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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돌이 Apr 04. 2024

태풍에 날아간 안경

비바람 속의 유즈얼 서스펙트

대부분은 비가 내리고, 몸살 기운이 돌며, 스트레스가 가득 차 있다는 변명으로 걷지 않습니다. 반대로 비가 내리는 날이라도, 몸살 기운이 몰려와도, 스트레스에 시달려도, 바로 그 이유로 밤마다 걷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며칠째 이어지는 비 때문에 걷지 못해 몸도 마음도 무겁습니다. 오늘도 걷지 못할까 하는 불안함은 잠시뿐이었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니 빗줄기가 가늘어져 있었고, 비바람을 막아줄 트레이닝복을 입으면 충분히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일기예보는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아내는 위험하니 나가지 말라고 걱정하지만, 바로 이 순간, 소강상태를 틈타 걸음을 옮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집을 나섰습니다.


해운대를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필수 방문지인 동백섬은, 제 집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런 행운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걷다 보면, 누리마루가 유유자적 그 모습을 드러내고, 나무 사이로 달빛에 출렁이는 밤마다가 보이며, 밤조명을 치장한 광안대교가 아름다운 풍경을 완성합니다.

비는 그리 많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힘차게 팔을 저으며 동백섬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동백섬에 가까워질수록 비가 점점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안경에 맺힌 빗방울을 닦아내며 걸어야할 정도로 비는 더욱 거세졌습니다. 발걸음을 돌릴까 고민하다가, 막상 동백섬 안에 들어가면 걷기 수월할꺼란 생각에 계속 걸었습니다. 


첫 바퀴. 우거진 나무 가지들이 우산이 되어, 비를 막아주었습니다. 트레이닝복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배경 삼아, 팔을 힘차게 흔들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두 번째 바퀴가 시작되자, 비바람은 점점 더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앞서가던 커플이 소리를 지르며 비바람을 피해 나무 아래로 대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도 급히 나무 아래로 몸을 숨겼지만, 가지에서 쏟아지는 빗물 세례를 받았습니다. 안경에 맺힌 빗물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강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 것은 한층 더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마지막 바퀴는 포기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동백섬의 보호를 벗어나자, 거세진 비바람을 그대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우산조차 쓸모없게 만드는, 옆으로 세차게 몰아치는 비를 맞으며 바람과 싸우는 듯한 긴장감 속에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이런 무모한 시도는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하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걸었습니다.

상가 골목을 지나 마침내 집 앞 횡단보도에 도달했습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 서둘러 건너, 놀이터를 지나는 순간, 갑작스런 돌풍이 안경을 날려 버렸습니다.

평소에도 안경 없이는 소파 옆 리모컨조차 찾지 못하는 제 시력으로, 깜깜한 밤, 비가 내리는 놀이터에서 안경을 찾는 일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왜 굳이 태풍이 몰아치는 날에 걸으러 나선 걸까?" 스스로에게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다른 안경을 가져올까, 만약 누군가 안경을 밟는다면 어떡하나, 찾는데 최소한 1시간은 걸릴 텐데, 이러다 몸살이라도 나면 어떡하지? 머릿속은 수만 가지의 고민으로 가득 찼습니다.



놀이터와 단지 내 도로를 가르는 좁은 화단 앞에 잠시 주저앉았습니다. 화단 속으로 손을 뻗었습니다. 깜깜한 밤, 비가 내리는 놀이터만큼이나 어두운 화단 속에서 무언가가 손끝에 닿았고, 그것을 조심스레 꺼냈습니다. 안경이었습니다. 안경을 들고 물기를 털어내며, 자연스럽게 얼굴에 걸쳤습니다. 그 순간, 세상이 다시 선명해졌습니다.

"됐어, 너무 자연스러웠어." 비바람 속에서 안경을 잃어버리고, 다시 찾는 전 과정이 잘 짜여진 각본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번 일상의 소소한 모험 속에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일상의 루틴도 중요하지만, 태풍 경보가 내려질 때는 루틴을 잠시 접어두고,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겠다. 그 날, 태풍 속의 작은 모험은 일상에 예외 조항 하나를 추가하게 만든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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