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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피 Jul 14. 2023

너 T야? 너 F야? T와 F의 대화가 어긋나는 이유

MBTI와 화행론

  대학원에서 알게 된 중국인 친구와 처음으로 식사를 하고 카페에 간 날이었다. 당시에는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수업도 스터디도 모두 비대면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알고 지낸 기간은 꽤 되었지만 서로 실물을 본 건 처음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MBTI가 뭐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와 선생님, 방금 정말 한국인 같았어요!"


  한국에서 혈액형을 이어 성격 관련 스몰토크계의 대표 주자가 된 MBTI. 아직 별자리가 좀 더 인기 있는 나라도 있는 것 같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MBTI가 강세다. 자기소개 자리에서 MBTI 이야기가 빠지는 법이 없고 인터넷을 조금만 둘러봐도 MBTI 밈이 쏟아져 나오며 심지어 MBTI를 싫어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MBTI 싫어하는 거 보니 너 XXXX지?' 하는 질문이 돌아오는 세상이다. 혈액형이나 별자리보다는 더 근거가 있다고 인식되는 것인지 아니면 유형이 16가지나 되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인터넷 MBTI 검사가 유형별로 그럴싸한 캐릭터를 잘 부여해 놓아서인지 아무튼 MBTI는 매력적인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나 역시도 MBTI를 흥미롭게 여기지만 MBTI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잘 설명해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현재 그 사람이 세상을 대하고 있는 방식을 잘 드러내 준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지, 또 스스로를 주변에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 언어생활로는 어떻게 드러나는지가 나의 주요한 관심사다.


  E(외향형)와 I(내향형), S(감각형)와 N(직관형), P(인식형)와 J(판단형) 사이의 차이도 많이 논해지지만, 유독 서로 대립 구도로 그려지는 것은 역시 T(사고형)와 F(감정형)인 것 같다. (물론 과장된 갈등이지만) 감정형은 사고형이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사람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릴 줄 모른다고 하고, 사고형은 감정형이 문제 해결을 할 생각이 없어 보여 답답하고 스스로의 감정도 주체할 줄 모른다고 한다. 공감을 못(안) 해주는 사람에게 "너 T야?" 하는 밈이 퍼지고 또 이에 맞서 너무 감정적인 사람에게 "너 F야?" 하는 밈이 생겨나고 하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나는 F와 T 비율이 반반이라 T 집단에서도 F 집단에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라든가, '나는 F인데 애인이 T라 상처를 받는 일이 많다' 하는 고민 글들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나는 T와 F는 '발화'에 있어 집중하는 부분이 다르다고 본다. T와 F가 이해하고 표현하는 언어와 관련하여 이번 글에서는 오스틴(J. Austin)의 화행론(speech act theory)을 참고해 보려고 한다.


  '화행(speech act)'은 단어 그대로 '말로 하는 행위'이다. 즉 발화는 말 그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를 수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의미를 가진 문장을 발화하는 행위는 '발화 행위', 발화 행위에 수반되는 진술, 질문, 지시 등의 행위는 '발화 수반 행위', 지시 발화를 들은 청자가 그 지시 내용을 수행하게 되는 것처럼 발화가 청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발화 효과 행위'라고 한다.


  발화 수반 행위의 종류로는 진술, 질문, 명령, 청유, 감탄 등이 있다. 그리고 문장 유형과 그 의사소통 목적이 일치하면 '직접 화행', 그렇지 않으면 '간접 화행'이라고 부른다. 가령 "좀 춥지 않아?"라는 의문문을 말했을 때 정말 춥지 않은지 궁금해서 질문한 것이라면 이는 직접 화행이 되고, 창문을 닫아 달라든가 에어컨을 꺼 달라든가 담요를 갖다 달라는 요청이 목적이라면 간접 화행이 된다. 게 말해 간접 화행은 돌려 말하는 방식의 일종인 것이다.


  내가 보기에 사고형(T)의 사람들은 공감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발화 행위' 자체에 집중하고 주로 '직접 화행'을 수행하며 다른 사람의 발화도 '직접 화행'을 기본값으로 해서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또 감정형(F)의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발화 효과 행위'에 관심을 기울이며 '간접 화행'을 잘 수행하고 다른 사람의 발화에서도 간접적으로 숨은 의도가 없을지를 먼저 고려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본인이 말을 할 때 신경 쓰는 부분도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러니 이들의 대화는 어긋날 수밖에 없다. 사고형(T)은 감정형(F)이 변죽만 울리며 말하고 괜히 꼬아서 듣는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감정형(F)은 사고형(T)이 듣는 사람에 대한 배려 없이 말하고 말 뒤에 숨은 의도와 맥락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고 느낄 것이다.


  T와 F를 판별할 수 있다는 유명한 문장, "나 우울해서 파마했어."를 살펴보자. 이 문장 안에는 화자가 '우울했다'는 사건과 '파마했다'는 사건이 포함되어 있다. 별다른 사전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내용상으로는 '파마했다'는 사건이 결론이고 문장 구조상으로는 '우울해서'는 종속절, '파마했어'는 주절의 서술어이다. 따라서 이 발화 속의 주요 사건은 '파마했다'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이 문장은 평서형 종결 어미를 사용하는 평서문이다. 이를 직접 화행으로 보면 청자에게 대답을 요구하거나(의문문) 특정 행동을 할 것을 요구하지(명령문, 청유문) 않고 그저 '파마했다'는 사실을 진술하는 문장이 된다. 바로 이렇게 '파마했다'는 내용이 발화된 '발화 행위' 자체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직접 화행으로 해석하는 것이 사고형(T) 사람들이 될 것이다. 반대로 화자가 이 문장을 발화함으로써 청자에게 어떤 행동을 바랐는지를 먼저 생각하여 '발화 효과 행위'에 주목하고, 이를 '우울한 감정에 대한 공감 또는 위로를 요청하는' 간접 화행으로 해석하는 것이 감정형(F)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언어 사용으로 인한 충돌은 결국 모든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기인한다. 그 방식은 일정 부분은 타고난 것이라 어떤 이들은 서로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스스로가, 그리고 남들이 언어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는지 관심을 기울인다면 언젠가 다른 유형의 언어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화용론은 세계 평화를 위한 필수 교과목일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쓸 때 참고한 자료들

구본관·박재연·이선웅·이진호(2016), 『한국어 문법 총론 2』, 집문당.

Austin, John L.(1962), How to Do Things with Words, Oxford University Press.

Yule, G.(1996), Pragmatics, Oxford Universtiy Press. (서재석 역(2011), 『화용론』, 박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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