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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훈 Nov 26. 2015

“평범한 드라마처럼 찍고 싶지 않았다”

정정훈 촬영감독에게 듣는 로빈 윌리엄스 유작 <블러바드> 제작기


<씨네21> 1017호에 실린 기획기사 


김성훈

“오늘로 29회차 촬영을 완료했다. 총 69회차니까 절반 가까이 찍은 셈이다.” 현재 남양주종합촬영소에서 <아가씨> 세트 촬영을 진행하고 있는 정정훈 촬영감독이 오이를 아삭아삭 씹으면서 말했다. <아가씨>의 8월3일분 촬영이 막 끝난 밤 9시였다. 할리우드 데뷔작 <스토커>(감독 박찬욱, 2013)를 38회차 만에, 혈혈단신으로 할리우드로 건너가 찍은 <블러바드>(감독 디토 몬티엘, 2014)를 19회차 만에 끝냈던 것에 비하면 오랜만에 긴 회차를 소화하고 있는데도 그의 목소리엔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쉴 새도 없이 인터뷰를 하는데 피곤하지 않나”라는 기자의 걱정에 그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하루에 12시간만 일하는데 뭘.” <블러바드>에 대해 할 얘기가 많지 않다며 손사래를 치던 그가 막상 입을 열기 시작하니 마치 어제 촬영을 마친 양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았다.


시간과의 싸움

잘 알려진 대로 정정훈이 촬영한 <블러바드>는 로빈 윌리엄스의 유작이다.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놀란은 약 26년 동안 은행 일만 하며 아내(캐시 베이커)와 함께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미국 중산층 남자다. 은행 지점장 승진을 앞둔 그 앞에 우연히 거리의 성 노동자 레오(로베르토 어과이어)가 나타난다. 놀란이 운전하다가 레오를 칠 뻔하고, 레오가 놀란의 차에 태워달라고 하면서 둘의 만남이 시작된다. 레오를 만난 뒤부터 놀란의 평범한 일상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직장과 가정을 소홀히 하고 자신과 다른 삶을 사는 레오에게 빠져든다. <블러바드>는 놀란이 청년 레오를 만나면서 뒤늦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고, 그걸 솔직하게 드러내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이야기다.

<신세계>(감독 박훈정, 2012)를 끝내자마자 미국 LA로 건너가 할리우드에 도전한 정정훈 촬영감독이 <블러바드>의 카메라를 잡은 건 “할리우드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쳤을 때”였다(정정훈 촬영감독이 할리우드에 도전한 이야기는 <씨네21> 994호 기획 기사 ‘할리우드에서 커리어를 다시 시작하기’를 참조할 것.-편집자). 당시 그는 자신의 에이전트가 소개해준 프로젝트에 수십 차례 도전했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영어가 능숙하지 않고, 짧은 회차를 소화해본 경험이 없는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하릴없이 영어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정정훈은 비자 만료를 앞두고 할리우드 도전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그때 그에게 손을 내밀어준 작품이 바로 <블러바드>였다. 감독과 제작자가 <올드보이> <스토커> 등 그가 촬영한 영화들을 잘 알고 있었고, <당신의 성인을 알아보는 법>(2006)이라는 영화로 제22회 선댄스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심사위원 특별상을 거머쥐면서 가능성을 인정받은 감독의 신작이라는 점이 그에겐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아니,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평범한 드라마처럼 찍고 싶지 않다.” 정정훈은 디토 몬티엘 감독과 처음 만났을 때 촬영보다 드라마 얘기를 많이 했다. 주인공 놀란의 건조한 감정이 레오라는 청년을 만나면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는 게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각색 과정이 어떻게 변하느냐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게 차이가 있기 때문”에 촬영 시작 수개월 전부터 시나리오 각색 작업에 참여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와 달리 <블러바드>에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한달뿐.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시나리오를 파고들었다. “영어 공부를 하면서 시나리오를 계속 읽었고, 감독과 함께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19회차 만에 찍어야 했기 때문에 비디오 스토리보드 작업도 했다. 미리 생각하지 않으면 현장에서 포기하고 가야 한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선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그 회차에 맞춰 찍는 건 감독들에게 가혹하다. 아닌 걸 알면서도 가야 하니까.” 영화마다 제각기 다르지만 제작비 규모가 크고, 배우의 일정이 철저하게 지켜지는 까닭에 시간과 예산에 굉장히 엄격한 할리우드에서 그는 짧은 회차도 아무런 문제 없이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사실적으로 더 사실적으로

