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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Gray Apr 07. 2023

인생이 고단할 때

어떻게 이렇게 쉽게 되는 일이 없냐


요즘 남편과 친구들, 동료들과 가장 자주 하는 말이다. 어떻게 눈에 보이는 모든 난관에 죄다 걸려가며 일이 이어지는 지 모르겠다. 


며칠 전 오래 준비했던 일이 크게 미끄러지면서 또 한 차례 땅굴을 파고 지하로 내려갔다 왔다. 나는 연구를 할 재목이 아닌가, 내 연구주제가 정말 연구로서 가치가 없는 것인가, 박사를 그만둬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다. 지지부진한 박사생활 힘든 이야기를 풀어봤자 뭐하겠는가.


근데, 이 불운한 일이 있기 이틀 전만 해도 내가 인생에 참 행복한 순간에 머무르고 있다 생각했다.


어릴 적 나는 해외에서 다국적의 사람들과 외국어로 쏼라쏼라하고 웃으며 지내는 걸 꿈으로 꾼 적이 있더랜다. 그 꿈에 비추어 보니, 지금의 나는 많은 이들이 낭만의 도시라 여기는 파리, 오분만 걸으면 세느강과 루브르 박물관이 눈 앞에 보이는 그 한복판의 학교에서, 그 어렵고 멋진 박사과정을 하며, 여러 국적의 동료들과 영어도 쓰고 불어도 쓰면서 농담을 주고 받는다. 그 웃는 여인의 머리 위로 햇살이 쏟아지고, 듣기만 해도 먼 곳으로 데려다주는 아코디언 연주가 들려온다. 


지금의 인생을 어떤 프렌치 영화의 한 장면이라 생각하면 참 멋지다. 한 인간의 성장기 속 한 장면이라 생각해도 참 멋지다.


사실은 해뜨기 전 어두컴컴한 골목을 지나니, 출근하는 길에 보이는 게 잘 없다. 아침 커피라도 마셔야겠는데 학교 매점은 정시에 여는 법이 없다. 15분을 멍하니 매점이 문 열 때까지 기다리다가 90센트짜리 종이컵 커피를 사들고 연구실에 들어선다. 하루에 하는 말이라곤 안녕, 한마디다. 동료들과 함께 하는 점심시간에는 무슨 말이 오가는 지 반의 반도 못 알아듣는다. 어쩌다 말이라도 걸라치면 한참을 이상한 말을 횡설수설해서 대화의 리듬을 다 깨먹어 서먹하게 만든다. 또 결국 그 싸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황급히 할 일이 있는 것처럼 자리를 털고 먼저 일어난다. 그렇게 하루종일 햇볕 하나 들지 않는 연구실에서 하루를 보내다 집으로 돌아간다. 날씨가 좋아져 세느강 걷기가 좋다던데. 루브르에 관광객들이 그리 많이 삼삼오오 줄을 지어있다는데. 며칠 전 파리를 다녀간 어느 유튜버로부터 그런 소식을 전해 듣는다. 


사실 프렌치 영화의 한 장면을 벗겨낸 삶은 이처럼 회색빛이다.


내가 아주아주 멍청하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건 내가 연구를 못해서도, 언어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언젠가 아주 어릴적부터 꿈꿨던 그 장면 안에서 살면서도 좋은 줄 모르는 나의 멍청함 때문이다.



올 초, 집에서 담근 파김치가 너무 먹고싶었다.

구순이 넘으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한겨울에 쪽파를 사다가 김치를 담궈주셨다. 어머니가 그 김치를 먹기 좋게 정리해서 큰 김치통에 새지 않게 팩으로 꼭꼭 싸매어 담아주셨다. 아버지가 그 김치를 아이스박스에 넣어 택배로 울산에 있는 사위에게 부치셨다. 남편은 그 김치를 시어머니께서 주신 몇 가지 음식들과 함께 캐리어에 차곡차곡 쏟아지지 않게 담았고, 시아버지께서 새벽같이 운전하신 차를 타고 인천공항에서 12시간 비행편으로 파리에 왔다. 그렇게 파김치를 먹었다.


인생이 고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경우는 모르겠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힘든 시절을 겪는 사람들도 있을테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테고. 그러니 그 사람들 인생이 고단한 지 안한지는 난 모른다. 그래도 적어도 나만큼은 나, 이 인간만큼은 인생이 고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거 아닌가? 이렇게 낭만적인 인생 속에서, 이렇게 셈할 수 없는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 감히 고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거 아닌가?


아주아주 멍청하다.


너무 마음이 힘들 때는 시야가 좁아져서 내가 낭만적인 장면 속에 있다는 생각이 안든다. 그래서 우주다큐를 자주본다. 우주다큐를 보다보면 내가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가, 내 고민이 얼마나 먼지만한 일인가, 내 고통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면서 좀 더 담대해진다. 


고단한 인생을 고단하지 않게 사는 방법은 너무나 잘 알려져있다. 

'지구별 여행자', 이 세상에 소풍 온 것처럼 사는 것. 내 인생을 제 3자의 시각에서 쳐다보는 거다.

그게 우주적 인간인 것 같다. 


우주적 인간으로 살면 인생이 덜 고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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