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 동료들이랑 자주 하는 농담으로 논문을 마이 베이비라고 한다. 팔 하나 없고, 눈도 없고, 입도 비뚤어졌지만 마이 베이비.
박사를 시작한 지 1년 하고도 5개월이 흘러,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박사 2년차 중반에 접어들었다. 2년차 중반이면 3년차에 올라가기 위해 커미티 회의에서의 평가를 거쳐야 한다. 그게 5월에 예정되어 있다. 1년차 때랑 별반 크게 나아진 게 없는 것 같은데 벌써 3년차 올라가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니 어이가 없네. 그동안 도대체 뭐했나 싶다.
최근 연구윤리심의 때문에 크게 엎어진 김에, 지난 박사 1년차 때를 한번 정리해보려고 한다.
1년차 때 나를 가장 괴롭히던 것은 연구주제를 잡는 문제였는데, 교수나 연구팀에서 진행하는 대형 프로젝트에 소속되지 않는 이상 개인 연구주제를 스스로 설정해야 하는 것이 박사과정 시작 시점의 가장 큰 난관인 것 같다. 내 경우는 후자인데, 사회학 분야에서는 연구주제가 워낙 광범위하기 때문에 지도교수조차도 자기 지도학생 연구주제에 문외한인 케이스들이 더러 있다. 그러니 지도교수에게 연구주제에 대해서 어떤 도움을 받겠다고 하는 게 조금 어려운 경우들도 있다. 나 역시 석사 때 교수가 지나가는 말로 했던 단어 몇개로 헬렐레하며 주제를 대충 잡았다.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얼마나 불가능한지 전혀 생각도 없이.
연구주제 설정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일단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데에서 시작된다. 박사입학 시 필요한 프로젝트 계획서가 있긴 하지만, 그 프로젝트 계획서대로 연구가 진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그 프로젝트 계획서 제목에서의 몇 개 중요한 키워드(!)가 박사1년차가 갖고 있는 연구주제의 전부라고 보면 된다. 대략 박사과정생들은 몇 개의 연구 '키워드'를 가지고 거기에서부터 관련된 논문들을 읽어보면서 이 '키워드'와 관련된 어떤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특히, 논문 말미에 "향후 이러이러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라는 대목을 주의깊게 보다 보면, 어떤 연구가 현재 부족하고 앞으로 필요한 지 대강 알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대충 이런 식으로 연구주제를 잡는데, 그 과정이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왜냐면 박사 초년생은 쏟아지는 논문의 홍수 속에서 어떤 논문을 읽어야 하는 지 옥석을 가릴만한 기준조차 전혀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단 맨 처음에는 구글스칼라, 펍매드에 들어가 내 연구 키워드를 치고 위에서 먼저 나오는 순서대로 마구잡이로 읽어보는 수 밖에 없다. 특히나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이공계와 달리 연구 경향이라는 것이 매우매우 느린 속도로 전개된다. 그래서 이공계가 몇 개 탑저널에 실린 논문들로도 어느 정도 최신연구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사회과학에서는 탑저널 논문들만으로는 최신 연구경향을 쉽사리 판단내리기도 어렵다. 그러니 이 literature review라고 불리는 과정에만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연구주제를 잡는다 하더라도 그 연구주제를 내가 할 수 있는 연구인지, 할 수 없는 연구인지를 알아보는 것은 또다른 문제이다. 이를 연구의 실현가능성(feasibility)라고 하는데, 나는 이 부분에 대한 가늠을 잘 못했던 것 같다. 물론 아주 큰 틀에서 이건 절대로 내가 할 수 없는 방법론이겠구나 싶은 건 있었다. 예를 들어, 10년 간 환자를 추적관찰한다든지 하는 식의 방법론은 아무리 무수한 논문들에서 그런 연구가 필요하다 말해도 박사생 개인 연구자가 결코 할 수 없는 연구다. 그런 연구는 생각도 안했다. 또 너무 괴랄한 주제도 안된다. 연구대상자나 해당 필드에 접근이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코하람을 관찰연구를 한다던지 김정은 주변인을 인터뷰한다든지 등등... 물론 하면 대박이지만 목숨을 걸어야할 수도 있다. 또 반대로 너무 제너럴하고 쉬운 주제도 안된다. 사실 연구에 있어서 쉬운 주제가 뭐가 있겠냐마는, 너무 상식적으로 보이는 연구주제를 선택할 경우 그 상식적인 주제에서 삽 하나를 더 퍼내는 듯한 특별한 결과와 해석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 연구 주제가 쉬우면 쉬울수록 방법론이 엄격해지는 반작용도 있다. 어려운 연구주제일 경우, 10명만 인터뷰해도 오케이 되는 반면, 쉬운 연구주제일 경우 한참 많은 수의 인터뷰 자료를 요구받을 수도 있다.
근데 연구주제를 잡는 초반에는 이런 가늠이 잘 안 된다. 사실 이건 연구를 많이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종의 경험의 영역인 것 같다. 어떤 연구를 얼마의 기간 안에 끝낼 수 있고 없고를 어느 정도 판가름 하는 일 말이다. 그래서 초반 연구 주제에서 계속 좁혀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나는 아직까지 주제를 잘라내면 그만큼 결과거리도 줄어들까봐 잘 좁혀나가지 못하고 있긴 하다.
