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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훈 Nov 26. 2015

할리우드에서 커리어를 ‘다시’ 시작하기

<올드보이> <스토커> <신세계> 촬영감독 정정훈의 할리우드 도전기

<씨네21> 994호 기획기사 


기획/정정훈 촬영감독의 할리우드 도전기 


주요 필모그래피 

<나와 얼과 죽어가는 소녀>(<Me and Earl and the Dying Girl>(2015)) 

<블러바드>(<Boulevard>(2014))

<신세계>(2013) 

<스토커>(2013) 

<부당거래>(2010)

<평양성>(2010)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

<박쥐>(2009)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다세포소녀>(2006)

<친절한 금자씨>(2005)

<남극일기>(2005)

<쓰리, 몬스터>(2004)

<올드보이>(2003)

<유리>(1996) 


편집자주/ 

새해 초 미국에서 낭보가 전해졌다. 세계 최고의 독립영화제인 제31회 선댄스영화제 미국 드라마 부문에서 <나와 얼과 죽어가는 소녀>(<Me and Earl and the Dying Girl>, 감독 알폰소 고메즈 레존)가 심사위원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했는데, 그 촬영감독이 바로 정정훈이었다. <스토커>(감독 박찬욱, 2013)와 <신세계>(감독 박훈정, 2013)를 연달아 찍은 뒤 할리우드에 도전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지 거의 2년 만에 거둔 결실이었다. 충무로에서 잘나가는 촬영감독이었던 그가 모든 걸 내려놓고 미국에 정착한 사연은 무엇일까. 직접 경험해본 할리우드는 어땠을까. 현재 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제작 모호필름, 용필름·출연 하정우, 김민희, 김태리) 촬영 준비 때문에 한국에 들어온 그를 만나 할리우드 도전기를 들었다. 

글 김성훈·사진 손홍주·편집 이다혜·디자인 강지효  


대책 없이 용감한 걸까. 아니면,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것일까. 촬영감독 정정훈은 <스토커>와 <신세계>를 연달아 찍은 뒤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출세작 <올드보이>(2003)를 시작으로 <친절한 금자씨>(2005),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박쥐>(2009) 등 박찬욱 감독 작품 대부분을 촬영했으며, <부당거래>(감독 류승완, 2010)와 <평양성>(감독 이준익, 2010) 등 여러 작품을 정신없이 찍으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중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말이다. 백발이 되도록 카메라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는 할리우드와 달리 나이 들면 퇴물 취급 받는 충무로에선 잘나갈 때 바짝 벌어야 한다. 매년 재능 있는 신인이 갑자기 툭 튀어나와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는 건 일도 아닌 촬영감독의 자리는 더더욱 그렇다.  


멋진 화면만큼 중요한 작품이해도

정정훈이 밀려드는 작품들을 마다하고 할리우드라는 더 넓고 새로운 무대에 도전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할리우드에서의 첫 작품 <스토커>를 찍으면서 생겼다. 물론 <올드보이> 때도 해외 여기저기로부터 많은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그때는 여러 이유로 “때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스토커>를 통해 할리우드 스탭들과 함께 할리우드 시스템을 경험하면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2년 정도 미국에서 있어볼까”라는 자극을 받게 됐다. “할리우드에서 외국인 촬영감독 대접을 받기보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활동하는 촬영감독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쟁력이 어느 정도 될까 시험해보고도 싶었고. 현재 충무로에는 젊은 감독들이 많다. 그들은 또래의 스탭들을 선호하는 까닭에 조금만 나이가 들어도 설 자리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미국에서 누군가가 내 나이를 듣고 ‘되게 어리다’고 하니까 오랫동안 일을 하고 싶어 그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게 그의 설명. 40대 중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인 데다가 영어가 능숙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작품을 제안받고 가는 게 아닌 까닭에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맨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그의 도전은 꽤 무모해 보였다. 

