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나에게 내민 손길
아침에 집 근처 공원 앞 길에 빈 택시가 한 대 서 있었다. 어떤 할머니가 타려고 택시 문을 여셨는데, 그 택시는 이미 예약된 차량이었다.
"할머니, 앞에 저렇게 초록불이 들어와 있으면 이미 예약된 거예요. 빨간 불 들어온 빈 차를 잡으셔야 해요" 출근하느라 때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나는 또 '갱년기 오지랖'이 발동했다. 대신 택시를 잡아드리려 했지만 늘 그렇듯, 내가 잡으려고만 하면 빈 택시들이 길에서 자취를 감춰 버리는데, 지금 이 시간에 빈 택시가 지나갈 리가.. 앱으로 택시를 불러드리겠다고 했더니 극구 사양하셨댜.
“택시 안 잡히면 그냥 차라리 대중교통 탈래”.
"저도 전철역으로 가니까 그럼 저랑 같이 가세요"
할머니가 가시려는 곳은 신사역 근방이니 여기서 환승 없이 한 번에 갈 수 있다.
할머니는 운전을 못하게 되니 너무 불편하다며 전철역까지 걸어가는 길에 이런저런 말씀을 들려주셨다. 올해 86세라는 할머니는(나는 70대 초반쯤으로 봤는데..)는 1970년대 초 한남동에서 운전면허를 따셨다고. 우리나라 여성 중 아마 세 번째쯤일 거라고 했다. 미국 운전면허증도 가지고 계시지만, 이제 더 이상 가족들이 절대로 운전을 못하게 한다는 푸념 뒤로 '모든 노인들이 똑같은 속도로 기력과 지력이 쇠하는 건 아닐진대..' 하는 억울함이 언뜻 배어 나왔다
이 와중에 미국 사는 외손녀가 이번 여름에 스탠퍼드를 졸업한다는 깨알 같은 자랑도 슬며시... 고교 졸업식 때는 미국 애틀란타까지 가셨는데, 이제는 미국에 가 볼 수 없어 손녀가 졸업 후 한국에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다는 말 끝에는 아쉬운 한숨도 섞였다.
"그래도 이렇게 전철역 계단도 잘 내려가시고.. 건강하시니 너무 좋네요. 연세 듣고 깜짝 놀랐잖아요!"
"내가 젊을 때부터 운동을 좀 많이 해서 그래" 하며 웃으셨다.
아닌 게 아니라 연세에 비해 매우 정정하시고, 어딘지 모르게 배운 분의 향기가 나더라니.
나이 드신 분들은 왜 낯선 사람 붙잡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사적인 얘기나 자식 자랑을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놓는 걸까 예전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도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뜬금없이 이런 얘기 듣는 것이 싫지만은 않다. 이제는 나도 같이 나이들어가는 처지라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언젠가, 더 이상은 내가 살아온 세계가 아니게 될 이곳에서, 천성과 무관하게 나이 듦이 만들어내는 우울감, 서글픔… 같은 낯선 감정들을 나도 맞이하게 되겠지. 어쩌면 '갱년기 오지랖'이라며 스스로 웃어넘긴 나의 행동은, 나에게도 찾아올 외로움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미래의 나에게 미리 내민 작은 손길이었을지도. 갈수록 내 입의 필터가 본의 아니게 점점 옅어지고 입에서 나가는 말들이 지금보다 더 경솔해지는 날이 오더라도 누군가는 너그럽게 들어주기를. 무엇보다 나도 이 분처럼 생각이 또렷하고 걸음이 단단한 노인으로 나이 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스친 짧은 인연을 기록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