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가 고장났다.
드럼 세탁기 말고 양말이나 걸레를 빨던 작은 세탁기였다. A/S를 불렀는데 세탁기 통을 돌리는 클러치가 고장났다며 부품비만 20만원이 넘는다고 했다. 둘째인 딸아이가 아기였을 때 샀으니 거의 24년이 되었다. 고장날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났다.
쓰임새가 있었으니 없으면 당장 아쉬울 듯 했다. 다시 한 대 살까 고민했지만, 세탁기가 있고 여분으로 쓰던거고, 이제 세탁할 것도 그리 많지 않고 살림을 점점 줄여야 하니 사지 않기로 했다. 세탁기 콘세트를 뽑고, 수도꼭지에서 분리하고, 배수관도 해체했다. 인터넷으로 배출신고를 하고 확인증을 프린트해서 붙였다.
정확하게 몇년도에 샀는지 확인하려고 뒷면을 봤지만 연도는 적혀있지 않았다.
딸아이를 낳자, 아이 옷을 어른들이 쓰던 세탁기에 빨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때 아들아이가 5살이었다. 아들옷을 세탁할 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딸아이는 왠지 연약하고 더 보살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검색에 검색을 거듭해서 뜨거운 물로 세탁하는 것이 아니라 세탁조 자체의 열을 올려 삶아준다는 아기사랑 세탁기를 산 것이었다. 딸아이를 진공상태에서 키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깨끗하게 삶은 옷을 입혀야 할 것 같았다.
사실 그렇게 삶는 기능은 그닥 쓰지 않았고, 나중에는 걸레랑 양말을 빨았다. 세탁물을 큰 세탁기에 빨고, 거기서 분류해낸 양말을 작은 세탁기로 동시에 돌리며 시간을 절약했다. 하지만 지금은 남는게 시간이니 작은 세탁기가 없어도 될 것이다.
아기사랑 세탁기를 버리며 여러가지 감정이 들었다. 처음 딸을 키우던 때의 심정, 세탁기를 두대 돌리던 휴일의 어느날,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거의 지나가고 남편과 둘이 남은 삶을 인정하고, 세탁기를 또 사지 않는 것. 이렇게 성장하고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