충무로에서 인정받는 촬영감독이었기 때문일까. 그의 도전 소식을 들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걱정보다 응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와 함께 박찬욱 감독의 작품 대부분을 함께했던 송종희 분장감독은 “언어의 장벽이 있겠지만 워낙 순간적인 대처 능력이 뛰어나고 성격이 적극적이라 더 큰 무대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면서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찬욱 감독 역시 세 가지 이유를 들며 정 촬영감독의 도전을 전혀 말리지 않았다. “일단은 총각이니까. 딸린 식구 없는 몸이 뭘 못해보겠나. 감독과 제작자들에 의해 선택되는 게 촬영감독의 운명이라면 좀더 큰 시장에 있는 편이 이롭다. 아니다 싶으면 ‘아, 잘 놀았다’ 하고 돌아오면 되는 거지. 두 번째 이유는 영어는 잘 못해도 필요한 건 알아듣고 주장하고 다 하더라. <스토커> 때 아는 단어 열개 가지고 미국인 조감독과 논쟁하고 대판 싸우더니, 나중에는 화해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언어구사 능력과 의사소통 능력은 별개라고 느꼈다.(웃음) 세 번째 이유는 당연하게도 ’실력’이 있으니까. 요즘은 촬영 장비가 좋아지고 후반 공정에서 만질 수 있는 여지가 많아 촬영감독의 실력 차이가 ‘멋진’ 화면을 찍어내느냐 아니냐로 갈리지 않는다. 작품을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 그 해석 능력에 달렸다. 정정훈은 그런 면에서 누구보다 탁월하다.” 

정정훈의 미국행을 유일하게 반대(?)했던 사람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 <평양성>(2011)을 함께한 이준익 감독이었다. 이준익 감독은 “충무로에서 좀더 많은 작품을 함께 만들며 놀아야 하지 않겠냐”고 정 촬영감독을 붙잡았다. 물론 그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이준익 감독 특유의 유머가 섞인 응원이었다. 어쨌거나 정정훈은 주변 사람들의 응원을 뒤로하고, 태평양 바다를 건넜다.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미국 LA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한국엔 언제 돌아올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가지고 간 돈, 다 떨어지면! (웃음)”

호언과 달리 통장 잔고는 LA에서 생활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바닥을 드러냈다. 충무로에서 모아둔 돈으로 아파트와 차를 샀고, 어학원을 다녔고, 생활비를 충당했다. 초기투자비용이라 생각했지만, 이토록 출혈이 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LA 생활은 어학원 수업과 미팅의 연속이었다. “미국 가자마자 어학원부터 다녔다. 20대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수업을 들었는데 선생님들에게 구박도 많이 받았다. 한달 정도 다니다가 미팅 때문에 수업을 빠지는 날이 많아 학원마저도 더이상 다니지 못했다.” 미팅은 감독이나 제작자를 만나 작품에 관한 의견을 나눈 뒤 그들로부터 간택당하는 구직 활동이다. 에이전트를 통해 시나리오가 들어오면 읽어본 뒤, 주선해준 미팅에 나가 감독이나 제작자들에게 자신을 어필해야 한다. 에이전트가 해주는 것은 일을 미팅을 주선해주는 것과 계약을 진행해주는 것뿐, 나머지 일은 모두 그의 몫이다. 

한국에서 난다 긴다 했던 그였지만 미국에서는 완전 신인이었다. 필모그래피, 연락처 등 자신의 정보를 알리기 위한 홈페이지와 그간 찍었던 작품들의 쇼릴(show reel, 누군가에게 제시할 목적으로 제작한 소개용 영상물)을 직접 만들어야 했던 것도 그래서다. “쇼릴은 다 만들었는데 홈페이지는 만들다가 말았다. (웃음) 한국에서라면 누군가가 추천이라도 해줬을 텐데 미국에서는 그런 게 없으니…. 그렇다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초반에는 영어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미팅에서 감독이나 제작자가 그와 함께 일하길 원했지만 스튜디오 임원들이 반대한 경우도 많았다. 영어를 못하는 데다가 촬영 회차가 늘어질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한국에서 70회차씩 찍던 사람이 20회차 촬영이 가능하냐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너무 좋은 기회가 많았는데… 왜 영어를 일찍이 배우지 않았는지.” 그래서 처음 두달은 우울증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매일 밤 술 없이 잠을 자지 못했고, 대낮에도 커튼을 치고 살았다. 할 일이 없어 집에서는 거의 잠만 잤다. “영어공부 한다고 책 펴놓고 있어도 왠지 모를 분노가 밀려왔다. 여기서 뭐하고 있나 그러고.” 