<블러바드>는 사실적인 이야기라 공간 역시 사실적이어야 했다. 놀란의 주요 공간인 집과 은행을 찍기 위해 영화를 촬영한 미국 내슈빌에 있는 실제 집과 은행을 섭외한 것도 그 때문이다(내슈빌은 <스토커>를 찍은 곳이기도 해 정정훈에게는 친숙한 곳이다). 제작진이 찾는 집은 계단이 있고, 1층에서 카메라가 움직일 때 거실과 식당이 모두 연결된 공간이어야 했다. 좁고 긴 구조의 이층집을 많이 찾았다고 한다. “집을 빌려준 주인 부부는 자녀들을 모두 결혼시킨 뒤 단둘이 살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영화 속 놀란 부부처럼 남편이 나중에 아내에게 커밍아웃을 했다더라. 그래서 그 집 부부가 로빈 윌리엄스와 캐시 베이커의 부부 연기를 지켜보면서 많이 울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가 현재 미국 사회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라고 느꼈다”는 게 정정훈의 얘기다. 은행 역시 내슈빌의 주택가에 있는 은행을 섭외해 찍었다.

“라이브한 공간이었으면 좋겠다”는 감독의 주문에 맞게 조명 역시 사실적으로 설계했다. 집 내부는 복도 등, 스탠드 조명 등 실제로 있는 조명을 적극 활용했다. “집 하면 전체적으로 따뜻한 느낌이 있어야 하지만 놀란의 집은 건조하게 보이는 게 중요했다.” 은행 역시 자연광을 활용했다고 생각할 만큼 사실적이지만, 실제로는 인공조명을 많이 썼다고 한다. “건물에 햇빛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은행 창밖에 더블 스크림이라는 천을 세팅한 뒤 인공조명을 자연광처럼 보이도록 설계했다.” 놀란이 레오를 만나는 밤거리, 놀란이 차를 타고 운전하는 거리 등 야외 장면 역시 실제 가로등 빛에 의존했다. 사실적인 조명 설계는 색보정 작업(DI)으로까지 이어졌다. “색이 과도하게 올라오지 않도록 콘트라스트를 많이 주지 않았다”는 게 정정훈의 설명.

정정훈에게 <블러바드>는 알렉사라는 카메라를 처음 사용한 영화이기도 하다. 사실적이지만, 평범한 드라마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까닭에 “콘트라스트가 작고, 렌즈에 따라 다양한 룩을 선보일 수 있어 운용 폭이 넓은 알렉사를 선택”했다. “심도가 얕은 렌즈를 많이 썼고, 광량이 많은 낮에도 조리개를 활짝 열어 찍었다.” <블러바드> 이후, 정정훈은 여러 광고에서 알렉사를 많이 사용하게 됐다.

