가 트루로 집 부엌 수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몽사몽간에 그들이 조용히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너무 지루한 이야기라 세부 사항은 대부분 듣지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공동생활의 역학을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어른들 관계의 이상적 표현 같았다. (2권 p.86)


삶이 상실을 보상해 준다. (2권 p.203)


"하지만 주드는 네가 자기를 숭배하기를 바라지 않아. 있는 그대로 봐주길 바라지. 아무리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그것도 인생이라고 말해주길 원해." (2권 p.207)


고군분투하고 있는 가엾은 사람들, 자기도 모르는,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을 다 감싸안는 것 같은 슬픔이었다. 매일매일이 너무나 힘들 때에도, 상황이 너무나 비참할 때도, 사방에서 사람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생각하면 느끼게 되는 경탄과 경외심이 뒤섞인 그런 슬픔이었다. 인생이란 너무 슬프구나, 그런 순간이면 그는 생각했다. 너무 슬프지만, 그래도 사람은 다 그렇게 사는 거지. 삶에 매달리고, 위안거리를 찾고. (2권 p.289)


인생이 가치 있는지 없는지를 놓고 안달복달하지 않았지만, 왜 자기가, 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살아가는지는 늘 궁금했다. 때로는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수많은 사람들, 수백만, 수십억의 사람들이 가늠할 수 없는 비참 속에서, 터무니없이 극단적인 궁핍과 질병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다들 그래도 꾸역 구역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삶을 계속 살아나가는 결의는 선택이 아니라 진화적 완성이 아닐까? 마음 그 자체에 힘줄처럼 질기고 상처투성이인 뉴런 무리가 있어서 논리가 그렇게 자주 주장하는 바를 실행하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닐까? (2권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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