로빈 윌리엄스와의 <블러바드>

집에만 틀어박힌 지 세달쯤 지났을까. 귀국을 결심하고 있던 정정훈 앞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작품이 있었으니, 그건 로빈 윌리엄스의 유작 <블러바드>(<Boulevard>(감독 디토 몬티엘, 2014))다. “나 말고 촬영할 사람이 없었는지 몰라도…굉장히 고마운 작품이었다. 38회차로 찍었던 <스토커>보다 더 집중적으로 짧은 회차를 소화하는 게 가능할까 테스트를 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블러바드>는 정확히 20회차로 찍었다. <스토커>보다 절반이나 적은 스케줄이었던 셈이다. “미리 생각을 하지 않으면 현장에서 포기하고 가야 한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선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그 회차에 맞춰 찍는 건 감독들에게 가혹하다. 아닌 걸 알면서도 가야 하니까.” 제시간에 잘 찍어야 하는 건 충무로나 할리우드나 매한가지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시간과 예산에 관한 한 충무로보다 훨씬 엄격하다. 영화마다 제각기 다르지만 제작비 규모가 훨씬 크고, 배우의 일정이 철저하게 지켜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날씨를 비롯한 여러 현장 상황이 받쳐주지 못해 그날 촬영분을 못 찍으면 감독과 촬영감독만 손해다. 

<블러바드>는 정정훈에게 짧은 회차도 능숙하게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던 동시에 로빈 윌리엄스라는 할리우드 스타와 호흡을 맞춘 작품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작업 스타일이 서로 달라 신경전도 있었다. “한국에서도 배우들에게 서야 할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반면, 로빈 아저씨는 평생 배우 생활하면서 자신이 어디에 서야 하고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연기를 하는 분이었다. 촬영을 시작한 지 이틀째까지는 ‘왜 서야 할 위치를 알려주지 않냐’고 하시더라.” 하지만 아역배우 출신이기에 누구보다 배우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정정훈 촬영감독에게 로빈 윌리엄스는 금세 적응해 현장을 즐겼다고 한다. “작품 성격상 배우가 카메라 가까이에서 연기해야 했다. 연기하다가 카메라 옆이나 뒤로 오시기도 하고.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로빈 아저씨는 현장을 즐기셨다. 자연스럽게 앵글은 엉망이 되고. (웃음) 로빈 아저씨가 정말 잘해주셨다. 그의 가족들도 다 만났는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까닭에 정정훈은 로빈 윌리엄스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러모로 많은 의미를 가진 <블러바드>는 촬영감독 정정훈의 미국 활동 신호탄이 됐다. 정정훈과의 작업에 만족한 디토 몬티엘 감독이 할리우드에 좋은 소문을 내줬다. 정해진 회차를 넘기지 않고, 함께 작업하기에 전혀 문제없는 촬영감독이라고 말이다. 그때부터 광고가 많이 들어왔고, 여러 편의 광고 작업을 했다. “광고를 안 할 수가 없다. 사실 미국에서 했던 영화들은 저예산영화들이다. 한국보다 물가가 비싼 까닭에 좀더 여유 있게 버티려면… 광고를 안 하면 하기 싫은 작품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광고를 찍을 땐 간과 쓸개를 냉장고에 넣고 나오라는 얘기도 한다. (웃음)” 

그즈음 광고뿐만 아니라 영화 시나리오도 많이 들어왔다. 그중 눈에 띄는 저예산 시나리오가 있었다. 감독과 함께하기로 결정됐는데, 촬영 직전 정정훈은 촬영을 거절했다. 스튜디오가 그에게 쇼릴을 요구한 것이다. “지금이었다면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텐데 당시엔 쇼릴을 보여달라고 요구한 게 자존심이 상했다. 신인이라는 마음으로 미국으로 간 건데 잠깐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거절을 하고 나서 잠을 못 잘 정도로 좋은 시나리오였는데… 아직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감독이 정정훈에게 이메일을 통해 “왜 연락을 끊었는지” 물어왔지만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작품은 올해 오스카 수상작 중 한편이다. 