<블러바드>는 정정훈에게 짧은 회차도 능숙하게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였던 동시에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로빈 윌리엄스와 호흡을 맞춘 작품이기도 하다. 아역 배우 출신이기에 누구보다 배우들을 잘 이해해 배우들을 편하게 하는 정정훈이지만, 처음에는 작업 스타일이 서로 달라 신경전도 있었다. 배우들의 감정이 중요한 이야기이니만큼 카메라가 배우들을 따라가는 게 중요했다. “수많은 조명을 세팅한 뒤 그 조명을 피해 서야 하는 배우들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큰 게 아닐 것이다. 그런 기계적인 작업 방식보다 배우의 감정에 맞춰 카메라의 앵글을 그때마다 수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로빈 윌리엄스는 평생 자신이 카메라 앞 어느 곳에 서야 할지 숙지한 뒤 연기해온 배우였다. “촬영을 시작한 지 이틀째 되는 날까지 ‘왜 서야 할 위치를 알려주지 않느냐’고 물어보셔서 ‘자유롭게 움직이면 카메라가 따라가겠다’고 대답하자 되게 어색해하셨다. 캐시 베이커가 내가 영어를 못 알아듣는 줄 알고 로빈 윌리엄스에게 ‘왜 저런 촬영감독을 데리고 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 로빈 윌리엄스가 나를 가리키며 ‘쟤, <올드보이> 찍은 애야’라고 보호해주고. (웃음)”


오! 로빈 아저씨

정정훈의 촬영 방식이 익숙해지자 배우들은 조금씩 자신의 마음을 열었다. 서야 할 위치를 미리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연기하다가 카메라 옆이나 뒤로 오기도 하고. 로빈 아저씨는 감당이 안 될 정도로 현장을 즐기셨다. 자연스럽게 앵글은 엉망이 되고. (웃음)” 처음에는 다소 까칠했던 캐시 베이커 역시 누구보다 먼저 정정훈을 챙겼다. “예민한 감정을 연기하는 장면을 리허설할 때 배우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자리를 피해줬는데, 캐시 베이커가 나를 불러 리허설하는 거 보라고 배려해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어릴 때 수많은 영화에서 본 로빈 윌리엄스의 모습을 코앞에서 지켜볼 수 있어 행복했다고 한다. “로빈 아저씨는 슛 들어가기 전에 카메라 앞에서 항상 성대모사를 하셨다. 원맨쇼 하듯 떠들고, 한컷 끝나면 스탭들과 장난을 쳤다. 촬영이 끝나면 이동식 아이스크림 차를 섭외해 아이스크림도 사주시고. 로빈 아저씨가 정말 잘해주셨다. 그의 가족들도 다 만났는데….” 이국땅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맡은 영화에서 로빈 윌리엄스를 만나 행복하게 작업했던 까닭에 정정훈은 그의 죽음을 누구보다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야기가 워낙 건조하고, 사실적인 설정이라 정정훈은 촬영하는 내내 ‘이야기가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 불안해했다고 한다. <스토커> 때는 박찬욱 감독 같은 상의할 사람이라도 있었지만, <블러바드> 촬영 당시 그는 철저히 혼자였다. “힘든 상황에서 맡아 부담감이 컸고, 제대로 찍고 있는 건지 확신도 없는 데다가 상의할 사람이 없어 무척 외로웠다”는 게 정정훈 감독의 회상이다. 다행스럽게도 <블러바드>는 정해진 회차 내에 촬영이 무사히 끝났고, 그의 촬영에 만족한 디토 몬티엘 감독은 정정훈을 할리우드에 많이 소개해줬다. ‘정해진 회차를 넘기지 않고, 함께 작업하기에 전혀 문제없는 촬영감독’이라는 입소문이 퍼져나간 덕분에 <블러바드>는 촬영감독 정정훈의 미국 활동의 신호탄이 됐다. 그때부터 광고가 많이 들어왔고, <본 아이덴티티>(2002)를 연출한 더그 라이먼과 광고를 찍는 등 여러 편의 광고 작업을 했다. 지난해 <나와 얼과 죽어가는 소녀>(<Me and Earl and the Dying Girl>, 감독 알폰소 고메즈 레존)에 촬영감독으로 참여해 올해 초 열린 제31회 선댄스영화제 미국 드라마 부문에서 심사위원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스스로는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촬영”이라고 겸손해하지만, <블러바드>는 촬영감독 정정훈에게 계속 전진할 용기를 준 작품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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