그리고 이런 실현가능성을 가늠하는 게 어려운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데이터 수집이 예측이 안되기 때문이다. 인터뷰 연구나 설문지 연구나 몇 명의 사람들이 인터뷰 또는 설문에 응해줄 지 사전에 알 수가 없다. 물론 사전에 어떤 집단(예를 들면 학교 등)과 연구 협의가 되어 있다면 대략적인 예측이 가능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다. 특히, 민감한 연구주제일수록 대상자를 찾는 데 무조건 난항을 겪는다. 최악으로는 대상자를 한 명도 못 찾을 수도 있다. 난 이게 사회과학 연구에서만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다. 근데 세포 키워서 연구하는 생물학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배 타고 6개월 간 극지방 돌아다니는 지구과학도 그렇고, 심지어는 장비로 실험연구하는 전공에서도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특히 실험연구들은 장비 한대 한대가 워낙 고가이다보니 그 장비를 자기 혼자서 독차지하고 쓸 수도 없을 뿐더러 고장이라도 나면 몇 주에서 몇 달까지도 날려먹을 수도 있다고 한다. 말마따나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열심히 하면 실현 가능하겠징! 이라고 생각해서 그 연구주제를 시작했다가 피박을 면치 못한다.
그 피박이 바로 나다...
연구주제 잡는 것도 그냥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시작했다가, 이제는 가끔 연구주제에 압도당하는 느낌까지 받는다. 이 어려운 주제를 대체 어떻게 실현하겠다는거야? 라는 질문이 늘 머리 속에 맴돈다.
아무튼 1년차, 그리고 현재까지도 연구주제에 대한 고민은 끊임이 없고, 많은 고년차 동료들이 자기는 처음에 잡았던 연구주제가 뭐였는지 기억도 안난다고들 한다. 그래서 하하 위로를 잠깐 받기도 하지만 아마 계속해서 졸업 직전까지도 내 연구주제에 대해서 계속 고민할 것 같다. 이게 단순히 연구주제만이 문제가 아니고, '문제의식'이 무엇인지를 규명해야 하는 게 어려운 것 같다. 이 연구주제 속에 담긴 나만의 문제의식이 도대체 뭔지를 잘 정리하는 게 어려운 것 같다.
1년차에서 2년차 넘어가던 시기에 이런 연구주제에 대한 고민으로 한달 간 방황을 하고 연구를 손 놓게 된 적이 있었다. 하루종일 밥도 잘 안먹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거나, 종종 산책만 하고 하루를 흘러보내는 시기였다.
근데 내 연구주제, 눈도 없고 다리도 없고 팔도 한짝 없어 부족한 데가 많은 이 아기를 나 아니면 누가 사랑해주겠는가. 나 아니면 누가 우쭈쭈 해주겠나. 그러니 어느 놈이 칼들고 난도질 하려들면 나라도 나서서 지키고 보호해줘야 한다. 내 애가 최고야! 그 누구도 때릴 수 없으셈! 해야 한다.
1년차부터 지금까지
타임라인을 보면, 입학(2021년 11월)부터 1년차 중순(2022년 5월)까지 literature review와 통계공부에 시간을 쓰면서 연구주제를 잡고 공공데이터셋을 받아서 R 분석을 돌렸고, 6월에는 베를린에 일주일 간 LGBT-에이즈 연구 세미나를 다녀왔고, 여름방학 2달은 개인사로 인해 거의 연구를 중단했고, 9월부터 설문지 개발에 착수했고 통계분석해서 썼던 석사데이터 논문은 폐기하기로 결정했고, 1년차에서 2년차 넘어가던 10월에 한달 간 방황했고, 그 뒤로 다시 3개월 간 설문지 개발을 해서 완성시켰고 그 설문지와 함께 IRB 서류를 준비해 제출했고 (2023년 1월), 그 뒤로 2월에는 계속 설문지 마이너 수정이랑 질적연구 파트 개발 해서 IRB 서류를 추가로 접수했고 한국 대학연구소에 컨택해 3개월 방문연구생 초청장을 받았다. 3월에는 질적연구 선행 필드워크를 시작해서 인터뷰를 진행했고 또 다른 공공데이터셋을 받았으며 파이썬을 시작했다. 와중에 2차례 컨퍼런스에 다녀왔다. 그리고 4월 초인 엊그제 그지 같은 IRB 결과를 받았다. 그리고 이 시기동안 150시간의 코스워크를 들었다. 이게 2년차 중반까지의 내 연구 타임라인이다.
근데 나는 어쨌든 RA나 TA, 강의 전담 등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에 훨씬 자유시간이 많은 편임에도 이래저래 자잘구레 할 일이 많았다. 아마 대부분의 박사생들은 훨씬 더 바쁘게 살 것이다. 그리고 연차가 쌓이면 쌓일수록 아마 더 바빠지겠지. 바쁘게 사는 게 뭐 좋은 일이냐. 할만큼만 하고 저녁에는 잘 쉬고, 주말에도 잘 쉬고, 여행도 다니고 취미생활도 하고 그렇게 살아야 사람 사는거지.
짧게는 4년 길게는 6년 7년도 걸리는 그야말로 초장거리 마라톤이니 결과를 성취해야 한다고만 생각하면서 내달리면 금새 지치기 십상이다. 인간이 5년 6년을 매일 12시간 13시간 지적 작업을 하면서 산다는 게 가능이나 할까. 설사 오랜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연구를 한다 하더라도 딴짓하는 시간, 딴 생각하는 시간을 빼고나면 정작 하루에 집중하는 시간은 그보다 짧을 것이다. 그렇게 코스프레 하고 있는 시간에 차라리 밖에 나가서 햇빛이라도 쐬고, 운동장이라도 뛰는 게 호흡을 길게 가져갈 수 있는 방법인 듯 하다. 앞으로도 힘내서 잘 즐기며 해봅시다.