그 작품이 그랬듯이 여러 이유로 인연이 닿지 않은 작품도 많다. 대니얼 크레이그와 르네 젤위거의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았던 법정 미스터리물 <더 홀 트루스>(감독 코트니 헌트, 2015)도 그중 한편. 한달 넘게 프리 프로덕션을 진행하던 중, 대니얼 크레이그가 돌연 하차하면서 영화가 엎어진 것이다. 이 영화는 얼마 전 대니얼 크레이그가 맡기로 한 역에 키아누 리브스를 캐스팅하면서 다시 제작을 재개했다. “얼마 전, 코트니 헌트로부터 선댄스 수상을 축하하는 이메일을 받았다. 프리 프로덕션 때 내가 냈던 라스트신 아이디어를 그대로 쓰겠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기꺼이 영광이라고 대답했다. 언젠가 함께 작업할 날이 있겠지.” 

<더 홀 트루스>가 엎어졌을 때 정정훈은 “되는 일이 없다”고 다시 좌절했다. LA로 돌아왔을 때 급하게 받았던 시나리오가 바로 <나와 얼과 죽어가는 소녀>였다. 스릴러 같은 ‘다크’한 이야기를 찾고 있던 중에 들어온 하이틴물이었다. 이야기는 재미있었지만 망설여졌다고 한다. 코미디가 가미된 드라마는 주특기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충무로에서 찍었던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코미디와 로맨스가 가미된 작품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다세포소녀>(감독 이재용, 2006) 정도다. 두 편 모두 감독의 개성이 강했으나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진 못했다. 시나리오를 읽고 난 뒤 바로 다음날, 정정훈은 피츠버그에 있던 알폰소 고메즈 레존 감독과 스카이프 미팅을 했다. 편한 마음으로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만 나눴다. 알폰소 고메즈 레존 감독은 대화 시작한 지 20분 만에 “촬영 얘길 안 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라며 “내일 당장 피츠버그로 짐싸서 올 수 있을까”라고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그 다음날 그는 짐을 싸서 피츠버그로 가 <나와 얼과 죽어가는 소녀>에 합류했다. 

전작 <블러바드>가 할리우드의 살인적인 촬영 회차를 테스트했던 작품이라면 <나와 얼과 죽어가는 소녀>는 이제껏 해보지 못한 새로운 장르를 도전한 작품이었다. 하이틴물이라고 해서 마냥 가볍게, 또 예쁘게 찍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의미가 있었던 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감독을 만나 서로 의지하며 즐겁게 찍었다는 것이다. 어두운 작품을 주로 촬영했던 정정훈처럼 알폰소 고메즈 레존 감독 역시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2011) 같은 호러, 스릴러영화를 주로 찍어왔다. 정정훈은 “피츠버그에서 통역을 구하긴 했지만 감독이 ‘말이 잘 안 통하더라도 직접 대화를 하자’고 그러더라. 그다음부터는 편하게 둘이서 회의를 하면서 완성해갔다. 배우들도 어린 친구들이라 정말 편하게 호흡을 맞췄다”고 떠올렸다. 감독, 촬영감독을 포함해 모든 스탭과 배우가 어우러져 찍었던 덕분일까. 영화는 선댄스영화제 미국 드라마 부문 심사위원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하며 2관왕에 올랐다. “덕분에 영화 DB 사이트 IMDb에서 순위가 많이 올랐다. 물론 지금은 다시 떨어지긴 했지만. 에이전트에 메일을 보내면 답장이 곧바로 오고. (웃음)” 


“촬영 횟수를 줄인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현재 그는 한국에 들어와 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의 프리 프로덕션을 진행하고 있다. 미국으로 가기 전의 정정훈과 미국에서 <스토커> <블러바드> <나와 얼과 죽어가는 소녀> 등 세 편의 영화와 여러 광고를 찍고 돌아온 정정훈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박찬욱 감독은 “촬영 횟수를 줄이는 문제에 있어 굉장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렇다. 나는 ‘적은 촬영 횟수를 잡는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촬영 횟수를 줄인다’고 표현했다. 나를 잘 아는 프로듀서와 조감독은 전에 늘 내가 해오던 페이스를 적용해 <아가씨>의 회차를 계산해냈다. 나와 정정훈은 그 회차에서 1/8을 줄이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나와 정정훈’팀과 ‘프로듀서와 조감독’팀의 차이는 <스토커>를 경험했는가, 아닌가다. 그리고 나와 정정훈 사이에도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 정정훈은 2/8를 줄이자고 하고 있으니까. 정정훈과 나의 차이는 <블러바드>와 <나와 얼과 죽어가는 소녀>를 경험했는가, 아닌가에 있겠다. 어쨌거나 그의 이 태도가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 아닌지는 <아가씨>를 찍어봐야 알 것 같다”는 게 박찬욱 감독의 기대다.  

그렇다면 촬영 회차를 줄이겠다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충무로에 있을 때보다 더욱 철저하게 촬영을 준비한다는 뜻일까. 박찬욱 감독은 “프리 프로덕션을 더 열심히 하는 식으로 회차를 줄이는 건 힘들 듯하다. <올드보이>부터 <박쥐>에 이르는 작품들을 할 때보다 더 열심히 프리 프로덕션을 할 순 없으니까. 그저 조명을 빨리 세팅하는 수밖에 없다. 빠르면서도 거칠지 않고 정교하게 라이팅하는 실력은 이미 <스토커>에서 확인한 바 있다”고 설명했다. 

정정훈에게 <아가씨>는 <신세계> 이후 2년 만의 한국영화다. 하정우, 김민희, 김태리 모두 처음 작업하는 배우들이다. 꽤 긴장이 되는 것도 그래서다. 그럼에도 마음은 편하다고 한다. “박찬욱 감독을 비롯해 류성희 미술감독, 송종희 분장감독 등 친정 식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설렌다. 촬영 끝나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냐고? 그럼. 아직 도전할 일이 많다.”  


박스1/<블러바드>와 <나와 얼과 죽어가는 소녀>는 어떤 영화? 

정정훈 촬영감독이 찍은 할리우드영화는 <스토커>와 <블러바드> 그리고 <나와 얼과 죽어가는 소녀> 등 총 3편이다. 이중, <블러바드>와 <나와 얼과 죽어가는 소녀>는 그가 충무로에서 주로 찍었던 장르와 거리가 먼 영화들이다. 로빈 윌리엄스의 유작으로 알려진 <블러바드>는 평화로운 결혼 생활을 위해 헌신하는 남편 놀란(로빈 윌리엄스)에게 어느 날, 한 젊은 친구가 나타나 놀란의 비밀과 마주하게 하는 내용의 드라마다. 2014 트라이베카필름페스티벌에서 첫 공개됐으며, 아직 국내 개봉은 미정이다. <나와 얼과 죽어가는 소녀>는 그레그와 얼이라는 두 고등학생이 암에 걸린 소녀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성장담이라고 한다. 블랙코미디가 가미된 드라마라고. 역시 국내 개봉은 아직 미정.  


박스2/박찬욱 감독이 정정훈 촬영감독을 고집하는 이유는? 

사석에서 정정훈 촬영감독이 농담처럼 한 말이 있다. “박찬욱 감독이 안 불러주면 어떡하나 늘 두렵다(웃음)”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정훈은 <올드보이>를 시작으로 최근의 <스토커>까지 촬영을 맡으며 박찬욱 감독을 내조해왔다. 한국에 실력 좋은 촬영감독이 그뿐만은 아닐 텐데, 박찬욱 감독이 항상 정정훈과의 작업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올드보이> 때는 이상하게 유명한 촬영감독들이 하나같이 바빠서 정정훈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는 정정훈이 특별히 잘못하는 게 없으니까 바꿀 필요를 못 느껴 여기까지 오게 됐다. 이상 농담이었고, 진짜 이유는 이렇다. 드라마와 캐릭터를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사고가 유연해 대담한 구상을 잘해내는 데다가 읽은 책이나 본 영화가 많지 않아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 없다. 말에 조리는 없지만 지능이 높아 생각이 논리적이고, 상황 판단에 있어서 동물적인 본능이 발달돼 순발력이 좋다. 아역배우 출신이라 그런지 배우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고, 단편이나마 연출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감독 입장에서 볼 줄 안다. 젊은 날의 나를 능가하는 일중독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웃긴다”는 게 박찬욱 감독의 친분과 농담이 녹아든 명쾌한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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